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文學산책 마당

날개 또는 수갑 - 윤흥길

鶴山 徐 仁 2006. 7. 16. 00:12
  회람. 조국위 번영과 사(社)의 발전을 외하여 오늘도 불철주야 산업 일선에서 분투 노력하시는 사우 각위. 일취월장하는 우리 동림산업의 기개를 대외에 과시함은 물론 사우간에 일체감을 조성하여 단결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데는 무엇보다 마땅히 제복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비등하여 왔던 바, 회사를 내 몸같이 아끼고 사랑하시는 동림가족 여러분의 충정 어린 권고와 건의를 그간 예의 검토하신 사장님께서는 금번 이를 십분 인정하시어 가칭 사복제정 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사우 여러분께서도 주지하다시피 사복이 그간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생산부에서는 이미 오래 전서부터 직위의 고하를 불문하고 똑같은 제복을 착용하고 실무에 임함으로써 타부서에 비해 현격한 단결력을 발휘하여 생산성 향상에 기여한 바 그 공로가 컸으며 여사원들은 부서에 관계 없이 일찍이 제복으로 통일함으로써 단아한 용모, 밝고 명랑한 분위기로 웃으면서 일하는 직장을 건설해 왔거니와, 이제 제복에서 소외되었던 남직원들까지 사복을 착용하게 되니 이는 누구나 다 함께 경하해 마지않을 일로서 각과 과장을 통해서 사우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와 기탄없는 조언 있으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사장님 명에 의하여, 기획실장 백.

  죽여주는군, 아주 죽여줘.
  자네 제복 입혀달라고 애걸복걸한 적 있나?
  이 사람이 갑자기 돌았나, 내가 미쳤다고 그런 여론을 비등시켜. 그럼 자네는?
  나 역시 아직은 노망 들 정도로 늙진 않았어.
  그렇다면 이상하잖아. 내가 알기로 적어도 우리들 중에선 제복 타령을 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어디서 그런 여론이 나왔다는 거지?
  도대체 어느 놈 대가리에서 그 따위 묘안이 나왔을까?
  보나마나 뻔하지. 사장 아니면 누구겠어.
  아냐, 실장일지도 몰라.
  사장이나 실장이나 그 애비에 그 아들인데 구분할 거 뭐 있어.
  여론이란 건 말야, 원래 대다수 사람들 의견이 똑같은 경우를 가리키는 말 아닐까? 그런데 한두 사람, 그것도 부자지간 머리에서 나온 의견을 여론이라고 떳떳하게 애기할 수 있을까? 그렇게 거짓말해도 법에 안 걸리고 무사할까?
  무사하고말고. 얼마든지 무사할 수 있을 거야. 무사하지 않을 건 거짓말한 쪽이 아니라 거짓말을 거짓말이라고 보는 쪽이겠지. 왜냐하면 힘을 쥔 사람의 말은 소리가 외가닥으로 나와도 여론이 될 수 있고 무력한 대중위 말은 천 가닥 만 가닥이 합쳐져도 여전히 독창으로 취급받기 때문이야. 다수를 빙자한 소수의 여론은 언제나 대중의 솔로를 유린해 온 게 사실이거든. 이를테면 혼인을 빙자한 간음 같은…….
  그나저나 이거 야단인걸. 제복을 입게 되면, 소인은 보시다시피 삼류 회사 말단 사원이로소이다 하고 시내에 광고 돌리는 꼴아닌가. 그 수모를 어떻게 다 견디지?
  한마디로 그나마 있던 우리의 알랴한 사생활은 깡그리 없어지는 거야. 다들 이제부터 죽었다고 복창해 두는 게 좋을걸.
  간판만 안 메었다 뿐이지 샌드위치 맨하고 다를 게 하나도 없어.
  기왕 시작할 바엔 차라리 우리가 자청해서 <빨아도 줄지 않고 다림질이 필요 없는 동림산업 목화표 섬유 제품>이라고 등에다 커다랗게 써붙이고 다니는 게 낫지 않을까?

  느닷없이 회람이 몰고 온 파문은 의외로 심각한 것이어서 관리과 사무실의 오후 나절을 완전히 결딴내 놓았다. 관리과 직원들이 끼리끼리 모여 중구난방으로 쏟아놓은 말들을 도로 주워담아보면 대충 위와 같은 내용이 되겠는데, 물론 그 가운데는 민도식이 씨부려댄 불평도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민도식은 주로 옷이 날개라는 전래의 속담을 들어 그런 종류의 날개를 달고는 세상을 훨훨 날아다닐 수 없음을 누누이 강조하는 편이었다. 그의 말은 사생활이 없어지는 셈이라는 총각 사원 우기환의 주장과 맞바로 통했다.

  「하루 중에서 우리가 시시껍적한 동림산업―아 실례했습니다. 시시껍적이란 말은 취소하겠습니다―좌우단간 일류나 이류는 못 되는 회사의 사원으로 근무하는 시간은 일과중에 한했습니다. 일단 퇴근만 하고 나면 회사 밖에서까지 동림가족―이말은 제가 퍽 좋아하지 않는 말 가운데 하나이긴 합니다만―의 일원으로 행세할 이유가 없었던 겁니다. 바로 이런 점이야말로 동림이 저한테서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요소였습니다. 제가 동림한테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 동림이 저한테서 구원받는 겁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동림을 상징하는 제복을 그대로 걸친 채 퇴근해서 다방에도 가고 술집에도 가고 버스도 타고 택시도 타고 친구도 만나고 애인도 만나야 합니다. 그러면서 일거수일투족에 회사를 의식해야 합니다. 이건 분명히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네한테는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군. 회사 제복을 입은 채로 대로상에서 오줌두 내깔기구 차 속에서 애인 껴안구 키스두 하구 그런다고 시비 거는 사람 있으면 헤딩으루 꽈당  들이받구 하면서 까짓것 어차피 맘에 안 드는 이놈의 회사 만판 욕을 뵐 수 있을 것 아닌가. 그게 싫으면 또 하숙집에 일찌감치 들어가서 발 씻고 드러누워서 돈 굳히는 재미두 맛볼 수 있고……」
  「장 선생님은 단순히 저를 비꼬실 작정으로 문제를 저 개인의 경우에 국한시켜서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작은 것에 눈이 가려서 큰 것을 못 보는 일이 있어선 안 됩니다. 이건 우기환이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고 동림가족―이 말은 제가 퍽 싫어하는 말입니다만―전체의 인격에 지기결되는 중대한 일입니다. 양키아 이들은 군복을 입고 있다가도 일과만 끝났다 하면 영내에서나 영외에서나 사복(私服) 차림을 하고서 장교나 사병이 계급을 의식함이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어울립니다. 그런 반면에 군대 같은 철처한 계급 사회도 아닌 일반인들 세계에까지 사복(社服)이라는 이름의 수갑을 채우고 족쇄를 채워서 인간을 움쭉 못하게 획일화하고 규격화하려는 음험한 계략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 더 개인 생활을 보장하고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사회인지 우리 모두 한번쯤……」

