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백제 궁중비사] 11. 興首와 階白

鶴山 徐 仁 2007. 2. 16. 21:21
금동미륵반가사유상그러나 아무리 해석을 좋게 한다고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바로 잡을 수는 없었다.
 
그동안 고구려를 공격하면서 백제 침공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당고종은 의자왕 二十년 三월, 좌위대장군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總管)으로 삼고 신라의 김인문을 부대총관으로 삼고 군사 十三만으로 백제를 정벌하도록 명했다. 그리고 또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우夷道行軍總管)으로 삼아 당군과 합세하도록 명했다.
 
이리하여 五월 二十六일, 신라왕 김춘추는 김유신 등 장병을 거느리고 서러벌을 출발하여 六월 十八일에 남천정(南川停=利川)에 이르렀다. 그리고 소정방은 수많은 전선(戰船)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덕물도(德物島=德積島)까지 왔다. 이런 정보에 접하자 백제의 의자왕은 그제서야 크게 당황했다. 그래서 여러 신하를 모아 놓고 방어책을 물으니 좌평 의직(義直)이 먼저 한 계책을 진언한다.
 
“당병은 멀리 바다를 건너오는 것이므로 물에 익숙지 않은 군졸들은 반드시 뱃멀미로 괴로워할 것입니다. 그런 즉 그들이 처음 육지에 내려 미쳐 기운을 돌리지 못했을 때 급히 공격한다면 섬멸할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신라는 대국의 원조만 믿고 허세를 부리는 터인즉 만일 당군이 불리한 것을 알면 반드시 두려워하여 감히 공격하지 못할 것이니 무엇보다도 먼저 당군을 공격하는 것이 급선무인 줄 압니다.”
 
의직은 일찍이 신라의 김유신과 여러번 싸운일이 있는 역전의 노장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의견도 들을 만한 의견이었으나 거기 대해서 달솔사영(達率常永)이 반대하고 나섰다.
 
달솔은 좌평 벼슬보다 하위의 관직이었지만 그는 좌평인 의직의 의견을 근본부터 반대한 것이다.
 
“그 계책은 가당치 않은 것으로 아옵니다. 당병은 먼 길을 온 까닭에 지루한 나머지 속히 싸우고자 할 것이오니 그 예봉을 당하기 어려울 줄로 아옵니다. 그와 반대로 신라군은 전에 여러 번 우리에게 패한 쓰라림을 알고 있으므로 우리 군사를 대하면 두려워서 제대로 싸우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하온즉 당병에 대해서는 쳐들어 오는 길을 막으면서 신라군을 먼저 격파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당군도 자연히 기세가 꺾이어 물러갈 줄로 압니다.”
 
정 반대되는 두 가지 의견이었다. 그리고 여러 신하들도 이 두 가지 의견으로 갈리어 서로 굽힐 줄을 몰랐다.
 
“아! 이럴 때 흥수가 여기 있었더라면.”하며 왕은 탄식했다. 흥수(興首)는 좌평 벼슬을 하던 중신으로소 식견이 넓고 포용력이 있어서 이렇게 국사를 논할 때 의견이 분분해지면 그 의견들을 잘 종합하고 거기에 자기의 독창적인 의견을 첨부해서 적절한 대책을 세우는 수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흥수는 그 얼마 전에 왕의 방종한 거동을 간하다가 멀리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長興)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흥수의 의견이 아쉬운 왕은 즉시 사람을 그에게 보내어“사태가 심히 위급하니 어찌하면 좋겠는가?”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흥수는 이런 의견을 진술해 보냈다.
 
