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성리학자인 이황의 성리학설과
이 학설을 계승·지지하는 학자들의 사상을 가리키는 개념.
16세기에 이르러 우리나라 유학자들에 의해 성리학에 대한 이론적 탐구가 본격화될 때
이것은 특히 오상(五常)과 사단칠정(四端七情)으로 포괄되는
인간의 성정(性情)을 이기론적으로 해석한 것인데, 그 대표적인 학자가 이황이다.
그는 사단칠정이라는 인간의 감정현상을 설명함에 있어서
사단과 칠정에 이와 기가 모두 관여하지만
그 발하는 바의 '소종래 '(所從來)와 '소주이언'(所主而言)의 차이에 따라
사단은 이발(理發)로, 칠정은 기발(氣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이황의 견해에 대해 당시 기대승(奇大升)의 이견이 있었으며,
이를 계승한 이이에 의해 사단과 칠정을 모두 기발로 설명하는 이론이 제시되었다.
이 사단칠정론의 차이는 이기론,·심성론,·수양론을 포함하는
성리학 전체의 이론적 체계를 달리하는 것이었으며,
그후 이황과 이이 의 제자·문인들에 의해 두 사람의 성리학이 계승·발전되면서
우리나라 성리학을 대표하는 두 계열의 학파와 이론적 체계를 수립하게 된다.
그 가운데 이황의 견해를 따르는 학자들과
그들의 이론을 주리파(主理派) 혹은 주리론이라 하며,
이들의 이론은 주기파(主氣派) 혹은 주기론이라 한다.
이와 기의 상호작용에 의해 만물이 형성된다고 생각하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리고 이기에 관한 가치론적 설명에서
기보다 이를 중요시한다는 점에서도 동일하다.
그러나 이기의 분개(分開)와
혼륜(混淪)에 대한 강조의 차이에서 나타나듯이,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입장을 철저하게 고수하여
'이기결시이물'(理氣決是二物)이라는
분개의 측면을 강조하는 데 반해,
주기론은 이기의 차별성을 인정하면서도
'이기원불상리'(理氣元不相離)라는 혼륜의 측면을 강조한다.
따라서 주리론에서 이는 객관적 실재로서의 성격이 명백하게 드러나며,
또 이와 기의 차별이 선명하게 부각된다.
이와 같이 주리론에서는 이와 기의 차별을 강조할 뿐 아니라
'이선기후'(理先氣後)라는 기에 대한 이의 선차성(先次性),
혹은 '이본기용'(理本氣用)과 같은 기에 대한
이의 우위성을 이발설을 통해 강조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즉 이의 능동성을 주장해, 이를 형태는 없으나 운동능력을 가지는 것으로 파악하여,
기와 함께 이에도 동정·운용·조작 등의 능력을 부여했다.
심성론의 측면에서 주리론과 주기론이 모두
'성즉리'(性卽理)를 주장하는 점에서는 전혀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이기의 분개를 강조하는 주리론은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을 별개의 존재로 파악하며,
또 이의 운동능력을 인정함으로써 '성발위정'(性發爲情)의 논리에 따라
사단은 본연지성이 발한 정으로, 칠정은 기질지성이 발한 정으로 설명했다.
그리고 이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갖춘 심은
이기의 합(合)으로 이해했으며,
심에도 형기(形氣)에 근원하는 인심(人心)과
성명(性命)에 근원하는 도심(道心)의 2가지가 있다고 했다.
성리학은 우주와 인간에 대한 통일적인 세계관을 확립함으로써
유교적인 도덕적 실천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학문이다.
따라서 주리론과 주기론의 이기·심성론의 차이는
결국 수양론의 차이로 귀결된다.
곧 이의 존재와 그것이 발한 사단을 강조하기 때문에
수양론에서도 본연지성을 제대로 지키고 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선한 행위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이 본연지성을 제대로 지키고 발현하기 위한 수양방법을 가리켜
'거경'(居敬)이라고 했으며 주리론의 수양론은 이 '거경'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이황이 확립한 주리론을 계승해 주리파가 하나의 학파로 성립한 것은
17세기 후반의 이현일(李玄逸)에 의해서이다.
이황의 성리학설에 대한 이이 와 그의 제자들의 비판을
재비판하는 형식으로 주리론을 옹호한 이현일 과
그의 학맥을 계승한 성리학자들에 의해 주리론이 발전되었으며
주리파가 형성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학자로는 이현일 과 그의 아들인 이재(李栽),
이재의 외손이며 문인인 이상정 (李象靖 ), 이상정의 제자인 남한조 (南漢朝 )와
그의 문인인 유치명(柳致明), 그리고 유치명의 학맥을 계승하여
주리론의 발전을 정점으로 이끈 이진상(李震相)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주리파는 이황의 학설을 계승했다는 점에서 퇴계학파라 부르며,
영남지방에 근거를 두고 활약했으므로 영남학파라 부르기도 한다.
주리파는 이이 의 성리학설을 비판하고 이황의 견해를 옹호하기 위해
무엇보다 이기의 근본적 차별성과 기에 대한 이의 선차성·우위성·능동성을 강조했다.
그 결과 유치명에 이르면 기의 활동을 기다리지 않고
이진상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는 스스로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의 동정에 의해서만 동정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되어
기의 능동성을 부정하고
이의 능동성만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이학종요〉를 저술했다.
그의 성리학설에 의하면 이기의 관계는 '
이주기복'(理主氣僕)의 관계이며,
이는 능동(能動)·자동(自動)이며
기의 동정은 이의 동정으로 인하여, 이의 시킴을 받아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성(性)의 명의(名義), 심(心)의 주재(主宰), 정(情)의 근인(根因)은
모두 하나의 이(理)일 뿐이다.
그 가운데 성은 미발(未發)의 이이 며,
정은 이발이 있을 뿐이고 기발은 없다.
정 가운데 이가 경기(經氣)를 타고 직출(直出)한 것은 사단이 되며,
이가 위기(緯氣)를 타고 횡관(橫貫)한 것은 칠정이 된다.
그리고 심의 본체는 이에 있고 기에 있지 않기 때문에
심의 정체실상(正體實相)을 바로 가리킨다면 '심즉리'(心卽理)하여야 한다.
이진상의 이러한 성리학설은 이전까지의 주리론을 계승·발전시킨 것이지만,
그 가운데 '심즉리'의 명제는
주리론의 전통적인 '성즉리', '심이기합'(心理氣合)의 명제와 충돌함으로써
주리론 내부에 이론적인 분화를 초래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19세기 주리론의 발달에서 특징적인 것은
이제까지 영남지방에만 그 학설이 계승되어 오던 상태에서 벗어나
이항로(李恒老)와 그의 문도로 이루어진 화서학파(華西學派)는
그 활동지역이나 당색으로 보아 영남의 남인학자들과는 별개의 학자들이었으나
주리론을 주장했다는 점에서는 일치했다.
그리고 기호지방의 학자들 가운데서 기정진(奇正鎭 )은
주리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리론(唯理論:理一元論)의 성리학설을 수립하기도 했다.
→ 영남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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