  저러다 책상이라도 꽝 내리치지 않을까 우려될 만큼 우기환은 기세가 등등했다. 그의 말인즉슨 옳았다. 옳은 만큼 그가 동료들로부터 대접을 못 받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무척 건방진 자식으로 평판이 자자했기 때문이었다. 입사한 지 일 년도 못 된 주제에 십 년 가까이나 근속한 선배 사원들보다 더 많은 불평불만을 어느새 입에다 달고 다녔다. 그 불평불만이란 게 고참들 듣기에 아주 맹랑했다. 일류 대학을 나온 자기 같은 엘리트가 일류 회사로 가지 않고 삼류 회사에 들어올 때는 다 그럴 이유가 있고 복안이 있어서였다는 것이다. 체제와 규모가 이미 갖춰진 일류 회사에 들어가서 용꼬리가 되기보다는 초창기의 어수룩한 면을 벗지 못하고 아직도 질서가 물렁물렁한 삼류 회사에 들어와서 단숨에 뱀대가리가 되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들어와서 보니 웬걸, 쓸 만한 자리는 사장의 일가 친척들이 낱낱이 다 꿰차고 앉아서 유고시(有故時)외엔 도무지 비켜줄 기미가 안 보이는 데다가 약속부터가 틀리다는 것이다. 특별히 스카웃되어 들어온 자기 같은 엘리트한테는 애당초 수습 사원이란 당치도 않은 딱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마디로 싹수가 노랗다고 인정해 버린 우기환 군은 기회를 봐서 다른 회사로 뛸 작적으로 지금도 열심히 영어 단어를 외고 있는 것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반드시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 해도 결과적으로 그는 불평불만을 딛고 일어설 채비가 갖춰진 자기만을 오로지 인간다운 인간, 사나이다운 사나이, 엘리트다운 엘리트로 못박음으로써 동림산업 아니면 밥을 굶는 줄 알고 움직일 엄두도 못 내는 다른 고참들을 은근히 능멸해 왔다. 아무데서나 물찌똥처럼 흘리는 거드름 때문에 고참들은 벌써부터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 사원 녀석한테 잔뜩 심사가 뒤틀려 있던 터였다. 왕년에 엘리트 한두 번 아녀 본 놈 누가 있나, 제놈도 이제 처자식 거느리면서 세상 쓴맛 골고루 겪어보라지, 그때도 여전히 뚫린 주둥이로 그놈의 엘리트 소리가 술술 나오나 두고보라지. 그래서 지금은 비록 같은 배에 타고 있긴 하지만 만약 누군가를 덜어내지 않으면 안 될 경우 사람들은 맨 먼저 우기환이부터 바닷물 속에 처넣게 될 거라고 민도식은 생각했다.

  비등점에 도달한 물주전자와 같이 사람들이 한창 푸푸거리는 판에 과장이 들어왔다. 관리과 사람들은 서로 눈짓을 나누는 걸 끝으로 일제히 입을 봉하면서 각자 맡은 일에 돌아갔다. 과장은 사장하고 먼 친척이 되는 사람이었다.

  「에에또, 다들 회람은 봤겠지?」

  과장의 물음에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하던 일을 멈추고 묻는 사람 얼굴만 멀뚱히 쳐다볼 따름이었다. 과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과내에서 어떤 형태의 애기들이 오갔는지 빤히 짐작이 갈 만한 분위기였다.

  「돌려가며 읽어보라는 것이 회람이니까 다들 읽어봤을 테고, 준비위원회를 결성해서 바로 사복을 제정하는 작업에 들어가기로 했네. 에에또, 우리 과에선 장상태 씨를 사원대표 준비위원으로 추천했지. 워낙 해박한 지식에다 심미안까지 갖춘 사람이니까 다른 과대표에 손색이 없게 잘해 낼 줄 믿네. 준비위원의 임무는 회의에 참석해서 무슨 천에 무슨 빛깔, 어떤 형태의 제복을 정할 것인지 과를 대표해서 의견을 제출하는 데 있어.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도 준비위원이 아니래서 강 건너 불 구경하듯 할 일이 아니라 바로 내 일이요 우리 일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장상태 씨나 나를 통해서 수시로 건설적인 의견을 제출해 주기 바라네」
  「단순히 의견만 제출하는 겁니까, 아니면 결정권도 있습니까?」

  과장에 의해 낙하산식 준비위원으로 추천된 장상태가 벼락감투의 무게에 짓눌려 우거지상이 되면서 매우 심각한 소리로 물었다.

  「준비위원회 결정 사항이 그대로 무수정 통과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결정권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야」
  「그렇다면 말입니다, 만약 준비워원회에서 사복을 만들지 말자는 주장이 지배적일 경우는 어떻게 됩니까?」

  그러자 과장이 회전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부대한 몸집의 과장은 두뚱거리는 걸음으로 장상태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왜소한 장을 위에서 덮칠 듯한 기세로 노려보다가 슬그머니 안경을 벗어들었다. 노려보기를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라 더욱더 본격적으로 노려보기 위해서 안경알을 닦으려는 동작이었다.

  「사복을 만들지 말자는 주장? 감히 그런 주장을 할 사람이 누가 있어? 자네가 그럴 생각인가? 사복을 만들지 말자고 다른 과 대표들을 선동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정신 없이 퍼붓는 질문으로 장의 숨통을 바싹 죄어붙인 다음 과장은 몸을 빙그르르 돌려 실내를 주욱 둘러보았다.
  「물론 창업 이래 처음 있는 일인데 반대가 전혀 없을 수 없다는 것쯤 나도 잘 알아. 하지만 한두 사람이 반대한다고 해서 대세를 그르칠 수 없다는 것쯤은 자네들 역시 잘 알아둬야 돼. 창업 십주년 기념일까지는 어쨌든 어떤 형태로든 사복이 완성되어서 자네들 몸뚱이 위에 입혀질 테니까 그리들 알고, 나하고 두번 다시 상종 안할 각오 아니면 내 앞에서 괜히 허튼소리 말라구. 장군, 자네 아직도 뭐 나한테 할 말 있나?」
  「할 말이 있다기보다…… 실은 저어 제가 그런 일에 적임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서 한 번 말씀드려 본 것뿐입니다. 지식으로 보나 심미안으로 보나 저보다는 아무래도 우군이 낫지 않을까 싶은데……」

  모두의 시선이 우기환 쪽으로 쏠렸다. 아까 과장이 자리를 비운 동안에 쏟아놓은 불평불만의 양이나 질로 보자면 이런 기회에 쌍지팡이를 짚고 나서고도 나서고도 남을 우군이었다.

