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세가 마치 한 마리의 노루가 다리를 포개어 앉은 듯한 형상을 한 데서 노루고개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이들은 노루고개가 간직한 슬픈 사연도 들려줬다.
이 고개는 풍수지리학적으로 옛길상의 길지였으나, 일제가 철도를 개설하면서 노루의 목 부분에 해당하는 능선을 잘라 버렸다. 촌로들은 일제가 우리의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한 만행이었다고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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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루고개 초입인 유호리 539 담벼락 한편엔 군수공덕비가 시멘트로 뒤범벅이 된 채 버티고 있다. 옛길의 표석이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노루고개를 넘어선 옛길은 청도천 제방 앞을 지나 조들 한복판으로 이어진다. 들판을 지난 옛길은 국도 25호선과 만나 청도 시가지로 향한다. 약 1㎞쯤 오르면 도로 왼편에 깎아 지른 듯한 거대한 절벽바위가 버티고 있다.
이른바 ‘동바우’이다.
동행한 청도 향토사학가 이영도(63)씨가 이 바위의 유래에 대해 설명했다.“동바우는 옛날에 이 바위 인근에 동바우라는 사람이 저승사자의 눈을 피해 나이가 300살이 넘도록 오래도록 살자 옥황상제가 저승사자들에게 단단히 명을 내려 결국 동바우를 저승으로 데려갔다는 전설을 따서 지었다.”고 했다.
여기서 국도 25호선을 벗어난 옛길은 농로를 지나 새마을운동 발상지인 신도 1리앞 국도 25호선을 횡단한다. 이어 오른쪽 경부선 철로와 왼쪽 국도 사이로 2㎞쯤 가다 철도 건널목을 건너면 바로 옛날 원(院)이 있었던 청도읍 원동에 도착한다. 원은 고려·조선시대에 공적인 업무를 띠고 여행하는 관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국영 여관이다.
이씨는 “원동에는 관청과 민간이 운영하는 제지시설이 성업해 양반계층의 숙박시설인 제생원과 하층민들을 상대하는 주막이 함께 번창했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주민들에게 수소문해 원터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마을에 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철저히 감추려 했다. 기자 일행이 마을 어귀에서 만난 60대 주민에게 원터를 묻자 “모르겠다.”며 연신 얼굴을 돌린 채 발길을 재촉했다.
이는 관원의 등쌀에 눌리고 하층민들을 뒤치다꺼리했던 조상들의 아픈 과거를 숨기고 싶은 심정 때문이라고 이씨가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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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조선시대 청도를 지나는 옛길상의 첫번째 숙박시설이었던 제생원(濟生院) 터는 지금의 교회 자리로 확인됐다.
●원(院)마을 조상의 아픈 상처
원동마을 뒤로 난 ‘장등’이라는 언덕을 타고 수풀 속으로 넘어온 옛길은 다시 철로와 국도 사이로 접어든 뒤 마침내 청도읍 시가지에 도착한다.
길손들의 단골 휴식처였던 고수리 납닥바위를 지나 삼거리 육교 밑에서 경부선 철로와 갈라진 뒤 우체국 등 각종 관공서가 즐비한 청도읍 구도로로 향한다. 주민들은 아직도 이 도로를 ’구도로’라 부른다.
청도군청 앞에서 국도 20호선을 건넌 옛길은 군 농업기술센터 앞을 지나 지석묘 거리로 유명한 화양읍 범곡리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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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조선시대 옛길상의 대구길과 성내(청도읍성)로 갈라지는 분기점이었다. 읍성에 볼 일이 있는 길손들은 좌측 길로 에둘렀지만, 대부분은 대구로 바로 가는 우측 길을 이용했다.
일행은 두 갈래 길을 놓고 고민하다 결국 우측 길을 택했다. 합천리와 눌미리의 중간으로 난 과수원 길을 따라가다 청도천을 건넌 옛길은 어붕미들 경지정리 때 묻혀 흔적이 사라졌다.
청도읍성과 어붕미들을 지나온 옛길은 유등리 유등초교 동쪽에서 합쳐져 학교 뒤편 북쪽의 완산 비탈을 지나 연지(蓮池)까지 내닫는다.
이 못가의 옛길은 좁고 험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주민들은 “과거길의 선비들과 장터를 가던 백성들이 못가로 난 길을 가다 빠져 죽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런 슬픈 사연을 알 리 없는 강태공들이 연지에서 무심히 세월을 낚고 있었다.
