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부터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大漢門)이 30여년만에 대대적인 보수에 들어간다. 6월1일부터 연말까지 이때문에
폐쇄되며, 기간중에는 동북쪽의 소방문(서울시의회ㆍ주한 영국대사관 쪽)이 덕수궁의 임시 출입문이 된다.
현재 대한문은 상처투성이다. 전체가 왼쪽으로
10cm 기울고 지붕 기와가 낡아 비가 오면 샌다. 또 오른쪽 하단의 판벽과 중앙 문짝이 한눈에 봐도 눈에 띌 정도로 뒤틀어져 있다.
문화재청은 이와관련 “지금까지 대한문 보수는 기와가 깨지면 갈아주고 단청을 칠해주는 수준의 유지보수를 해왔지만 이제는 상태가
심각해 본격적인 보수를 하는 것”이라며 “완전 해체까지도 고려하고 있다”고 21일 말했다.
대한문은 점심시간에는 도심 휴식처인 덕수궁을 찾는 직장인들로 북적이며, 문앞에서는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들이 사진촬영을 하기 위해 서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덕수궁을 관리하고 있는 궁중유물전시관은 결혼 시즌에는 아예 하루 25쌍으로 예비 부부들의 입장을
제한하기도 한다. 이렇듯 대한문을 통과한 사람만 지난해 126만명이다. 지난 4월에만도 12만명이 대한문을
지나갔다.
▲ 2.대한문 앞에서 펼쳐지는 조선시대 왕궁 수문장
교대식./ 조선일보DB 대한문은 그 자체가 외국인들이 즐겨찾는 관광명소다. 대표적인 것이 서울시가 1996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수문장 교대식이다. 수문장 교대식은 매일 4차례 열리며 지난해에 40여만명이 관람했다. 그 중 외국인이 11만명을 차지한다.
하지만 수문장 교대식은 대한문 보수공사 기간 동안 중단된다. 서울시는 덕수궁과 창덕궁 등 2곳에서 하던 수문장 교대식을 창덕궁으로
일원화할 예정이다.
이렇듯 덕수궁과 대한문은 시민 휴식처ㆍ관광명소로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지만 대한문의 역사는 시민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 대한문으로 이름이 바뀌기전 대안문. 대안문 앞
흰옷입은 인파가 가득한 것으로 보아 명성황후 국장을 애도하는 행사로 추정된다./ 문화재관리청 제공
▲대한문은 덕수궁의 정문이
아니었다
대한문은 원래 덕수궁의 정문이 아닌, 동쪽문이다. 덕수궁 정문은 원래 남쪽에 있던 인화문(仁化門)이었다. 인화문은 주위에 민가가
있어 교통이 불편했다. 반면에 동쪽에 있는 대한문은 1900년대 고종의 근대적 도시개조사업으로 도로가 정비돼 사람들이 주 출입문으로 사용했다.
이후 사실상 정문 기능을 하게 됐고, 오늘날은 흔히 덕수궁의 정문으로 인식되고 있다.
▲ 1968년 덕수궁 돌담이 뒤로 물러나면서 고립된
대한문./ 조선일보DB
▲대한문은 최소 3번 뒤로 옮겨져 1914년 덕수궁과 현 서울시청
사이에 큰 길인 태평로가 만들어지면서 도로 확장에 따라 대한문이 뒤로 밀려났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는 정확치는 않다. 명확한
첫 이전 기록은 1926년에 나온다. 조선총독부는 당시 덕수궁 앞 일부 땅을 매각하면서 대한문을 원래 위치에서 뒤로 옮겼다. 1961년
태평로 도로폭이 6m 확장됐는데 이때 대한문도 6m 뒤로 옮겨졌다. 당시 덕수궁 돌담을 해체하고 철책을 만들었다.
▲ 오늘의 대한문과 1906년 경
대한문(아래)
1968년에는 철책을 돌담으로 복원시키면서 대한문은 그대로 나둔채 돌담 위치를 16m 뒤로 옮겼고 이로인해
대한문은 돌담보다 앞에 튀어나온 모양새가 됐다. 이렇게 대한문이 ‘고립’되자 1년반만인 1970년에 대한문을 돌담 위치로 다시 옮겼다.