  「전 감투 쓸 자격이 없습니다. 아직도 수습 딱지를 못 벗었으니까요」

  그러자 정작 우군은 사무실 안에 있는 다른 어느 누구보다고 표정이 냉담했다.

  「이게 다 뭣들 하는 수작이야! 감투 쓰고 안 쓰고 엿장수 맘대론가? 동림산업 과장이 뭐 나이롱뽕해서 딴 자린 줄 아나?」

  과장의 호통으로 회람이 몰고 온 제복 소동은 비로소 막설이 되었다. 퇴근 시간이 되기까지 그 문제로 다시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퇴근 후에 민도식은 거의 매일이다시피 어울리는 술친구들과 함께 회사 근처 다방에를 갔다. 회사 밖에서는 통 어울린 적이 없는 우기환이가 눈치 없이 끼어드는 바람에 좌석이 여느 때처럼 살갑지가 못했다.

  「아까 하다 만 애기 계속인데요……」

  다방 구석에 자리를 잡자마자 우기환이 맨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게 근질거리는 입을 과장 앞에선 어떻게 참았지?」

  입이 무겁기로 정평이 난 유명종이가 평소의 그답지 않게 핀잔을 주었다.

  「과에서야 어디 제 말발이 먹히기나 합니까? 사석에서 선배님들 앞에서나 제 생각이 어떻다는 걸 보여드리고……」
  「거 수습 딱지 한 번 편리하게 써먹는군. 과에서 안 먹혀드는 말발 사석이라고 다 먹혀들란 법 있나?」

  장상태의 잇단 핀잔은 우기환의 따귀를 갈기는 거나 진배없는 효과를 좌중에 선사했다.

  「그만들 해둬. 똑같은 처지들끼리 서로 상처를 내서 이로울 사람 아무도 없잖아」

  이렇게 점잖게 타이름으로써 자칫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려는 분위기를 민도식은 가까스로 바로잡았다. 이때 레지가 차를 주문받으로 왔다. 흰 블라우스에 검정 스커트의 유니폼을 걸친 아가씨였다. 아 참, 그렇지. 그제서야 도식은 이 다방 아가씨들이 오래 전서부터 제복을 착용해 왔음을 상기했다.

  「어이 미스 윤, 유니폼을 입고 일할 때하고 그냥 사복 차림으로 일할 때하고 다른 점이 뭘까?」
  「어머, 새삼스럽게 왜 그런 걸 물으세요? 제가 유니폼 입은거 민 선생님은 첨 보셨나요?」

  생각을 엉뚱한 데다 둔 사내들이 대체로 여자 종업원을 상대하는 방식은 먼저 옷으로 시작해서 슬금슬금 화제를 옷 안쪽으로 침투시켜 들어가는 게 정석이다. 미스 윤도 아마 그런 의미로 해석해 버린 모양이었다. 양팔로 찻쟁반 테두리를 둥글게 감싸 허리띠 부근에 댄 모습으로 다리를 꽈배기처럼 꼬면서 미스윤은 단골 손님의 음담을 받아들일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

  「시아버지 같은 사람이 물으면 고분고분 대답이나 해」
  「별루 다른 점 없어요. 유니폼이나 사복이나 속에다 입을 것다 입구 찰 것 다 차구 나서긴 마찬가지니까요」

  옷 애기가 나오기 무섭게 노브라를 비롯해서 노자 돌림만을 생각하는 아가씨한테 도식은 더 이상 물을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여자는 제복과 사복의 차이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전혀 모를 뿐만이 아니라 거기에 아주 무감각한 것이 분명했다. 그런 여자를 데리고 노골적인 음담말고 다른 애기를 나눈다는 것은 한 마디 하면 한 마디만큼 낭비이고 두 마디 하면 두 마디만큼 낭비일 것이었다.

  「같은 점이 겨우 그런 정도라면 설령 다른 점이 있다 해도 거기서 거기겠지」

  장상태가 말했다.

  「미스 윤이 말하는 건 피아노를 전문으로 치는 사람을 염두에둔 애기겠고, 우리같이 점잖은 사람이 보기엔 점잖게 다른 점이 분명히 있을 것 같은데 말야, 그걸 여지껏 느낀 적이 없다면 말이 안 되지」

  우기환일가 우격다짐하다시피 해서 무리하게 짜낸 대답은 점잖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단골들을 더욱 실망시켰다. 옷벌이 시원찮은 아가씨일수록 옷에다 신경 쓰고 돈 들일 필요 없어서 좋고 손님들로 별로 싫어하는 기색이 아니기 때문에 사복보다는 유니폼 쪽이 마음에 든다는 애기였다.

  「참으로 한심한 족속이죠. 더욱 한심한 것은 이 세상엔 한심한 족속들이 의외로 득시글하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미스 윤의 경우만 해도 그렇습니다」

  미스 윤이 가져다준 실망감이 우기환의 장광설을 촉발시켰다.

  「저 아가씨가 여학굘 나왔다면 말입니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제복에 염증을 느낀 적이 아마 한두 번이 아닐 겁니다. 그래서 때때로 언니나 엄마 옷을 훔쳐 입고는 학칙으로 금지된 시간에 금지된 장소에 도둑괭이같이 슬쩍슬쩍 출입하는 것으로 밝각될 경우 정학 처분을 당할지도 모르는 모험을 즐기던 경험이 더러 있을 겁니다. 제복 차림의 여고생들이 품는 가장 큰 소망은 어서 학교를 마치고 사회에 나가서 자기 맘에 드는 옷감으로 맘에 드는 디자인의 외출복을 지어서 맘대로 입고 다니는 거라더군요. 그런데 사회에 나온 지 불과 얼마 되지도 않는 저 미스 윤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걸맞지도 않는 전천후성 제복이 꽃다운 청춘을 마치 소금에 절인 간고등어같이 생기를 잃게 만들고 있잖습니까? 미스 윤은 이미 이 다방의 일개 종업원일 뿐이지 미스 윤은 아닙니다. 미스 윤이면서 동시에 종업원 일 수 있는 방법이 있을 텐데도 미스 윤은 이미 윤이기를 포기 해 버린 상태입니다」

  꼭 누구더러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아서 민도식은 가슴 한구석이 찔끔했다.

