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백제 궁중비사] 13. 泗批城의 民族魂

鶴山 徐 仁 2007. 2. 16. 21:25
금동미륵반가사유상왕과 태자가 웅진(熊津)으로 피신하자 태(泰)왕자는 스스로 왕을 칭하고 남은 병력을 동원해서 끝끝내 성을 고수하려고 했다.
 
그러나 나당 양군의 공세는 날로 치열해져서 언제 성중으로 쳐들어올는지 알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때 성중에는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와 왕자 융(隆), 연(演) 등이 남아 있었다. 형세가 시시각각으로 위태로워져 감을 느끼자 문사는 융왕자에게 은밀히 속삭였다.
 
“숙부, 이대로 있다가는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융왕자도 불안해서 어찌할 줄 모르던 참이었다.
 
“글쎄 말이다. 이럴 줄 알았더면 부왕과 형님을 따라 웅진으로 피신하는 편이 좋을 뻔했구나.”

 
“그건 지난 일이니 이제 뉘우쳐도 소용 없구요. 앞일을 강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글쎄, 장차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
 
“부끄러운 말이지만 적에게 항복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요?”
 
“적에게 항복하다니? 차마 그럴 수도 없지 않으냐?”
 
“아닙니다. 지금 항복한다면 목숨이라도 건질수 있지만 끝내 버티다가 적군이 쳐들어 와보세요. 왕과 태자가 없는 성에서 굳이 항전을 했다고 적장의 노여움을 더 살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끝내 버티다가 요행히 적을 물리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숙부(泰)가 마음대로 왕이 되었으니 나라 안은 다시 두 동강이 나서 싸움이 시작될 게 아닙니까?”
 
문사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융왕자에게는 느껴졌다. 그래서 융왕자는 문사와 대좌평 전복(千福) 및 몇몇 시신을 거느리고 성문을 열고 나가니까 싸움에 지친 백성들이 그 뒤를 따랐다.
 
융왕자가 항복하자, 신라 태자 법민(法敏)은 그를 말 앞에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었다.
 
“지난날 너의 아비는 내 누이동생을 참살했을 뿐만 아니라 옥중에 묻어 놓아 二十년 동안이나 내 마음을 아프게 했으니 너도 그만한 응보를 받아야 할 줄 알아라.”
 
일찍이 법민의 누이는 김품석(金品釋)에게 시집을 갔는데 품석이 대야성의 도독으로 있을 때 백제 장군 윤충(允充)의 침공을 받았다. 이때 검일(黔日)이란 자의 내통으로 성이 위태롭게 되자 품석은 윤충의 권하는 말을 믿고 항복하려 하다가 백제군의 기습을 받아 처자를 죽이고 전사한 일이 있다. 이 일이 누이를 사랑하던 법민에게는 뻐져리게 원통했던 것이다.
 
융은 이미 항복한 몸이었다. 법민한테 어떠한 욕을 당해도 항거할 도리가 없었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피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융왕자가 항복한 후에도 태는 남은 군사를 모아 더 버티어 보려고 했다. 그러나 남은 병력이란 보잘 것 없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의 소정방은 전군에 호령하여 최후의 공격을 가하니 당군은 노도처럼 성벽을 넘어 마침내 성위에 당기(唐旗)를 꽂기에 이르렀다.
 
“이제는 마지막이로구나!”
 
태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그리고는 결국 성문을 열고 나와 적군 앞에 구명을 청하게 되었다. 일시 웅진으로 피신해서 재기를 도모하던 왕과 태자는 일이 뜻대로 되지도 않고 그렇듯 강경히 사비성을 지키던 태 왕자까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 해 七월 十八일, 마침내 적군 앞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로써 백제는 온조가 건국한 후 三十一왕 六七八년 만에(西紀 六六ㅇ년) 멸망한 것이다.
 
백제왕이 항복했다는 보고를 받자 신라왕 김춘추는 곧 금돌성(今突城)으로부터 사비성에 와서 제감 천복(弟監天福)을 당나라로 파견해서 전첩을 보고 하는 한편, 八월 二일에는 크게 잔치를 베풀고 모든 장병을 위로하게 하였다.
 
이때 김춘추는 소정방 및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당상(堂上)에 앉고 의자왕과 그 아들 융을 당하(堂下)에 앉힌 다음 갖은 모욕을 다 가했으며 취흥이 도도해지자 당상으로부터 손을 내밀어 당하에 앉은 의자왕에게 술을 따르도록 했다고 한다. 원래 아무리 적의 왕이라도 일단 항복하면 예대(禮對)하는 것이 상례인데 이렇게 욕을 보이는 것을 보고 백제의 여러 신하들은 눈물을 흘리고 이를 갈았다.
 
