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대한민국 探訪

유학의 얼이 서린 곳

鶴山 徐 仁 2007. 1. 9. 11:15

유학의 얼이 서린 곳
'뼈대있는' 함양, 기틀 닦은 마을
'左안동 右함양' 예부터 유림의 고장
정·노씨 집성촌… 한옥 60여채 보존
옛 선비 글 읽는 소리 들릴듯
팔담팔정… 정자문화 1번지


 

산골 오지고을로만 알려진 함양. 하지만 조선시대 이후 자연에 묻힌 사림파 유림들이 이 곳에서 뿌리 내린 사실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조선시대의 풍경을 옮겨 놓은 듯한 한옥마을, 안동에 필적하는 역사 깊은 서원, 선비들이 시문을 논하던 정자 등 함양은 곳곳에 유림들의 흔적이 묻어 있다. 꼿꼿한 선비들의 기개가 느껴지는 함양으로의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 개평리 한옥마을  


 
▲ 조선시대 한옥 60여 채가 고스란히 보존된 함양 개평리 한옥마을 전경. 한옥들은 대부분 하동 정 씨와 풍천 노 씨 집안의 고택들이다.

한적한 고샅길에서는 금방이라도 조선시대 선비의 행렬을 만날 것만 같다. 박석(薄石)이 깔린 고샅길 따라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어진 돌담길 너머 풍경 소리가 정겹다. 마치 선비의 낭창한 글 읽는 소리 같기도 하다. 마을 구석구석 돌아 다니다 보니 몇백년 전 시간 속으로 들어간 듯 마음이 평온해 진다.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개평마을. 앞으로 남계천이 흐르는 도숭산 자락, 60여 채의 한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개평리 한옥마을이다. 한양에서 봐 낙동강 왼쪽에 안동이 있다면 오른쪽엔 함양이 있다. 이른바 '좌안동 우함양'이다. 함양은 예로부터 안동에 버금가는 유림의 고장으로 꼽힌 곳. 그 유림의 고장의 뿌리가 개평마을이다.

개평마을은 하동 정(鄭) 씨와 풍천 노(盧) 씨 집성촌이다. 한옥들 대부분에 이 두 성씨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 마을을 상징하는 인물이 일두 정여창(鄭汝昌·1450~1504) 선생. 조선 사림의 조종으로 꼽히는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이다. 이황 조광조 이언적 김굉필 등과 함께 조선 성리학 5현 중의 한 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개평리 한옥마을 중에서도 중심 지역에 정여창 선생 고택이 자리잡고 있다. 3000여 평의 너른 대지에 12동의 한옥이 들어앉은 전형적인 남도 지방 반가의 고택이다. 고택으로 들어서는 솟을대문부터 당시 반가의 위용을 말해준다. 대문 위쪽에는 임금이 충신과 효자에게 내렸다는 정려패 5개가 걸려 가문의 내력을 설명해 준다.

대문을 들어서자 곧바로 사랑채와 정원. 지금이라도 오가는 손님을 맞을 수 있을 정도로 깔끔하고 단아하다. 추사 김정희와 흥선대원군도 이 사랑채에 머문 적이 있다고 한다. '충효절의(忠孝節義)' '탁청재(濁淸齋)'라는 현판들에선 혼탁한 세상에 맑음을 추구했던 선비정신이 오롯하다.

사랑채 옆의 작은 정원이 인상적이다. 돌을 얹어 산을 축소한 형태로 정원을 꾸민 '석가산(石假山)'이다. 정원엔 45도가량 반듯이 누운 소나무가 운치를 더한다. 정원을 내려보며 사랑채 누마루에 앉으면 누구나 시인묵객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안채는 'ㅁ'자형 닫힌 구조다. 하지만 툇마루에 앉자 앞 문 위로 탁 트인 하늘과 군데군데 빈 곳이 보인다. 추위를 피하기 위해 네모로 둘러쌌지만 열린 공간을 남겨둔 것이다.

정여창 고택을 나와 마을 왼쪽을 흐르는 옥계천 옆 언덕으로 올라보자. 언덕엔 수백년 된 당송(堂松)이 기와집 일색인 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당송은 배가 떠내려가는 형상의 마을을 비보하기 위해 심었다고 전한다. 정여창 고택에서 조금 오르면 오담 고택. 조선 말 문장력이 특출했던 오담(梧潭) 정환필 선생의 고택이다.

하동 정 씨 외에 이 마을의 두 기둥 중 하나인 풍천 노 씨의 고택들도 많다. 풍천 노 씨 대종가를 비롯, 풍천 노 씨 노 참판댁, 조선 말 우리나라 바둑계의 일인자였던 사초(史楚) 노근영 선생의 고가 등이다.

하긴 마을 대부분의 집들이 고가인 탓에 어느 집이 더 크고 낫다고 할 것도 없다. 돌담길 따라 난 문 어느 곳엘 들어서도 우리 한옥의 정취에 흠뻑 취할 수 있다. 간혹 지키는 사람이 없는지 문을 굳게 걸어 잠근 곳도 있지만 돌담길 너머 어느 곳이든 안이 들여다 보인다.

함양군청 홍보계 곽성근 씨는 "개평마을은 안동 하회마을처럼 규모는 크지 않아도 '우함양'이라는 말답게 조선시대 선비문화의 또 다른 진수를 볼 수 있는 곳"이라며 "현재 민속마을 지정을 신청해 둔 상태라 머지 않아 마을 전체의 한옥 보존을 위한 방안이 마련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 남계서원&청계서원



▲ 조선시대 유학자 정여창 선생을 기리기 위해 고향마을에 후학들이 세운 남계서원.