  「색깔 다르고 디자인 다른 사복 차림이 각각 그 사람의 개성을 나타내듯이 유니폼은 어떤 조직 집단의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상징물입니다. 어떤 개인한테 어떤 유니폼을 입혀놓으면 그 사람이 자연인으로서 아제까지 누려온 자유와 권리는 제약당하고 속박당하고 그 대신 조직 집단이 부과하는 책임과 의무가 그를 영치기 영차 끌고 가게 됩니다. 평생을 제복만 걸친 채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자기 자신의 삶을 사는 시간보다 조직의 일원으로서 그 조직을 대표하고 그 조직을 위해서 봉사하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은 생활입니다」

  어린 녀석이 정말 누구 들으라고 하는 수작이 분명하지 싶게 우기환이는 도식의 아픈 데를 가려서 잘도 찔러대고 있었다. 우중충한 회색의 제복을 입은 아버지를 보면서 어린 도식이는 다른 애들 아버지처럼 신사복을 입은 모습이 보고 싶어서 지레 늙었다. 형무소가 교도소로 명칭이 바뀐 뒤로도 그놈의 제복만큼은 여전했다. 제복을 걸치고 있을 때의 아버지는 진짜 아버지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직업이 교도관임을 떳떳하게 밝힌 기억이 거의 없다. 철이 들 만큼 들고 나서 교도관과 죄수들 사이에 별다른 차이점이 없으며 실은 다같이 같혀 지내는 자들임을 깨달은 뒤로는 더욱 그랬다. 나이가 들어 은퇴해서 제발 제복을 벗으십사는 아들의 소원이 마침내 이루어지긴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신사복을 걸쳤는데도 아버지 몸에서는 여전히 회색 제복의 냄새가 났다. 우기환의 말마따나 아버지는 아버지 자신이 기를 일찌감치 포기해 버리고는 오직 제복에만 매달리면서 평생을 살아온 셈이었다.

  「이중 생활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애긴 물론 아니죠. 유니폼과 사복을 동시에 지참하고 아니면서 필요에 따라 수시로 갈아입을 수도 있습니다. 조직의 일원으로서 봉사할 때는 유니폼, 조직에서 벗어나 개인이고자 할 때는 사복,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면 몰라도 사시사철 여일하게 이중 생활이 지탱될 수 는 없습니다. 필요에 따라 수시로 갈아입는다는 그 자체가 벌써 너무도 번거로운 절차이기 때문입니다. 번거롭다는 느낌은 곧 타성을 부르게 됩니다. 타성에 젖은 인간은 곧 어느 한쪽 방향으로 쉽사리 기울고 맙니다. 이때 한쪽으로 기운다는 말은 임의의 선택이 아니고 두 극점 사이에서 자력이 센 쪽으로 저오 모르게 끌어당겨진다는 뜻입니다. 유니폼을 입고는 조직 생활과 개인 생활 둘 다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사복일 경우는 개인 생활은 가능해도 조직 생활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개 유니폼 쪽으로 쉽게 기울게 마련인데, 그러다 보면 자연히 조직에 치여서 개인은 쪽을 못 쓰게 되는 법입니다. 조직 사회가 무서운 것은 바로 이와 같은 타성, 인간이 가진 치명적인 약점을 적절히 이용할 줄 안다는 데 있숩니다」
  「저기 앉은 저 친구 말야, 아까부터 좀 수상쩍은걸」
 
  갑자기 유명종이 건너편 좌석을 턱으로 가리키면서 낮게 중얼거렸다.

  「우리 회사 생산부 사람 아냐?」

  장상태가 깜짝 반갑다는 투로, 그러나 역시 소리는 잔뜩 낮추어서 말했다. 가슴에 동림산업 마크가 새겨진 블루진 작업복 상의를 걸친 사내가 혼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생산부 사람이 분명한데, 나이가 상당히 들어 보이고 제법 점잖은 티를 부리는 점이 어딘지 모르게 배운 사람 같아서 간부 사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확 들었다. 이쪽에서 일제히 자기를 의식하고 있는 줄 번연히 눈치챘을 텐데도 사내는 차를 홀짝거리는 틈틈이 엿듣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장담해도 좋아. 우리 애길 아까부터 주의 깊게 듣고 있었어」

  제 말에 인감 도장이라도 찍겠다는 투로 유명종이 보증을 하고 나섰다. 그렇다면 반가울 까닭이 조금도 없는 인물이었다.

  「엿들을 테면 얼마든지 엿들으라지」

  일단 기세가 오른 우기환이 계속해서 큰소리를 뻥뻥 쳐댔지만 엿듣도록 내벼려두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자살 행위와 마찬가지인 줄 잘 아는 고참 사원들로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생산부 사내를 의식하기 시작한 후로는 분위기가 분위기가 자연 시멘트 바닥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서둘러 유니폼 제정에 끝까지 반대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한 다음 준비위원회에 자가서 장상태가 벌일 활약에 크게 기대를 걸면서 그의 무운을 비는 것을 끝 순서로 자리를 파해 버렸다. 어찌 보면 그들은 꼭 취해 있는 사람들 같았다. 그렇다, 그들은 비록 생산부 사내를 충분히 의실할 만큼 정신이 맨숭맨숭한 상태이긴 했으나 자신들의 결의를 끝까지 밀고 나갈 경우 어떤 결과가 오리란 걸 전혀 고려에 넣지 않을 정도로 그들 자신이 쏟아놓은 허다한 말과 말들에 잔뜩 도취되어 있었다.

  동료들과 헤어져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걷는 동안 민도식은 바삐 인도를 오가는 행인들 가운데 의외로 유니폼이 많이 섞여 있음을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전혀 그런 내색을 안 보이던 거리가 갑자기 안면을 바꾸어 오늘부터는 유니폼으로 범람하기 시작하는 듯한 착각에 빠질 지경이었다. 처음부터 제복으로 출발했으니까 거리 곳곳에서 눈에 띄는 군인과 경찰은 그만두고라고, 각급 학교의 학생들은 그만두고라도, 자율 교통 지도원과 모범 운전 기사들은 그만두고라도, 빌딩이나 호텔 입구의 수위 아저씨들은 그만두고라도, 새마을복에 새마을모의 공무원들과 오물 수거원들은 그만두고라도, 어서 옵쇼 하면서 허리를 경오지게 꺾어 난짝길을 막는 각종 접객업소의 보이 녀석들이나 남녀 종업원들은 그만두고라도, 갖가지 음료와 화장품 외판원들이나 떼뭉쳐 재재거리고 군것질을 하면서 길을 가는 요지가지 제복 차림의 여행원이나 여사무원들은 다 그만두고라도…… 유명한 재벌 기업체나 한다 하는 대기업체의 사원임을 과시하는 회사 고유의 제복을 차려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남자들도 상당수 눈에 띄었다. 동림산업의 오만한(吳萬漢) 사장이 궁극의 라이벌로 지목하고 있는 유명한 섬유류 생산 및 수출업체인 K직물의 밤색 상의를 입은 젊은이도 한 사람 우연히 만날 수 있었다. 민도식이 특히 놀랍게 느낀 점은 대학생이나 재수생쯤으로 보이는 젊은이들 세계에도 벌써 깊숙이 침투해 들어간 흔적이 역연한 제복의 위력이었다. 학도호국단 애기가 아니라, 일상의 외출복 가운데도 똑같은 천과 무늬에 똑같은 마름질로 제복이나 다름없이 지어진 옷들을 입고 보무도 당당히 거리를 행진하는 젊은 남녀들의 모습을 가리킴이었다. 개중에는 해괴하게도 미군 작업복 흉재가 확실한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지 < U. S. ARMY >라는 자수 흉찰을 달고 등과 어깨엔 위장 그물과 계급장서껀까지 완벽하게 구색을 갖춘 아가씨도 서넛 보였다. 바야흐로 제복 지향의 빳빳한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알리는 나팔 신호를 민도식은 귀가 멍멍하도록 듣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 역시 제복 차림의 안내양으로부터 빨리 오르라고 등을 떼밀리고 빨리 내리라고 등을 떼밀린 끝에 가까스로 집에까지 당도할 수 있었다.