이것이 지금의 위치가 됐다.
▲ 덕수궁 대한문 공사로 6월1일부터 임시정문으로 사용될
소방문, 사진 좌측 숲 뒤로 시청청사가 보이고 우측이 영국대사관길이다.
▲원래 대안문(大安門)이었다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 1904년 경운궁 화재이후 1906년 재건되면서 동쪽문인 대안문은 고종의 명에 따라 대한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대한문 현판은 당시의 궁전대신 남정철(南廷哲)이 썼다고 한다. 바뀐 이유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당시
1900년대 시대적 상황을 반영했다는 설(說)이 몇 가지 있다. 그 중 대안문의 ‘안(安)’과 관련된 얘기는, 갓을 쓴 여자의 모양새인
‘安’자를 당시 사람들이 싫어해 ‘漢’자로 바꿨다는 것. 즉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로서 친일파로 유명했던 ‘배정자’라는 여인이 덕수궁을
드나들면서 고종을 현혹해 나라가 망했다고 생각해 대안문의 이름을 바꿨다는 해석이다. 또 고종의 비서승인 풍수의 대가 유시만이
대한문으로 개명을 건의해 고종이 이름을 바꿨다는 설도 있고 일제가 ‘큰 놈(漢)이 사는 문’이란 뜻으로 왜곡해 단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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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 326번지에 위치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8호로 1993년3월20일
지정 1776(영조 52)년 초창, 1905 재건
화정동 추선회관 부근에 위치해 있으며 하동 정씨 사당으로 조선
전기의 문신 정희(鄭熙)와 그 아들, 손자 3대 및 정오도(鄭吾道)·민제장(閔濟章) 등 5분을 모신 사당.
1776년(영조
52년)에 건립하여 1868년(고종 5년)에 훼철된 후 현재의 건물은 1905년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2칸에 한식기와를 얹은 겹처마 맞배지붕 집이다.
막돌을 쌓아 만든 기단 위에 갑석은 화강석을 덮었고
여기에 잘 다듬은 원형 초석을 놓고 원형 기둥을 세웠다.
평주와 우주는 화강석과 목재를 절반으로 하였고, 고주(高柱)에는
덤벙주초를 놓았다.
기둥 위에 창방을 걸치고 주두를 얹어서 결구하였고 창방 위에는 소로를 놓아 굴도리 아래에 있는 장혀를
받치고 있다.
전체적인 포작의 형태는 익공식을 따르고 있다.
내부가구는 5량으로 구성되었고 창호는 분합문의 형태를
하고 있고 아래쪽에 청판이 달린 빗살창으로 되어있다.
정면을 제외한 3면의 벽에는 회벽에 동양화가 그려져 있고 전면에는
단청이 비교적 잘 되어 있다.
대문은 평3문으로 되어 있으며 경내에는 총지재(聰之齋), 열지재(悅之齋)가 있고 화담사
중수비가 세워져 있다.
화담사는 세조 때의 좌익공신으로, 경사(經史)에 능하고 청렴결백한 문신으로 이름이 나 있던
문절공(文節公) 정수충(鄭守忠)의 영정을 모시기 위하여 1735년에 건립된 영당(影堂)이었다. 1776년에 그의 가문인
하동정씨(河東鄭氏) 문중에서 새 사당집을 건립하자는 의견에 따라 1784년에 새 사당이 건립되었고, 여기에 정수충의 위패가 봉안되었다.
그후 1796년 광주향교 유회소(儒會所)의 발의로 화담사에 민제장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민제장은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광주 출신의 무장으로 시호는 충장공(忠壯公)이다.
1809년에는 충청도 유회소의
발의를 받아들여 여기에 정수충의 할아버지이며 정몽주의 제자로 충절을 지킨 묵은공(默隱公) 정희와, 그의 아버지이며 세종 때의 청렴결백한
문신으로 학문·예술·과학기술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던 문경공(文景公) 정초(鄭招)를 함께 배향하였다. 그후 1910년 조상의 예를
갖추어 할아버지인 정희의 위패를 으뜸으로 삼았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졌을 때에도 건물의 지붕만을
가리고 제사만 폐하였다가 1905년 광주향교 유회소의 발의로 복설되었다. 1906년에는 광주 유생들의 발의로 충효가 출중한 광주
출신의 학자 약포공(藥圃公) 정오도를 추가로 배향하여 현재의 틀을 갖추었다.