청도 8경 중의 하나인 연지(2만 6000평)는 매년 8월이면 만개한 연꽃으로 장관을 이룬다.
●조선의 명물 영남 물고개
연지에서 이서면 장승박이 고개를 넘으면 숙박시설과 장터가 있었던 양원리가 나온다. 양원리는 조선시대 숙박시설인 양원(陽院)이 그대로 지명이 되었다.
특히 이 마을에 있었던 영남 물고개는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양원리 전체를 감싸고 있는 부곡산에서 흘러나온 물이 장승박이 고개를 넘어 연지까지 흘러들어가는 것을 신기하게 여긴 길손들이 이 수로를 ‘영남 물고개’라 이름 붙였다.
토박이 김봉진(86·양원리)씨는 “한국전쟁 당시 서울 피란민들이 영남물고개를 찾아 구경하기에 바빴다.”고 당시를 소개했다.
김씨는 “양원리에 보(湺)를 막아 가둔 물을 수로를 따라 장승박이 고개 너머 연지쪽으로 흘려 보냈기 때문에 마치 물이 역류하는 것처럼 보였다.”면서 “옛날의 수리기술로 보를 막아 물을 흘렸다는 것이 신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수로는 현재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이서면 농산물직판장에서 지방도 911호선과 만난 옛길은 칠곡초교를 못미쳐 신촌리 앞들로 이어진다. 그러나 경지정리로 역시 흔적이 거의 사라지고, 일부만 농로로 남아 있다.
옛길은 팔조리 아래·윗마을을 지나 청도와 대구 경계지점인 팔조령(八助嶺)으로 나 있다. 팔조령이란 유래는 2가지 설로 전해진다. 하나는 산적과 큰 짐승들이 득실거려 8명이 조를 짜서 고개를 넘었다는 설과 길손들이 워낙 벅찬 오르막길의 경사도를 줄이기 위해 8개의 갈지자 굽이로 올랐다는 설이다. 팔조령으로 가는 옛길상의 팔조리 아랫마을에는 수백년 전부터 이 마을의 수호신으로 자리잡아온 성황당이 있다. 팔조령을 넘는 길손들에게 든든한 정신적 지주로 자리했다. 험난하고 산적들이 득실거리는 팔조령을 무사히 넘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던 곳이다.
그러나 팔조리 윗마을을 지난 옛길은 지난 1998년 팔조령 터널 공사로 완전히 끊겼다.
터널을 넘어 다시 이어진 옛길은 팔조령 산장휴게소 옆을 통해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으로 들어선다.
글 사진 청도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동래~한양 오가던 길손의 ‘쉼터’
“납닥바위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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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닥바위는 이정표 구실도 했다.
청도군지에는 ‘납닥바위는 청·일 전쟁 당시 일본군들을 한양길로 안내하는 이정표 역할을 할 정도로 유명했다.’고 적고 있다.
납닥바위는 대구에서 걸어서 반나절, 밀양에서 반나절이 걸리는 곳으로 쉼터와 만남의 장소로 전국적으로 이름 높았다. 청도를 거쳐 가는 대부분의 길손들이 이곳에서 쉰 뒤 헤어질 때 ‘납닥바위에서 또 만나세.’라고 했던 것만 보아도 그 명성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던 영남의 선비들은 반드시 이 바위에서 휴식을 하고 인근의 찬물샘(冷井) 물을 마셨다고 한다. 당시 선비들 사이에는 이 물을 마셔야만 과거에 급제한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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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군은 1999년 6월 청도소재지 중심도로인 역전도로 4차선 확장공사 때 이 납닥바위의 흔적을 찾아 인근에 자연석을 놓고 향토수종을 심는 등 군민의 쉼터로 조성했다.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청도 주민들이 애음(愛飮)했던 냉정의 물도 이젠 더 이상 마시는 사람이 없다. 냉정은 마을 아낙네들의 빨래터로 전락해 버렸다.
토박이 김정치(65·청도읍 고수7리)씨는 “1990년대 들어 냉정의 발원지인 남산 자락 일대가 감나무 등의 과수원으로 바뀌고, 농약이 살포되면서 지하수가 오염돼 식수로는 불가능해 졌다.”고 아쉬워했다.
청도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