  「밖에서 무슨 언짢은 일이라두 있었수?」

  남편의 옷을 벗겨 붙박이장 안에 걸면서 아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좋은 일도 없는 판에 언짢은 일이 있을 턱이 있나」

  아무렇게나 대꾸하면서 도식은 마구 엉겨붙는 두 아이의 재롱과 응석을 양쪽 무릎에 각각 나누어 수용했다. 새끼들 얼굴을 들여다보는 동안에 삼대(三代)라는 말이 구체적인 형상을 갖추고 육박해 오는 순간을 몸으로 느꼈다. 제복으로 평생을 보낸 아버지가 있다. 아들도 제복을 입게 될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의 손자들 대에까지 제복이 영향을 미칠 확률은 점점 높아진다는 애기가 될까. 과연 저것들 세대는 제복이 없는 세상을 살 수 있을까.

  「정말 무슨 일이 있었구려」

  그 속에서 뭘 기어코 찾아내려는 듯이 애들의 눈동자를 후벼보는 남편의 예사롭지 않은 태도에 놀라 아내는 금방 세번째 아이가 되었다. 선참의 두 아이를 밀어내면서 세번째 아이가 무릎 앞으로 바싹 다가들었다.

  「말해 봐요, 어떤 일인지」
  「어떤 일이긴……」
하고 귀찮다는 내색을 보이려다가 그는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다.

  「만약에 말이지, 내가 회사 제복을 입고 매일 출퇴근하게 된다면 당신 기분은 어떨까?」
  「겨우 제복 애기예요? 난 또……」

  애기를 듣고 나자 아내는 재빨리 도로 어른이 되었다. 그러고는 아직도 정색한 채로인 남편이 무색해질 만큼 깔깔대는 것이었다.

  「오만하시고 인색하신 사장님께서 드디어 단안을 내리셨군요. 그것 참 잘된 일이에요. 우선 의복비 덜 나가서 좋고 출근 때마다 당신 옷에 신경 안 써서 좋고……」

  그렇게 되고야 말리라고 미리 예측하고 있었다는 뜻을 은연중에 풍기면서 아내는 다시 깔깔거렸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들음들음으로 아내는 사장이란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 아내가 그렇게 웃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애를 둘씩이나 가진 멀쩡한 가정 주부가 남편 덕분에 급조 여사원이 되어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처녀 행세를 톡톡이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미 아내는 장시간 인연이 끊겼던 제복과 새삼스레 다시 만나는 기회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창업 십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거사적으로 법석을 떨어대고 있지만 동림산업의 전신인 구멍가게 시절까지 합산한다면 오만한 사장의 기업 경영은 사실상 십 년도 훨씬 더 되는 셈이었다. 구식 직조기와 봉제시설 약간이 가내 수공업 단계를 못 벗던 시절 오 사장의 자산의 전부였다는 애기가 오늘날 전설처럼 돌고 있다. 속규모로 면제품을 생산해서 가족들에게 등짐을 나눠 지워 어수룩한 시골을 돌며 보세 가공품 빼돌린 거라고 속여 팔았다 한다. 보세 가공이란 말이 퍽 낯설게 느껴지던 시절에 벌써 그 방면에 남보다 일찍 눈을 떠 암수(暗數)기반을 잡았던 모양이었다. 그 후 정식으로 동림산업이 발족되어 이번엔 암수가 아니라 진짜로 보세 가공에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가족 중심의 경영 방침은 구멍가게 시절이나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그때보다 더 심하다는 중평이었다. 사장은 막대한 광고비를 들여 신문이나 방송에 자사 제품을 소개하고 선전하는 행위를 무척 싫어했으며 경멸까지 했다. 상품명 선전은 효과가 단명한 데 비해 회사 자체의 이미지 부각은 그 수명이 영원하다는 주장과 함께 이를 위해 돈 대신 머리를 썼다. 신문이나 방송의 손이 닿을만한 곳에 항상 자그만 미담이나 가화(佳話) 따위를 쥐덫처럼 은밀히 감춰두곤 했다. 글줄깨나 쓸 만한 남녀 사원들을 시켜 신문의 독자 투고란이나 아마추어 수필을 통해 간접 화법으로 회사 이름이 사회에 알려지도록 했으며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각종 캠페인, 국민개창 운동 등에 전사원을 적극 참여시키는 한편 주로 주부들을 대상으로 한 퀴즈 프로, 부부 게임 등에 사원은 물론 사원 가족까지 동원시켜 남편의 직장을 소개하는 동안 아내로 하여금 내내 행복에 겨운 미소를 잃지 않도록 당부했다.

  민도식의 아내가 출연했던 프로는 전국 직장 대항 아마추어 음악 경연대회였다. 학교 시절에 성악을 전공한 실력을 아는 극성맞은 남편 친구들의 추천으로 하루아침에 총무과 타이피스트가 된 도식의 아내는 비싼 값에 임시로 전세 내어 온 전문가 수준의 다른 한 여자와 함께 여러 차례 텔레비전에 주전 멤버로 출연해서 발군의 실력을 과시함으로써 동림산업을 연말 결선에까지 끌어올리는 데 수훈을 세웠고, 비록 준우승에 그치긴 했지만 남편의 직장을 전국의 시청자들에게 깊이 인식시킴과 아울러 남편을 위해서도 내조의 공을 아끼지 않았다.

