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軍事 資料 綜合

미스테리에 대한 재해석 [ 끝 ]

鶴山 徐 仁 2006. 8. 24. 16:55

august 의 軍史世界

 

미스테리에 대한 재해석 [ 끝 ]

 

 

 

정답은 없다

 

비록 히틀러가 5 월 24 일부터 3 일간의 진격을 멈춘 것에 대해서 그동안 많은 이야기가 있어왔지만 사실 이에 대한 정답은 없습니다.  물론 이 3 일간의 공백이 연합군의 철수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만큼은 사실이지만, 30 만 명의 대병력이 거의 피해를 입지 않고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었던 결정적 사유 또한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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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육군의 3 일간 공백이 있었으나 던커크의 대탈주를 만든 결정적 사유는 아닙니다 ]

 

다이나모 작전이라 불리던 던커크의 철수는 5 월 26 일 시작 되어 6 월 5 일 종료가 됩니다.  5 월 27 일 독일의 재 진격이 시작되었으니 독일의 공격이 멈추어 연합군이 혜택 (?) 을 보았던 시간은 단지 1 일 이었습니다.  고립된 영-프군은 사실 5 월 24 일 독일의 진격이 멈춘 사실도 몰랐을 만큼 숨 가쁘게 해변으로 후퇴만 하였을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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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합군은 독일의 진격 중지도 모르고 오로지 바다를 향해 도망쳐 왔을 뿐입니다 ]

 

물론 급박한 상황에서 1일이라는 시간은 엄청나게 소중한 시간이지만 30 만명이 탈출하기에 그리 충분한 시간도 아닙니다.  후일 처칠이 회고록에서 " 5만 명 정도 구출해내면 다행 " 이라고 생각했을 만큼 절망적인 상황에서 영국원정군 23 만 명과 프랑스군 8 만 명, 1 만의 장비가 무사히 영국으로 빠져나왔고 " 이것은 기적이라고 밖에 말 할 수 없다 " 고 기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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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칠은 기적이라고 표현하였지만 영국은 이들을 탈출 시킬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그만큼 연합국 또한 너무나 빠른 독일의 진격속도에 놀라 독일군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였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능력을 과소평가 하였던 관계로 이런 결과를 기적으로 썼을 뿐이라 august 는 생각합니다.  안방 같은 영불해협을 배경으로 사투를 벌였던 영국 해군과 필사의 출격을 마다하지 않은 영국 공군의 활약은 독일 육군의 진격과 루프트바페의 공격을 상쇄 할 만큼 영웅적이었던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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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해군의 분투는 영웅적이었습니다 ]

 

후일 30 만의 대병력이 안전하게 철수하도록 방임하였던 결과에 대해 두고두고 통탄하는 목소리가 독일 측에서 나왔다고는 하지만 설령 당시 진격이 멈추지 않았어도 지금까지 설명한 이유로 독일은 고립된 연합군을 절대로 섬멸까지는 하지 못하였을 것 입니다.  august 생각에는 구데리안같은 강경파 (?) 의 주장대로 진격을 멈추지 않고 하였어도 적어도 20 만 정도의 대탈출은 이루어 졌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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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격이 멈추지 않았어도 많은 병력이 탈출은 하였을 것입니다 ]

 

왜냐하면 당시 독일은 그들의 진격에 스스로 놀랐을 만큼 제대로 된 전쟁준비를 마친 상태도 아니었고 외부에서 독일을 바라보았던 영국이나 프랑스 또한 독일의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영-불 연합군은 객관적으로 나타난 전력에서 독일보다 우위에 있었습니다.  다만 작전 능력에서 독일이 상당히 앞섰을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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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적으로 표현되지만 많은 우연과 필연이 겹쳐진 결과 였습니다 ]

 

일부 사료에는 소련과의 일전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히틀러가 영국과의 전략적 동맹관계를 고려하여 진격을 멈춘 것은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것도 정답이라고 생각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진격을 멈춘 후 독일은 영국이나 프랑스에 대해 정치적인 협상을 제안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글의 제일 처음에 썼던 것처럼 히틀러가 자기 입으로 이야기 한 것이 없으므로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결과에 대한 추측만 있을 뿐입니다.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