<당병은 그 수가 많고 기강이 엄할 뿐만 아니오라 신라와 합세해서 대거 침공해 오므로 넓은 들에서 대진하고 싸운다면 그 수로나 진법으로나 우리의 군세로는 당적하기 어려울 듯 합니다. 그러하오나 백강(白江)과 침현(沈峴)같은 요지에서 지키고 있다가 섬멸하면 적을 무찌르기도 어렵지 않을 줄로 아옵니다. 즉 그곳에서는 한 장부가 창을 휘두르면 만 사람도 당하기 어려울 것이오니 마땅히 용사를 뽑아 당병은 백강에서 막고 신라군은 침현에서 막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대왕께서는 성문을 굳게 닫고 형세를 살피시다가 적군의 군량이 다하고 군사들이 피로한 기색이 보이거든 수하 장졸을 거느리고 진격하도록 하십시오.>
 
지난날 성충의 의견과 비슷하면서도 더 구체적인 대책이었다. 그러나 여러 대신들은 흥수의 탁견을 이해할 만한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한 번 귀양간 흥수의 의견이 채택되어 그가 다시 요직에 앉게 될 것을 몹시 시기했다.
 
그래서 말을 아름답게 꾸며 그의 의견을 반박했다.
 
“흥수는 오래도록 귀양살이를 하는 중이므로 대왕을 원망하고 있을 것이니 어찌 대왕을 위해서 이로운 말을 하겠습니까? 흥수의 말과 같이 당병을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인한다면 적은 거스리는 물에 배를 부리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또 신라군을 침현에서 막을 것이 아니라. 그 곳을 넘도록 버려 둔다면 길이 좁아서 군마가 한꺼번에 지날 수 없을 터인즉 이때를 타서 맹렬히 공격한다면 울 안에 들어 있는 닭을 잡는 격이요 그물에 걸린 고기를 주워내는 격이 아니옵니까?”
 
왕은 이번엔 그 말에 귀가 솔깃했다. 이와 같이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헛되이 시일을 보내고 있는데 벌써 당병은 백강으로 들어오고 신라군은 침현을 넘었다는 보고가 이르렀다.
 
이제는 더 공론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왕은 즉시 달솔 계백(階白)에게 적군을 막도록 명했다. 왕의 명을 받은 계백은 결사대 五천 명을 뽑아가지고 떠나게 되었는데 그는 떠나기에 앞서 자기 처와 어린 자녀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좌우 사람들이 크게 놀라 그 까닭을 물으니 그는 비창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제 당나라와 신라의 대군을 맞아 싸우게 되니 국가의 존망을 나로서도 예측할 수 없구료. 그런즉 장차 내가 싸움에 패했을 때 처자가 적들에게 욕을 당하거나 죽음을 당하느니보다는 차라리 내 손에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한 거요.”
 
오늘의 윤리관으로 따진다면 비판의 여지가 있는 행동이었지만 그 당시로는 일종의 미거(美擧)였다.
 
“계백 장군의 각오가 저렇듯 장하신데 우리들인들 어찌 부모처자에 대한 정에 마음이 끌릴 까보냐!”
 
五천 용사들은 이렇게 외치고 용약 전선으로 진격했다. 계백이 거느리는 백제군은 황산(黃山)벌에 이르자 진을 치고 전투태세를 갖추었는데, 이때 계백은 전 장졸을 향해 이런 말을 격려했다.
 
“옛날 월(越)나라의 구천(句踐)은 군사 五천으로 오(吳)의 七十만 대군을 격파한 일이 있다. 그런즉 우리 모든 장병들은 각각 분발하여 승리를 거둠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도록 하라!”
 
계백의 격려에 용기백배 된 장졸들은 적군과 대전하게 되자 일기당천의 기세로 진격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네 번 싸워 네 번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실로 눈부신 승리였다.
 
바로 이 싸움에 저 유명한 신라의 청년 장수 반굴(盤屈)이 전사했으며 관창(官昌) 또한 사로 잡혔다가 죽음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워낙 병력의 차이가 나는데다가 지리적 조건이 이롭지 못했던 백제군은 나중에 가서는 결국 신라군의 반격을 받아 장군 계백은 전사하고 상영(常永) 등 二十여 장수는 포로가 되는 대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한편 백제의 다른 부대는 지벌포에서 소정방이 거느리는 당군을 맞아 항전했으나 역시 대패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나당 양군은 합세하여 백제 서울을 향해 진격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