  「아내들이란 남편 회사 사장보다는 아무래도 자기 남편을 더 속속들이 알도록 구조가 돼 있어요. 꼭 무보수 사원으로 제복을 입고 뛰어본 경력이 있대서 하는 애긴 아니지만 전 당신네 사장이란 사람이 어떤 인물인가를 잘 알아요. 하지만 그 이상으로 당신을 훨씬 더 잘 알아요. 지금의 당신 심종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아요. 하지만, 하지만 말예요. 대세는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어요? 모난 돌이 정 맞는대요. 둥글둥글 맞춰 살기 바래요. 제복을 상전으로 받들어 모시느냐, 아니면 그저 몸을 가리는 여러 가지 의복 가운데서 사람이 입을 수 있는 한 가지로 보느냐에 따라 정신 상태가 중요한 것이지 제복 자체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봐요」

  알쏭달쏭한 말을 진지하게 하는 품이 딴엔 한참 위로하려는 속셈 같았다. 무심코 깔깔거리던 경망스러움은 그래서 많이 탕감이 되었다. 제복을 두고 느끼는 남편의 콤플렉스를 아내는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도식은 회사에서 묻혀 가지고 들어온 제복 냄새를 집안에까지 풍긴 자신의 실수를 어느덧 후회하고 있었다.

  준비위원회가 열렸다.

  그리고 준비위원회가 끝났다. 회의에 참석했다 돌아온 장상태의 표현을 빌리자면, 열리면서 끝났다는 것이다. 준비위원회에서 통과된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사복은 춘하와 추동 2종으로 구분하되 공히 상의에 한한다. 춘하복은 추후 결정키로 하고 우선 추동복만을 제정한다. 추동복은 본사 제조의 검정곤색 순모 복지를 기지로 하여 사파리를 신사복에 가깝게 변형 개조한 특이한 복식을 취하되 회사 심벌마크와 회사명을 좌측 포켓 위에 황색 자수로 부착한다. 착용 대상은 직위의 고하를 막론한 전 사원이며 일제 맞춤에 한하여 경비의 반액을 회사가 부담하고 이후부터는 각자가 전담한다. 추동복은 빠른 시일 내에 회사가 지정하는 양복점에서 지정된 일자에 출장 나와 재도록 하여 창업 기념일의 일제 착요에 차질이 없도록 피차간에 긴밀히 협조한다…….

  「사원들을 대표해서 준비위원들이 한 역할은 뭐지?」

  「그렇게 추궁조로 나올 일만은 아냐. 아마 명종이 자네가 참석했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거야」
  「내가 참석하는 걸 가정하는 경우하고 자네가 실제로 참석한 경우를 같은 차원에다 두고 결과를 논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야. 준비위원들을 통해서 사원들 의견을 알아본 다음 그걸 취합해서 원칙을 정한다는 약속이었어. 그런데 건의할 틈도 안 주고 비상을 걸듯이 위원회를 소집해서 일방적으로 전격 통과시키다니, 말이 다르잖아!」
  「맞습니다, 저두 애초에 그렇게 들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니미럴. 내가 기획실장이야? 내가 사장이야? 낸들 어떡허란말야. 왜들 나보고만 지랄들이지?」
  「지랄은 자네가 하고 있어. 자네더러 동림산업 사원 전체의 의사를 대변해 달라고는 안했어. 최소한 우리 과의 의사만이라도 전달했어야만 될 게 아닌가. 통과가 되고 안 되고는 문제가 아냐. 책임을 맡았으면 적어도 그 책임을 이행하려는 자세만이라도 보여주는 게 도리라고 생각해」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똑똑히 잘 들어달라면서 기획실장이 자기네가 작성한 초안을 낭독했어. 낭독을 끝내더니 잘들 들었냐고 물어. 잘 들었다고 끄덕거릴 수밖에. 그랬더니 질문 있으면 하라는 거야. 모두들 어안이 벙벙해서 앉아 있는 판인데 실장이 씨익 웃어. 그러면서 하는 말이, 질문이 없다는 건 원안에 전적으로 찬성하는 것으로 믿고 수정 없이 실행에 옮기겠다고, 회사발전을 위한 중요 사업에 이처럼 만장일치로 협조해 줘서 고맙다고 이러는 거야. 용가리 통뼈라도손가락 하나 까딱 못할 상황이었다니까」
  「장 선배님 말에 좀 어폐가 있는 것 같습니다. 회의는 랑데부가 아닙니다. 특히 노사간의 회의는 회의라는 형식을 빌린 전쟁입니다. 사용자측에서 수단 방법을 다해서 계획을 밀고 나가려하는 건 당연합니다. 필요하다면 피용자측에서 용가리 통뼈 아니라 통뼈 할아버지라도 돼서 따질 건 따지고 반대할 건……」
  「그러게 내 첨부터 뭐랬어. 난 그런 일에 적임이 아니니까 우군이 맡으라고 했잖아!」
  「이미 끝난 일이야. 지금 와서 아무리 떠들어대 봤자 제복은 벌써 우리 몸에 절반쯤이나 입혀저 있어」

  민도식이 나서서 험악해진 분위기를 간신히 가라앉혔다.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회의를 소집한 건 처음부터 요힉 행위에 지나지 않았던 거야. 경영자 독단으로 처리하지 않고 사원들의 의사를 물어서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가지고 결정했다는 인상을 대내외에 풍길 필요가 있었던 거야. 이제 길은 두 가지뿐야. 나며지 절반을 찾아서 마저 몸에 꿰든가, 아니면 기왕 우리 몸에 입혀진 절반을 아예 벗어버리든가 각자가 알아서 결정 할 일이야. 저기 좀 보라고. 저 사람이 아까부터 우릴 비웃고 있어. 제복 애기 앞으로는 그만하기로 하지」

  생산부 공원 복장을 한 사내가 엇비뚜름한 자세로 이쪽을 돌아다보며 야릇한 웃음을 입가에 물고 있었다. 그를 보더니 장상태가 화를 벌켝 내면서 큰소리로 미스 윤을 불렀다.

  「이봐, 저기 앉은 저 사람 내가 좀 보잔다구 전해!」

  눈이 휘둥그레진 미스 윤이 종종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가기 전에 그쪽에서 자진해서 먼저 일어섰다. 그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장의 목소리가 컸던 것이다.

  「저를 부르셨습니까?」

  여전히 웃음기를 입에 문 얼굴이 장을 정면으로 상대했다.

