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대한민국 探訪

공세리 가는 길

鶴山 徐 仁 2006. 11. 15. 10:45

대전에 있는 거래처의 업무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들려 본 공세리 모습
[답사,촬영, 2006. 11. 1일. 촬영기종 루믹스 LC1.(28~90mm) . 한국의산천 ]

열린 귀는 들으리라
한때 무성하던 것이 져버리고 만
텅 빈 들녁에서 끝없이 밀려드는
소리없는 소리를 - 법정 스님-
 

 
 
  ▲ 공세리 성당 노거수 느티나무의 낙엽  ⓒ2006 한국의산천    

떨어지는 낙엽은 가을 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공세리 성당 안에는 인조 9년경 세곡 상,하역 작업를 위해 노역자들의 그늘막으로 심은 나무들이 지금은 아주 큰 고목으로 몇그루 남아있다 
 
 
 ▲ 공세리 들판ⓒ2006 한국의산천     

농부의 들깨 터는 도리깨질하는 모습. 

공세리
공세리는 조선시대에 충청도 일대에서 관곡을 수합하여 서울로 운송해 가던 창고집이 있던 곳이다. 마을 이름도 세금을 바치던 공세 창고가 있는 곳이라는 데에서 온 것이다.
 
 
 ▲ 억새와 농부 ⓒ2006 한국의산천     

한가로운 억새모습과 세월의 연륜이 얼굴에 가득한 농부의 도리깨질 모습 
 
 
 
 
 
 
 
 
 ▲ 공세 곶고지의 흔적 ⓒ2006 한국의산천     
 
 
 

 
 조선조 성종9년(1478)부터 이곳에 세곡해운창을 설치, 운영해오면서 매년 15척의 조운선으로 서해 물결을 따라 삼도의 세곡을 한양으로 운반했다고 역사는 전한다. ⓒ2006 한국의산천     

1895년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드비즈 신부는 이곳에 부임해서 400년이 지난 세곡 창고터를 헐고 그야말로 복음 창고인 성당을 1922년 10월 8일 봉헌함으로써 내포지방의 신앙의 못자리를 틀게 되었다.

그는 지역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자신이 직접 조제한 한방 의술을 활용, 한약을 조제하였으며 '이명래 고약'으로 유명한 이명래(요한)씨에게 이 고약의 비법을 전수하였다. 하지만 이 고약은 처음에는 드비즈 신부의 한국명인 '성일론고약'으로 불렸었다. 
 
 
 ▲ 공세곶고지에 자리한 농협지소 ⓒ2006 한국의산천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곡물을 취급하던 공세곶고지 그자리에 지금도 농협이 자리하고 있다.

 
 ▲ 삼도 해운 판관비 ⓒ2006 한국의산천     
 
 
 
 
 
 
 
 
 ▲ 가을 나무 속에 아늑히 묻혀있는 공세리 성당  ⓒ2006 한국의산천     
 
 
 ▲ 공세리 성당내에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몇그루 있다. ⓒ2006 한국의산천     
 
 
 ▲ 길가에는 가을 낙엽이 ⓒ2006 한국의산천     
 
 
 ▲ 낙엽과 사제관 ⓒ2006 한국의산천     
 
 
 
 
 
 ▲ 성당내에 (구)사제관 옆에는 3인의 순교자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2006 한국의산천     

박의서, 박원서, 박익서, 세 분 순교자는 옛날 걸매리에 살던 밀양 박씨 의암공파의 후손이다. 이 집안에는 이미 치명일기에 기록된 이 세분 순교자 말고도 이마리아, 박인서, 박제환, 박홍갑, 조 모니카, 박화진, 이씨 부인 등 일곱분의 순교자가 더 있다. 그리고 그 주변 마을에서 살던 순교자들이 12명이나 더 있다. 이들의 순교는 천주교 박해라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의 죽음이다.
 
 
 ▲ 고색 창연한 공세리 성당  ⓒ2006 한국의산천     

공세리 성당은 110년 전인 1895년 세워졌다. 지금의 고딕 양식 성당은 프랑스 출신의 드비즈 신부가 1922년 중국인 기술자를 데려와 지었다. 
 