김춘추는 원래 견문이 넓고 대인관계에 능한 인물인데 의자왕을 이렇듯 냉대했다는 것은 얼핏 수긍이 가지 않는 일이지만 굳이 이유를 붙인다면 품석의 아내 즉, 자기의 사랑하는 딸을 죽인 데 대한 사감이라고나 할까? 그렇지 않으면 아직도 왕성한 백제 국민들의 저항의식을 위압으로 꺾어 보려는 술책이었을까? 지금 와서는 거려낼 길이 없다.
 
그 후 소정방은 의자왕과 태자 효, 왕자 태, 융, 연 및 문무 고관 八十八명과 백성 一만二천八백七명을 포로로 삼아 당나라로 보냈고 그 후 의자왕은 당에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의자왕이 항복한 후에도 백제의 왕실과 장수들과 백성들 중에는 도처에서 항전을 계속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의자왕에게는 풍(豊)이라는 왕자가 있었다. 그는 일찍이 볼모가 되어 일본으로 가 있었는데 백제가 멸망하자 종실 복신(福信), 중 도침(道琛) 등은 광복의 뜻을 품고 그를 왕으로 삼고자 사람을 보내어 귀국을 종용했다.
 
풍왕자는 비분 강개해서 일본 왕의 허락을 받고 급히 바다를 건너 고국으로 돌아왔다. 복신 등은 주류성(周留城)에서 풍왕자를 맞아 왕으로 세우고 전국 각처에서 의병을 모집했다. 그러자 서북부가 이에 호응하여 군세가 제법 강성해졌으므로 당나라 장수 유인원(劉仁願)이 지키고 있던 사비성을 포위했다.
 
갑자기 포위당한 사비성은 함락이 경각에 달한 듯 보였으나 당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의 원군이 도착해서 전세는 역전하고 일단 광복군은 임존성(任存城)으로 퇴진했다.
 
이때 도침은 스스로 영군장군(領軍將軍)이라 칭하고 복신은 상금장군(霜芩將軍)이라 칭하고 의병을 더욱 모아 들이니 그 세력이 날로 강성해졌다. 이렇게 되니 의기중천한 광복군측에서는 당장 유인귀에게 사자를 보내어 호언장담했다.
 
“듣건대 당은 신라와 약속하기를 백제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일체 살육한 연후 나라를 신라에 귀속시키겠다고 하니 그렇게 죽음을 당하느니 보다 어찌 싸워서 죽는 편이 떳떳치 않으랴, 이에 우리는 더욱 단결해서 최후의 일인까지 싸울 따름이다.”
 
이 말을 들은 유인궤는 여러 가지 좋은 말로 항복할 것을 달래었으나 광복군측은 코웃음으로 대할 뿐이었다. 이렇게 위세를 떨치던 광복군도 차차 내분을 일으켜 붕괴하기 시작했다. 즉 복신과 도침은 전부터 서로 맞서서 세력 다툼을 하고 있었는데 복신이 마침내 도침을 죽이고 임금으로 세운 풍을 누를 기세를 보인 것이다.
 
이렇게 되자 민심은 날로 이탈해 가고 광복군의 군세는 차츰 쇠약해 갔다. 이 틈을 타서 유인원, 유인궤 등이 일대 반격을 가하니 광복군은 웅진 동쪽에서 대패하고 다시 진현성(眞峴城)에 웅거하게 되었다.
 
이제 백제 광복군의 섬멸로 마지막 고비라 생각한 유인원은 당고종에게 구원병을 더 청하니 고종은 다시 원군 七천명을 보내어 나당의 병력은 한층 더 강해졌다.
 
이와 반대로 광복군측에서는 다시 내분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복신과 풍이 서로 다투게 된 것이다.
 
“아무래도 그 자를 없애야 나라를 도로 찾을 수 있겠어.”
 
이렇게 생각한 복신은 병이라 칭하고 굴방 속에 누워 풍이 위문하러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풍이 굴방 속에 들어오기만 하면 잡아 죽이려는 심사였다. 그러나 복신의 이러한 계교는 사전에 풍에게 탄로되었다.
 
“저런 괘씸한 놈이 있나? 그렇다면 제가 먼저 죽어야지.”
 
풍은 즉시 단단히 무장을 한 심복을 거느리고 복신을 찾아가서 오히려 그를 죽여버렸다. 복신을 죽이고 난 풍은 나당 양군과 마지막 결판을 낼 생각으로 고구려와 일본에 구원병을 청했다. 그러나 일본의 구원병도 백강(白江) 어귀에서 나당 연합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풍은 몸을 빼어 도망치고 얼마동안은 그 종적을 알 수 없게 되었는데 후에 고구려에서 풍왕자와 같은 귀인을 만났다는 소문이 떠돌게 되었다.
 
이로써 백제 유민의 가장 강력한 광복운동도 좌절된 셈이지만 그 후에도 산발적인 항전은 계속되어 백제 사람의 강인한 민족혼을 과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