  「당신 뭐야? 뭔데 어제부터 남의 애길 엿듣고 비웃지, 비웃길?」
  「비웃음으로 보셨다면 용서하십쇼. 엿듣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들릴 정도로 선생님들 말소리가 컸습니다. 말씀 내용이 동림산업에 계신 분들 같아서 저도 모르게 관심이 컸나 봅니다」
  「오오라, 그러고 보니 당신도 동림가족의 일원이 분명하군. 부서가 어디야?」
  「생산부 제일공장입니다. 거기서 잡역부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이름은?」
  「권입니다」
  「이름이 권이다? 그럼 성까지 아주 짝을 채워보게」
  「성이 권입니다」

  만만한 상대를 만난 장은 권씨를 노리갯감으로 삼아 화풀이할 작정임을 본명히 하면서 동료들에게 은밀히 눈짓을 보냇다. 함께 놀이에 끼어들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도식이 보기엔 첫눈에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참을성 좋게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것은 생산부 공원들이 본사의 사무직을 대할 때 일반적으로 갖는 비굴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적대감도 아닌 그것은 일종의 자신감의 표현임이 분명했다. 두툼한 입술과 커다란 눈이 얼핏 눈에 띄는 특징이었다. 장상태하고 비교해서 둘이 서로 어금어금할 정도로 작은 체구였다. 실제 나이는 장보다 두세 살쯤 위일 것 같은데 적어도 이삼십 년은 더 세상을 살아냈을 법한 관록 같은 게 엿보이는 얼굴이었고, 그것이 교양이라는 것하고도 연결되어 잡역부라던 자기 소개가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짝을 채우기 싫다 이거지? 좋았어. 그런데 자네가 하는 잡역 일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서 우리 애기에 이틀 동안이나 관심을 갖지?」
  「물론 상관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쪽에선 작업중에 팔이 뭉텅 잘려져 나간 사람이 있고 그 팔값을 찾아주려고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다른 한쪽에선 몸에 걸치는 옷 때문에 거기에 자기 인생을 걸려는 분들도 계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순간 장상태의 얼굴색이 하얗게 질리는 것 같았다. 장이 어물거리는 사이에 우기환이 나섰다. 우 역시 장처럼 권씨의 나이를 전혀 셈해 주지 않는 말투였다.
  「팔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옷도 중요해. 옷을 지키려는건 다시 말해서 팔을 찾으려는 거나 마찬가지 일이야. 팔이 옷에 우선한다 생각하고 우릴 비웃었다면 당신은 분명히 덜떨어진 사람이야」
  「그래서 다방에 앉아서 투쟁을 하신다 이런 말씀이지?」
  우의 응원에 힘입어 전열을 가다듬고 난 장이 입꼬리를 비틀면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 바로 그겁니다. 옷도 중요하고 팔도 중요하다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팔을 찾으려는 사람이라고 함부로 대하는 자세만큼은 삼가해 주셨으면 합니다. 선생님들한테 팔이 있듯이 옷은 우리들도 필요하니까요. 이제 또 들어가 봐야죠. 사장님이 면담을 받아주시질 않아서 이렇게 매일같이 허탕을 치고 있는 중입니다」

  팔과 옷을 한참 주고받던 권씨가 장과 우를 향해 차례로 목례를 보낸 다음 핑하니 다방을 나가버렸다.

  「잡역부 주제에 건방 떨긴!」

  뱉듯이 말하면서 장이 우를 쳐다보았다. 그 말에 대꾸하지 않은 채 우가 도식을 상대로 자문을 구했다.

  「밀어붙일 모양인데 앞으로 어떻게 하죠?」
  「이미 끝난 일이라고 했잖아. 각자가 알아서 행동할 뿐이야」

  아닌게아니라 회사에서는 창업 기념일을 며칠 앞두고 예정된 모든 프로그램을 한몫에 밀어붙일 기세였다.

  그 이튿날, 부(部)대항 체육대회다 뭐다 해서 창업 이래 최대규모의 기념 행사 준비로 가뜩이나 어수선한 판인데 줄자를 든 양복점 재단사들이 떼로 들이닥쳐 각 사무실을 도는 바람에 업무는 사실상 중단 상태였다. 이인일조가 된 재단사들이 하나가  재면서 치수를 부르면 그걸 다른 하나가 받아서 적고, 그들 앞에서 겉옷을 벗은 채 셔츠 바람이 된 동료들이 바보처럼 발을 벌리고 가슴을 맡기고 뒤로 돌아를 하면서 등을 대주는 모양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민도식은 제 차례가 오기 전에 슬그머니 사무실을 빠져나와 버렸다.

  「민 선배님, 같이 가십시다」

  어느새 뒤따라 나왔는지 현관 수위실 옆을 지나는 도식을 우기환이가 불러 세웠다. 그들은 함께 다방으로 들어갔다.

  「어제 여기서 생산부 사람한테 한 애기…… 실제로 그럴까?」
  「무슨 애긴데요?」
  「원 민 선배님두, 아니 그만한 신념도 없으면서 사무실을 뛰쳐나왔습니까?」
  「권씨란 사람을 만나기 전까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왔어. 그런데 그 사람 애길 듣고 난 후로는 어딘지 모르게 흔들리는 기분이 든단 말야. 결국 이렇게 흔들리는 상태에서는 아무 일이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이즈를 안 재고 나와버린 거야」
  「우리하고 생산부하고 하는 일이 다르기 때문에 방식만 다를 뿐이지 실은 팔과 옷은 똑같다고 믿어요. 우리한테 옷인 것이 그들한테는 팔이고 우리한테 팔인 것이 그들한테 옷이 되잖을까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을 거야. 다분히 허세가 섞인 것이 우리들 옷이고 허세 없이 그저 절실하기만 한 것이 권씨의 팔인지도 몰라」
  「자유와 생존은 다같이 중요하다는 제 신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야 물론 그렇지. 내 애긴 우리가 제복을 입음으로써 제약당하는 개인의 사생활을 저들이 팔을 잃음으로써 위협받는 생계만큼 그렇게 절박하게 느끼고 있느냐는, 일테면 치열도의 차이라는 거야」

  그들이 이런 애기를 나누고 있을 때 동림산업 민 선생을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거기 있을 줄 알았지. 나야, 장이야. 우기환이도 같이 있나?」

  전화를 받자마자 장상태가 낮고 빠른 말씨로 지껄여 왔다.

  「즉각 들어와 줘야겠어. 과장이 잔뜩 뿔따구가 나갖구 방금 사장실로 들어갔어」
  「재단사들은 다 철수했나?」
  「아직 다른 사무실을 돌고 있어. 그 친구들이 철수하기 전에 자네가 들어와야 일이 무사해질 것 같애」
  「지금은 들어가고 싶잖아. 친구가 찾아와서 잠깐 외출을했다고 그래」
  「재는 거야 상관없잖아. 입고 안 입는 건 그 후의 일인데 뭘 그래」
  민도식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한참 만에 민 선생을 찾는 전화가 다시 왔다.
  「과자일세. 자네들이 지금 취하고 있는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부르는지 알고나 그러나?」
  수화기에서 대뜸 불호령이 떨어졌다.
  「자네들이 이번 일에 비협조적이란 걸 알고 있어. 뒷전으로 돌면서 불평이나 터뜨리고 다니는 걸 내가 모를 줄 아나?」

  과장은 계속해서 닦아세웠다.

  「이 전화 끝나자마자 사장실로 가봐! 나하곤 이미 용무가 끝났어!」

  사장은 전혀 화가 난 얼굴이 아니었다. 조심스럽게 들어와서 맞은편 소파에 앉는 두 사원을 응접 세트 너머로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들이 의복에 관해서 일가견을 가졌다는 소문인데, 어디 그 견해 점 듣세나」

  참으로 난감한 청이었다. 듣자는 말은 듣지 않겠다는 강인한 의지의 반어적 표현임을 잘 알기 때문에 그들 두 사람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 못했다.