화담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앞뒤에 마루가
있는 맞배지붕 집이다. 앞면의 마루는 개방되어 제향 의식 때에 편리하게 한 사당 건축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앞부분의 문은
굽널을 둔 빗살문이다. 청지재(聽之齋)와 열호재(悅乎齋)는 동재와 서재로 같은 양식으로 건립된 정면 4칸, 측면 1칸의 건물이다. 평면
구성은 앞에 마루를 두고 모두 온돌방을
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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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화순군(和順郡) 도암면(道巖面) 대초리(大草里) 천불산(千佛山)에 있는 사찰. 운주사(運舟寺)라고도
한다.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운주사와 천불천탑에 대해 <천불산에 있으니 좌우의
산등성이에 있는 석불과 석탑이 각각 1000개씩이다>라고 씌어져 있다.
사람들이 탑을 뜯어다가 상석·주춧돌로 만들어 쓰기도 하고,
아이가 없는 부부가 부처의 코를 떼어다가 가루로 만들어 먹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등의 미신을 믿어 떼어갔기 때문에 석탑과 석불의
수효가 점차 줄어들었다.
도선(道詵)이 한국의 지형을 살펴보니 배가 움직이는 모습을 닮아 그대로 두면 배가 기울 것을
염려해 노의 위치인 이곳에 천불천탑을 하루 동안에 도력으로 만들었다는 전설도 전해온다. 1980년 절 주변이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고, 문화재로는 연화탑(蓮華塔)·굴미륵석불(窟彌勒石佛)·오층석탑·부부와불(夫婦臥佛)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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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제주시 삼도일동(三徒一洞)에 있는 조선 후기의 목조건물. 지정번호 : 보물 제322호 소재지 : 제주
제주시 삼도일동 시대 : 조선 후기 크기 : 정면 5칸, 옆면 4칸 종류 : 목조건물
보물 제322호. 정면
5칸, 옆면 4칸, 단층 팔작(八作)지붕 양식이다. 긴 대석으로 앉힌 기단 위에 세운 정자로 주위 4면이 모두 트여 있다.
기둥 윗몸에는 창방(昌枋)과 그 밑에 인방(引枋)을 짜 돌렸으나 평방(平枋) 없이 주두(柱頭)를 얹어 공포(包)를
배치하고, 정형화된 이익공(二翼工) 형식으로 외목도리(外目道里)를 받쳤다.
기둥과기둥 사이의 창방 위에는 화반(花盤)을
3개씩 배치하여 건물의 옆면과 뒷면에서 보면 장화반(長花盤)의 형태이다.
또 화반 위에서 운공(雲工)이 뻗어나와 외목도리를
받게 하였으며 그 위에 서까래와 부연(附椽)을 걸었고, 서가래의 끝은 모두 처마의 선과 똑같게 잘라져 있는 것이 색다르다.
옥내에는 앞뒤 2줄로 4개의 큰 기둥을 세워 그 위에 대들보를 걸었다.
대들보 위에는 동자기둥[童子柱] 모양의 대공을 세워
종량(宗樑)을 받쳤고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큰 기둥들과 주위 기둥은 퇴량(退樑)으로 연결하였고, 옆면 중앙의 기둥에서
대들보에 걸쳐 충량(衝樑)이 가설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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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의정부시(議政府市) 호원동(虎院洞) 도봉산(道峰山)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 조계종 제 25 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
639년(선덕여왕 8)에 해호(海浩)가 창건했으며, 당시 해호가 머물렀던 동대(東臺)의 옛 산성인
망월성(望月城)의 이름을 따서 망월사라고 부르게 된 고사가 전해진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상층을 법당으로, 하층을 선실로 사용하는
석조전(石造殿)을 중심으로 영산전·칠성각·낙가암·범종루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경기도유형문화재 제 122 호로 지정된
망월사혜거국사부도, 1793년에 건립한 태흘(泰屹)의 천봉탑(天峰塔), 96년에 수관거사(水觀居士)가 명(銘)한
천봉탑비(天峰塔碑)가 있다.