 
 ▲ 고딕건물의 본당. ⓒ2006 한국의산천     

공세리
공세리는 조선시대에 충청도 일대에서 관곡을 수합하여 서울로 운송해 가던 창고집이 있던 곳이다. 마을 이름도 세금을 바치던 공세 창고가 있는 곳이라는 데에서 온 것이다.
공세리는 충청도 일대의 공세 관곡을 수합하여 서울로 운송하던 나루였기 때문에 일찍이 마을이 형성되고 또 번창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걸매리는 물이 앝아져 공세나루가 폐쇄되고 아산만에서 삽교천에 이르는 방조제 공사가 이루어지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옛체의 글씨가 아직도 성당내에 쓰여있다.  ⓒ2006 한국의산천    

몇번이고 이 글씨를 촬영하고 싶었지만 불이 꺼져있어 쉽지가 않았고 미사때는 사람이 많아 촬영이 어려웠다. 
오늘 성당 창문으로 불빛이 보였다. 문을 살짝 열고 들어가니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특별미사인듯..
잠시 성호를 긋고 제일 뒤에서 아주 낮은 자세로 후레쉬없이 살짝 촬영했다.

신부님과 눈이 마주쳤다.. 신부님은 계속해서 강론을 하셨다.
후후후 드뎌 원하던 것을 촬영했다.

 
 ▲ 질곡의 세월을 이겨낸 공세리 성당은 아름답다. ⓒ2006 한국의산천     

봄에는 영산홍이 피고, 여름에는 상사화가 화려하다. 성당 주변에는 수령 300년 이상의 고목만 7그루나 된다. 단풍도 곱고 눈 덮인 겨울 풍광도 곱다. 그래서 영화 감독과 PD들은 공세리 성당을 배경으로 영화와 드라마를 찍었다. 

드라마 ‘모래시계’,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불새’ ‘고스트맘마’ 등에서도 성당이 배경이 됐고 가수 god도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다. 안치환도 성당의 은행나무 아래서 노랫말을 썼다고..... 
 
 
 
 
 
 ▲ 오래된 벽돌 건물로 과거의 사제관으로 사용되었다. ⓒ2006 한국의산천     

과거 사제관이었던 이 건물 옆 성당 앞뜰에는 치명일기(致命日記) 수원 387 박의서와 388 박원서와 389 박익서, 세 분 순교자의 묘가 있다. 

이 분들은 모두 걸매리에서 살다가 병인박해가 일어난 이듬해인 1867년에 체포되어 수원에서 순교한 분들이다. 이 분들의 묘는 본디는 인주면 해암리 맹령(속칭 맹고개)에 있었는데, 1988년 9월 20일 공세리 성당 변갑철 신부의 주관하에 성당 앞뜰로 이장해 왔다. 

 
 
 
 
 ▲ 고딕 양식의 공세리 성당 첨탑 ⓒ2006 한국의산천     

오래된 고목 (市 보호수) 와 성당의 옆 창문은 빛바랜 스테인드 그라스로 장식되어있으며 화려하지 않은 고색창연한 빛이 더욱 세월의 깊이와 역사를 되돌리게 해준다.
 
 
 
 
 
 
 
 
 
 
 
 
 
 
 
 
▲ 고색 창연한 성당의 모습. ⓒ2006 한국의산천     

▼ 아래는 계절 별 공세리성당의 모습.  
 
 
 ▲ 이사진은 2005년 여름에 촬영한 사진입니다.  ⓒ2006 한국의산천     
 
 
 ▲ 이 사진은 2005년 겨울에 촬영한 사진입니다. ⓒ2006 한국의산천     

공세리 성당 가는 길 

공세리성당은 서해안고속도로 송악IC에서 빠진다. 38번국도를 타고 달리다 삽교천 방조제를 넘는다. 방조제를 지나자마자 삼거리(아산방면, 당진방면) 정면 낮은 구릉위에 공세리 성당의 첨탑이 언듯언듯 보인다.

오른쪽으로 ‘공세리’ 이정표를 보고 마을로 들어서면 공세리성당(041-533-8181)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