  「나대로 충분히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고 사원 대표의 지짖를 얻어서 새행하는 일이야. 그런데 그런 일을 반대할 때는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가 있었겠지. 민군부터 이유를 설명해 보게」

  그러면서 사장은 담배를 권했다. 청자였다. 민도식은 그것이 청자임을 확인하는 순간 하마터면 제 주머니 속에 든 거북선을 꺼낼 뻔했다가 문득 깨닫는 바가 있어서 사장이 주는 대로 다소곳이 받아들었다.

  「서두를 거 없어, 천천히 애기해도 괜찮으니까」

  민도식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미 이렇게 된 마당에 망설거릴 것도 없었다.

  「옷에는 보호 기능과 표현 기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가 옷에서 바랄 수 있는 것 그 두가지 기능만으로 충분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제복으로 사원들간에 일체감을 조성해서 회사를 더욱도 발전시키겠다고 그거시지만 제 생각엔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단결력보다는 제복에 눌려서 개성이 위축되고 단결력에 밀려서 자유로운 창의력이 퇴보되는 데서 오는 손실이 더 클 것같습니다」
  「아주 좋은 말을 했어. 하지만 그건 일이 실천에 옮겨지기 전에 했어야 할 애기야. 대다수 사원들 지지를 얻어서 실천 단계에 들어선 지금은 사정이 달라. 그리고 기업 발전에 단결력이 중요하냐 창의력이 중요하냐 하는 문제는 자네가 아니라 내가 결정할 문제야. 또 제복을 입었다고 어제는 있던 창의력이 오늘 싹 죽는다는 논리도 설득력이 없어. 민군, 자네는 일찍이 제복제도를 도입한 K직물이 창의력 없이 그저 눈감땡감으로 오늘날의 위치에 올라섰다고 생각하나?」
  「K직물은 사정이 다릅니다」

  잠자코 있던 우기환이가 불쑥 말했다.

  「호오, 그래? 어떻게 다르지?」
  「자기 개성에 맞는 옷을 입을 권리를 포기할 때는 뭔가 그 이상의 보상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K직물의 기업 정신은 아주 훌륭하다고 봅니다」

  이때 옆방이 다소 소란해졌다. 사장실 도어 저쪽에서 여비서가 누군가하고 들어가겠다느니 안 된다느니 하면서 실랑이하는 눈치였다. 그 소리를 듣더니 사장의 낯빛이 싹 달라졌다.

  「자네들이 이러지 않아도 난 지금 복잡한 일이 많은 사람이야. 우군이 K직물을 동경하는 그 심정은 나도 알아. 허지만 앞으로 가까운 장래에 다른 사람들이 자네들을 동경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나도 노력하고 자네들도 적극 협조해야 되잖나. 그동안을 못 참아서 협조할 수 없다면 별수 없지. 이런 일엔 누군가 한 사람쯤 희생이 따른다는 사실을 각오해야 돼」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제가 희생이 되죠. 피고용자한테도 권리는 있습니다. 들어올 때는 제 맘대로 못 들어오지만 나갈때는 제 맘대로 나갈 수 있으니까요」
  우기환이가 분연히 소파에서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도어를 향해 갔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사장실을 나서는 우기환이와 엇갈려 웬 사내가 잽싸게 뛰어들었다. 다방에서 두 번 본 적이 있는 생산부의 잡역부 권씨였다. 사장실로 들어서기 무섭게 권씨는 민도식을 향해 눈자위를 하얗게 부릅떠 보였다. 우기환의 돌연한 행동에 초벌 놀랐던 도식은 권씨의 험악한 표정에 재벌 놀라면서 엉거주춤 궁둥이를 들었다. 빨리 자리를 비켜달라는 권씨의 무언의 협박이 빗발치고 있었다.
  「죄송해요, 사장님. 한사코 안 된다는데두 부득부득 우기면서 이 사람이……」 

  뒤쫓아 들어온 여비서를 손짓으로 내보낸 다음 사장이 말했다.

  「어서 오게, 권군」

  자기보다 더 사정이 절박한 사람을 위해서 민도식은 사장실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 잘 생각해서 스스로 결정을 내리도록 하게」

  도어가 채 닫히기 전에 사장의 껄껄한 목소리가 도식의 등뒤에 따라붙는다.

  「장 선생 집에 전화 걸었더니 부인이 받데요. 새로 맞춘 유니폼 입구 아침 일찍 출근했다구요」

  아내의 바가지 긁는 소리로 창업기념일의 아침은 시작되었다. 체육대회가 열리는 제1공장까지 가자면 다른 날보다 더 일찍 나서야 되는데도 여전히 밍기적거리고만 있는 남편 곁에서 아내는 시종 근심스런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제복 때문에 총각 사원 하나가 사표를 던졌다는 소문을 아내는 믿지 않았다. 사표를 제출한 게 아니라 강제로 모가지가 잘린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까짓것 난 필요 없어. 거기 아니면 밥 빌어먹을 데 없는 줄 알아? 세상엔 아직도 유니폼 안 입는 회사가 수두룩하단 말야!」

  거듭되는 재촉에 이렇게 큰소리로 대거리는 했지만 결국 민도식은 뒤늦게나마 집을 나서고 말았다.

  시내를 멀리 벗어나서 교외에 널찍하게 자리잡은 제1공장 앞에 당도했을 때는 벌써 개회식이 시작된 뒤였다. 공장 정문 철책 너머로 검정곤색 일색의 운동장을 넘어다보는 순간 민도식은 갑자기 숨이 턱 막혀옴을 느꼈다. 새로 맞춘 제복으로 단장한 남녀 전사원이 각 부서별로 군대처럼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서서 연단에 선 지위자의 손끝을 우러러보려 사가(社歌)를 제창하기 직전의 예비 운동으로 목청을 가다듬는 헛기침들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공장 일대를 한바탕 들었다 놓은 우렁찬 노래가 터지기 시작했다. 노래 부르는 사원들 모두가 작당해서 지각한 사람을 야유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검정곤색의 제복들이 일치 단결해 가지고 사복 차림으로 꽁무니에 따라붙으려는 유일한 사람을 완강히 거부하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세상 전체가 온통 제복 투성이인 가운데 저 혼자만 외돌토리로 떨어져 있는 셈이었다. 자기 한 사람쯤 불참한다 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체육대회 개회식은 진생될 수 있다는 사실이 민도식을 무척 화나면서도 그지없이 외롭게 만들었다. 정문으로 들어서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뒤돌아서서 나오지도 못한 채 그는 일단 멈춘 자리에 붙박혀 버린 듯 언제까지 움직일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