이 외에도 부도(浮屠) 1기와 탑다라니판(塔茶羅尼板) l매, 청장(淸將)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쓴 망월사현판, 영산전 전면에 걸려 있는 주련(柱聯) 4매 등이 있다.
빠르게 돌아가는 서울 생활에 질려
있던 외국인이 우연히 도봉산을 다녀온 뒤, 도심에서 지하철을 타고 도착하여 곧바로 이만한 산을 오를 수 있는
대도시는 아마도 전 세계적으로 찾아볼 수 없을 것이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 외국인의 감탄을 되새기며 망월사로 오르는 두
갈래 길 중 하나인 원도봉 계곡에 들어섰을 때 아쉽게도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였다. 계곡의 물소리는
노래방 기기의 고성에 파묻혀 기를 뺏긴 지 오래였다. 계곡에 발을 담그고, 조용히 세족(洗足)을 즐기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 측은해 보일
정도였다.
노랫소리를 뒤로 하고 한참을 오르자 비로소 그 외국인의 감탄이 새삼 떠올랐다. 도봉산은 울창한 나무와 다양한
모양의 큰 바위들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저 아래 도심에서는 맛볼 수 없는 산행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전문 산악인이 아닌
일반등산객이 오르기에는 딱 적당한 코스다. 산세로 보나 세속과의 거리로 보나 풍수가들에 의해 명당중의 명당이라 불릴 만했다.
천중선원(天中禪院)은 그중 가장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절의 전체 구도가 선원을 중심으로 짜였다는 느낌을 줄
정도였다.
망월사의 선수행 전통이 확고하게 자리잡은 것은 만해 한용운 스님과 함께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인 용성스님에
의해서다. 용성스님은 당시 만연한 계율 파괴를 다잡고, 몰락해 가는 선수행의 전통을 바로 세우기 위해 1925년 이곳 망월사에서
만일참선결사회(萬日參禪結社會)를 추진했다. 스님은 이를 통해 ‘활구 참선을 통한 깨달음’이라는 선불교의 전통을 확고히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출했다. 당시 정한 규칙에는 오후불식(午後不食), 묵언수행(默言修行), 동구불출(洞口不出) 등 뒷날 뛰어난 선승들이 몸소
실천했던 수행방법들이 모두 담겨 있었다. 망월사에서 시작된 이 참선결사의 정신은 이후 성철, 청담, 자운, 향곡, 월산, 혜암, 법전
스님 등이 참여해 한국선불교의 전통을 확고히한 47년 봉암사 결사로 이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용성스님의 이러한
결사정신은 오늘날 천중선원을 찾는 스님들이 지켜야 할 규칙인 ‘망월사 천중선원 청규’에도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 청규는
일상규칙, 방부, 참회, 부칙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총 30여 가지 지켜야 할 세목들이 꼼꼼하게 담겨 있다. 이중에는 ‘정진에 방해되는
통신매체는 일절 금한다’ ‘안거 중에 별 사유 없이 산문을 떠난 자는 그 결제로부터 4년간 방부를 들일 수 없다’는 등의 항목도 들어
있다.
용성스님과 함께 기억해야 할 또 한명의 스님은 만해스님의 유일한 상좌였던 춘성스님이다. 스님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망월사를 홀로 지킨 뒤 중창불사를 일궈냈고, 뒤에 망월사 조실로 주석하며 많은 대중에게 가르침을 주는 등 50여 년을 망월사에서 보냈다.
스님은 거침없는 말과 행동으로 자신의 원초적인 생명 그대로를 보여주어 욕쟁이 스님이자 괴각승으로 불렸지만 그 자신 일흔이 넘어서도
이불을 덮지 않은 것은 물론, 스님들이 편안한 잠자리에 드는 것을 용서치 않을 정도로 무소유와 용맹정진을 강조했다.
이처럼
망월사는 단지 서울 인근의 빼어난 절경 도봉산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한국 선불교의 전통을 확고히하고자 했던 스님들의 서원이 배어 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청정도량으로 그 격을 유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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