경대승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그 위세에 눌려 산골로 내려가 숨어 살았지만 경대승이 죽고 나니 별로 두려워할 자가 없었다. 그는 곧 궁중으로 들어가 뇌물과 권모술수로 권세를 잡고 포악무도한 행패를 자행하기 시작했다.
관직의 고하는 뇌물을 많이 바치느냐 적게 바치느냐에 달렸으며, 남의 재산을 함부로 빼앗았고, 양가의 처녀라도 얼굴만 반반하면 마음대로 첩을 삼고 나중에는 궁녀들에게 까지 손을 대게끔 되었다. 처음에는 이의민의 간사한 언동에 속아서 그를 총애하던 왕도 행패가 심해지니 마음 속으로 차츰 못마땅하게 여기게 되었지만 이미 조정에 뿌리 깊이 세력을 부식한 그를 어찌할 수 없었다.
특히 의민의 아들 지영(至榮), 지광(至光)은 아비 이상으로 횡포한 자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길을 지나가기만 하면 백성들은 "이크, 저기 쌍도자(雙刀子)가 오는군."하고 수군거리며 길을 피해 숨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무력으로 정권을 잡고 권세를 누리면 반드시 같은 무력을 지난 자가 그를 시기하고 그 자리를 대신하려는 야망을 품기 쉽다.
이의민 부자가 한창 행패를 부리게 되자 "이놈들, 어디 두고 보자. 며칠이나 가나." 이렇게 은근히 벼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최충헌(崔忠獻)과 그의 아우 최충수(崔忠粹)였다. 최충헌은 우봉(牛峯) 사람으로 그의 부친 원호(元浩)는 상장군이었다. 말하자면 무관으로서는 명문의 출신이다. 원래 성품이 사납고 용맹할 뿐 아니라 권모술수에도 능한 인물이었다. 일찌기 조위총이 난을 일으켰을 때 공을 세워 별초도령(別抄都令)이 되었으며 다시 섭장군(攝將軍)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우 충수는 동부녹사(東部錄事)가 되었다.
명종 이십육년 어느날, 이의민의 아들 지영의 집에 최충수가 기르던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 들어갔다. 그 비둘기는 충수가 특히 사랑하는 비둘기였다. 충수는 즉시 지영의 집을 찾아갔다.
"우리 집 비둘기가 이 댁에 날아 들어왔으니 속히 내주시오." 하고 충수는 문전에서 소리소리 질렀다.
이지영이라고 하면 당대 세도가의 아들이다. 비둘기 하나쯤으로 큰 소리를 칠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므로 지영은 괘씸하게 생각하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충수는 다시 소리를 지른다.
"여보시오! 내 비둘기 못내 주겠소? 남의 물건을 가로채고 내주지 않는 걸 뭐라고 하는 줄 아오? 도적이란 말이요. 도둑놈이란 말이야."
가뜩이나 괘씸하게 여기고 있던 이지영, 이 말을 듣자 노발대발했다.
"뭐라구? 도둑놈이라? 그놈이 눈에 뵈는 것도 없나? 이 집이 누구 집인 줄 알고 그따위 욕설을 퍼붓는 거야."
지영은 곧 하인을 불러 충수를 묶어 들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호락호락하게 묶일 충수가 아니었다.
"이놈, 썩 물러가라 내 이래 뵈두 동부녹사로 있는 몸인데 너같이 천한 하인 놈한테 결박을 당할 줄 아느냐? 나를 묶으려거든 이장군이 직접 나서서 묶든지 어쩌든지 하라고 해라."
이 말을 듣자 이지영은 쓴 웃음을 지으며 "그놈이 뭘 믿고 저리 큰 소리를 치누?"하고 그 배짱에 놀라기도 했지만 한편 그대로 두었다가는 자기 위신이 떨어질 것 같기도 해서 직접 나가 매를 몇 대 때리고 돌려보냈다. 충수는 전부터 형과 함께 이의민의 일당을 미워하고 있었지만 이런 모욕을 당하자 더욱 격분했다. 그날로 형의 집에 달려가 낯을 붉히고 외쳤다.
"형님, 이의민 부자는 모두 다 고금에 다시 없는 역적이요. 내 그놈들을 한칼에 베어 버리겠는데 형님 의향이 어떠시오?"
그러니까 최충헌은 잠시 묵묵히 있더니 "나도 생각은 같지만 때가 아직 이르지 않을까?"하고 망설인다.
그러나 한 번 격분한 충수는 주먹을 휘두르고 씨근덕거리며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는다.
"형님이 못하시겠다면 나 혼자라도 하겠소. 말리지 마시오."