남계천을 사이에 두고 개평리 한옥마을이 빤히 보이는 언덕배기에 정여창 선생과 관련된 유적이 또 하나 있다. 후학들이 선생 사후 그를 기리기 위해 세운 남계서원이다. 영주의 소수서원에 이어 국내 두번째로 조선 명종 7년(1552년)에 세워진 유서 깊은 서원이다. 남계서원은 흥선대원군이 단행한 서원철폐 때도 살아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로 지금까지 명맥이 이어져 오고 있는 것.

정여창 선생의 말년은 순탄치 않았다. 초야에 묻혀 자연을 벗삼고자 했던 선생이었지만 주위의 권유에 못이겨 41세라는 늦은 나이에 과거에 응시, 급제해 벼슬길에 나섰다. 한양에서 벼슬후 4년 뒤 고향인 안의현감을 자청했다. 그러나 중앙 정계는 이미 사화의 태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들을 향해 칼끝을 겨눈 무오사화로 선생은 결국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됐다. 7년의 유배생활 끝에 선생은 55세의 나이로 끝내 유배지에서 숨을 거둔다. 그의 시신은 사후에 고향으로 돌아와 묻혔지만 갑자사화로 또다시 부관참시라는 변을 당한다. 선생은 문종 때 우의정에 추증되고 문헌이라는 시호를 받아 마침내 문묘에 배향됐다.

서원에 들어서면 우선 마당에 아담하게 조성된 연못이 인상적이다. 생전에 연꽃을 좋아했던 선생의 흔적이다. 서원 오른쪽에는 이를 증명하듯 애련헌(愛蓮軒)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옆에는 양정재(養正齋)라는 건물이 있다. 혼탁한 세상에 마치 연꽃처럼 활짝 펴 바른 후학들을 기르겠다는 그의 뜻이 읽힌다.

뒤쪽 사당에서는 아래로 서원 전경과 남계천 너머 선생의 고향 개평마을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순탄치 못한 인생역정이었지만 그를 흠모해 이곳에 몰려들어 학문을 닦은 많은 후학들이 있어 그나마 위안이리라.

남계서원 인근에는 정여창처럼 김종직의 제자였던 탁영 김일손 선생을 모신 청계서원이 있다. 이곳은 김일손 선생이 1495년 청계정사를 건립, 학문을 수학하던 곳으로 그 또한 무오사화때 희생됐다. 이후 고종 때 후학들이 이곳에 유허비를 세웠으며 1921년 그의 위패를 모시고 청계서원으로 개칭했다.


# 화림동 계곡 & 정자



▲ 선비들이 노닐던 정자로 유명한 함양 화림동계곡에 들어 앉은 거연정과 주위 풍경.

남으로 지리산, 북으로 남덕유산 등 크고 작은 산으로 둘러싸인 함양. 높은 산은 깊은 계곡을 거느리기 마련이다. 남덕유산에서 발원하는 계곡 중 용추계곡과 함께 함양의 대표적인 계곡이 화림동계곡이다. 바위와 담, 소 등 절경을 품으며 장장 60리 길이나 뻗은 화림동 계곡은 이곳 유림들이 음풍농월하던 정자의 보고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이곳엔 '팔담팔정(八潭八亭)'이 있었다고 전해 온다. 계곡물이 휘감아치는 절경엔 어김없이 정자가 있었을 터지만 지금은 3곳의 정자만 남아 있다. 화림동계곡 정자의 대명사인 농월정 또한 사라진 것 중의 하나다. 불과 3년 전에 화재로 불타 사라져 안타까움이 남는다.

너른 반석과 옥류, 그 뒤로 병풍처럼 계곡을 품은 소나무. 이 절경의 화룡점정인 농월정이 사라져 아쉽지만 농월정 주위 풍경은 과연 화림동계곡 제1경답다. 함양군청 측은 현재 예산을 확보, 농월정 복원을 계획 중이다.

농월정에서 1㎞ 정도 오르면 동호정. 선조때 학자인 동호 장만리가 관직에서 물러난 후 노닐던 곳으로 후손들이 1890년 이곳에 동호정을 세웠다. 정자 바로 앞엔 500여 명이 앉아 놀 수 있을 정도로 큰 차일암이란 너럭바위가 눈길을 끈다. 누각에 앉으니 차일암 주위로 탁 트인 조망이 가슴까지 시원하다. 동호정에서 차로 3분가량 또 오르면 거연정과 군자정이 인접해 있다. 거연정으로 향하는 화림교라는 무지개 모양의 다리가 인상적이다. 거연정은 고려말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인 전오륜의 후손들이 1872년 세운 정자. 울퉁불퉁한 계곡의 바위 위에 그대로 기둥을 세웠다. 동호정 앞의 너럭바위와는 달리 정자 앞엔 뾰족뾰족한 기암들이 물길을 가르고 있다.

거연정에서 100여 m 아래 자그마한 정자가 군자정이다. 군자정은 정여창 선생이 즐겨 찾던 곳에 후학들이 1802년에 세웠다. 동호정이나 거연정에 비해 작고 고색창연하지만 이름처럼 꼿꼿한 군자의 기상이 서려 있는 듯하다.

화림동 계곡 정자 주위론 목재 산책로가 잘 조성돼 있다. 누각에 앉아 옛 선비의 풍취를 느껴보는 것도 재미지만 정자 건너편 산책로를 따라 계곡에 늘어선 기암들 곁에서 물소리를 가까이서 들어보자. [글=장재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