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적은 승승장구해 온 강병이며 이편은 만신창이의 약졸들이다. 필사적인 분전에도 불구하고 사상자 1만여 명을 내고 완패했다. 만사가다 틀리고 말았다. 백제왕 의자는 가슴을 치고 탄식했다.
“어리석었느니라! 내가 어리석었느니라! 일찍이 성충과 흥수가 간하던 말을 들었던들 오늘의 이꼴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을…”
그러나 뒤늦은 뉘우침이었다. 七월 十三일, 왕은 태자 효(孝)를 비롯해서 여러 왕자와 왕족들을 불러놓고 마지막 의견을 물었다.
“적군의 공세가 하도 사나우니 이 이상 이곳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런즉 웅진성(熊津城)에 가서 재기할 기회를 기다릴까 하는데 너희들 생각이 어떠냐?”
그런즉 만사에 고분고분한 태자 효는 “부왕이 그렇게 뜻을 정하셨다면 그 뜻을 좇을 수밖에 없습니다.”하고 여러 아우를 불러 모았다. 그랬더니 둘째 왕자 태(泰)가 눈을 부라리고 음성을 높이며 외쳤다.
“아무리 부왕의 말이라도 나는 그대로 좇을 수는 없소!”
왕자와 왕족들은 모두 태왕자에게 눈길을 모았다.
“왕성을 버린다는 것은 곧 나라를 버린다는 뜻이요. 재기를 음모하겠다고는 하시지만 한번 버린 물건을 찾는다는 건 끝까지 지니고 버티는 것보다 몇 갑절 더 어려운 일로 아오. 하물며 우리 군사는 모두 적에게 섬멸되고 남은 병력이라고는 지금 왕성을 지키는 자들 뿐인데 웅진성이로 피신한다고 무엇을 믿고 재기 한단 말이요?”
이렇게 되니 의견은 둘로 갈라졌다. 왕과 태자는 어디까지나 웅진성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했다.
“네가 끝내 사비성을 지키겠다면 지켜보아라. 나와 태자는 웅진으로 가서 전국의 의병을 모을 것이니 후에 합세해서 적을 물리치도록 하자.”
마침내 왕은 이런 결론을 내리고 그날밤으로 태자와 함께 사비성을 탈출했다.
그러나 왕자 태는 성을 빠져나가는 부왕과 형에게 거의 증오에 가까운 눈초리를 보내며 투덜거렸다.
“임금이란 백성들과 고난을 같이 해야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법인데 백성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은 이미 임금의 자리를 내놓은 것으로 아시오.”
왕과 태자가 떠나자 사비성 모든 궁인과 백성들은 땅을 치고 통곡했다.
“왕과 태자까지 성을 버렸으니 누구를 믿고 산단 말이냐?”
“이젠 꼼짝없이 적군에게 잡혀 죽거나 욕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되었구나.”
그 중에서도 동요가 가장 심했던 것은 왕의 총애를 받던 궁녀들이었다. 나라를 잃게 된 슬픔, 하늘같이 믿어 오던 왕을 잃은 절망감, 적군이 쳐들어 왔을 때 당해야 할 능욕에 대한 두려움, 이런 것으로 마음 약한 궁녀들은 울부짖다가 “죽자! 적에게 잡혀서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우리 스스로 깨끗이 목숨을 끊자!”
한 궁녀가 부르짖고 나섰다.
“죽자! 깨끗이 죽자!”
모든 궁녀는 그 뒤를 따랐다. 죽더라도 깨끗이 죽고 싶은 궁녀들은 부소산 서쪽 백마강으로 내민 큰 바위로 몰려갔다. 지난날 왕을 모시고 노래와 춤으로 흥겹게 놀던 바위였다.
앞장 서 가던 궁녀가 바위 끝으로 가 두 손을 모아 궁성을 향해 읍하더니 치마를 뒤집어쓰고 백마강 푸른 물을 향해 떨어졌다. 그러자 다른 궁녀들도 뒤를 이어 떨어졌다.
전하는 말에는 이 바위에서 강물로 떨어져 죽은 궁녀가 三천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토록 많은 궁녀가 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수많은 궁녀가 앞을 다투어 벼랑에서 떨어지는 광경은 비참하다기보다 차라리 꽃같이 찬란한 정경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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