아우가 설치는 것을 보자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무슨 일을 저지를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충헌은 아우를 달래는 한편 마침내 거사할 것을 다짐했다. 그 해 사월, 왕이 보제사(普濟寺)로 행차하게 되었는데 의민이 몸이 편치 않다고 사양하고 자기 별장이 있는 미타산(彌陀山)으로 갔다. 이 정보를 듣자 최충헌은 뛸 듯이 기뻐했다.
그는 곧 아우 충수를 비롯해서 생질 박진재(朴晉材), 인척되는 노석숭(盧碩崇), 그밖의 여러 부하들을 거느리고 의민의 별장 문밖에서 대기 하고 있었다.
얼마 후 별장에서 몸을 쉬던 의민이 자기의 집으로 돌아갈 생각인지 다시 나와 말을 타려 한다.
이것을 보자 최충수는 "역적 의민아! 대의를 위해서 너를 기다린지 오래다." 소리치고는 소매 속에 감추어 두었던 칼을 뽑아 내리쳤다.
그러나 의민도 원래 녹록치 않은 자였다. 몸을 날려 칼을 피한다. 이것을 보자 이번에는 충헌이 소리 없이 다가가서 역시 소매 속에 감추었던 칼로 의민의 옆구리를 깊이 찔렀다. 그러자 의민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이와 동시에 의민을 호위하던 종자 수십인도 최충헌 일당의 칼 아래 모조리 쓰러졌다.
의민을 죽이자 충헌은 곧 노석숭에게 명했다.
"역적을 처치했으니 이날이 오기를 고대하던 백성들에게 속히 이것을 알려야 한다. 이의민의 목을 즉시 서울로 가져가서 큰 거리에 매달아 구경시키도록 하라."
이의민의 목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네거리에 내다 걸리자 서울바닥은 발칵 뒤집혔다.
"저게 바로 이의민의 모가지래."
"권세란 참 덧없는 것이로군!"
"그런데 그렇듯 세도가 당당하던 자를 누가 죽였지?"
"최장군 형제라더군."
"거 또 무서운 사람이 나타났군."
행인들은 서로 수군거렸다. 한편 일이 이렇게 되자 왕을 따라 보제사로 갔던 이의민의 나머지 일당은 겁에 질려 모조리 숨어 버렸으며 왕도 급히 궁중으로 돌아갔다. 이의민 일당의 풀이 꺾인 것을 보자 충헌과 충수는 칼을 뽑아들고 말을 몰아 서울 거리를 질주했다. 말하자면 자기네들의 무력을 과시하느라고 시위를 한 셈이었다.
그러다가 마침 백존유(白存儒)라는 장군을 만났다. 충헌은 그에게 이의민을 죽인 연유를 설명하니 백존유는 대단히 기뻐하며 말했다.
"장군, 대의를 위해서 잘하셨소. 내 즉시 군사를 더 모아 드리리다."
이렇게 말하고는 곧 장졸을 소집해 주었다. 충헌과 충수는 그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향했다. 그리고 궁문 앞에 이르러 왕에게 상주했다. "역적 이의민은 지난날 전왕을 시역한 대죄인일 뿐 아니라 갖은 부정한 짓을 다해서 권세를 잡고 백성들은 박해하고 마침내는 보위(寶位)를 엿보기에 이르렀던 자옵니다. 신등은 이 일을 차마 볼 수 없어 폐하와 나라를 위해서 역적을 주살했사옵니다만 비밀이 탄로될까 염려되어 폐하의 윤허를 받지 않고 거사하였음은 백번 죽어 마땅한 죄로 압니다."
다른 왕도 다 그러했지만 명종 역시 무력을 장악한 그들에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죄를 나무라기는 고사하고 전전긍긍(戰戰兢兢)하며 그 공로를 치하할 뿐이었다. 이것은 최충헌이 미리 계산한 바였다. 왕의 태도가 고분고분한 것을 보자 벌써 최충헌 일당에 가담한 대장군 이경유(李景儒), 최문청(崔文淸) 등이 최충헌의 뜻을 대신 상주한다.
"최장군의 충성으로 역적의 괴수 이의민은 비록 처치했사오나 아직도 그 잔당들이 숨어서 난을 일으킬 것은 분명한 일이오니 잔당들마저 일소할 것을 윤허하시기 바랍니다."
왕이 즉시 그것을 허락하니 충헌은 즉시 이, 최, 두 장군과 함께 거리에 나서서 의병을 모집 했다. 이의민 일당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장졸들과 장사들이 구름처럼 그 휘하에 모여들었다.
충헌 형제는 그들을 거느리고 의민 일파 삼십육명을 모조리 찾아내어 목을 베었다.
이렇게 해서 고려의 정권은 마침내 최충헌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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