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리! 왜 자네 사회주의문학 안 하나!
- 정지용.
'무슨 일에서 건 지고는 못 견디는 한국문인 중의 가장 큰 욕심꾸러기'라고 미당 서정주 시인은 소설가 김동리의
비문에 썼다. 그렇다. 동리 만한 욕심꾸러기를 나는 본 일이 없다.
대하소설로도 다 쓰지 못할 동리의 크고 넓은 생애를 이렇게
짧게 담아 낼 수 있는 이는 오직 미당뿐이겠거니와 더 짧게 줄인다면,'욕심꾸러기'와 '기묘하게는 아름다운 무지개'로 남게
된다.
1970년대 초 내가 편집일을 맡고 있던 동화출판사에서 일본 동수사(冬樹社)와 공동으로 한국문학전집 5권을 일본어로 번역
출판하기 위해 편집위원회를 열었었다.
그 자리에서 미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에에. 나는 노벨상을 탈까 하는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동리가 받았다. "노벨상이라면 나도 생각이 있지…." 이 두 분의 느닷없는 노벨상 다툼에 함께 있던 김소운. 백철. 황순원.
이어령 등은 두 분의 얼굴만 번갈아볼 뿐이었다.
동리와 미당 두 쌍벽(雙璧)의 문학 욕심을 읽을 수 있는 장면을 나는 보았던
것인데, 특히 동리의 문학 욕심은 순수문학에 대한 투철한 문학관과 함께 한국문학의 오늘을 있게 한 버팀목이 되었던 것이다.
3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백로'가 입선, 35년 조선 중앙일보에 소설 '화랑의 후예'가 당선, 다시 36년 동아일보에 소설 '산화'가 당선되어
화려하게 등단한 동리는 태평양전쟁을 전후하여 일제의 강압과 회유에 동시대의 문인들이 훼절을 하는 험난한 고비에서도 붓을 꺾고 도피 행각으로
자신을 지켜냈었다.
해방이 되자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로 뭉쳐 일제하 카프를 형성했던 임화 등 좌익문학의 기수들과 홍명희. 이태준.
이기영. 한설야. 오장환. 이용악 등 문단의 대표적 시인. 작가들이 거의 '조선문학가동맹'의 깃발 아래로 합류할 때에도 신인이나 다름 없는
동리는 박종화. 유치환. 서정주. 조지훈. 곽종원.조 연현.최 태응. 이광래 등과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고 회장으로 취임, 우익문학의
대열을 정비한다.
특히 좌파의 문학이론은 카프로부터 무장해온 맹장들이 포진하고 있는 데다 시대적 설득력마저 얻고 있어 이론적 투쟁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동리는 좌파 논객인 김동석(金東錫)등과 당당하게 맞서 나갔다.
"자본주의적 기구의 결함과 유물 변증법적
세계관의 획일주의적 공식성을 함께 지양하여 새로운, 보다 더 고차원적 제3세계관을 지향하는 것이 현대문학 정신의 세계사적 본령이며 이것을 가장
정계적(正系的)으로 실천하려는 것이 시방 필자가 말하는 소위 순수문학 혹은 본격문학이라 일컫는 것이다."
이렇게 동리가 내세운
논리는 오늘에 와서도 적중하는 것이고 동리는 그 논리를 꺾이지 않고 일관되게 펼쳐왔었다. 그 좌.우 문학논쟁이 불꽃을 튀기던 46년 경향신문의
창간을 앞두고 주간으로 취임한 정지용 시인은 편집국장을 물색하던 중 소설가 횡보 염상섭에게 다리를 놓아달라고 동리에게 부탁한다.
동리는 횡보의 대답을 얻어냈고 정지용은 그 고마움을 갚을 양으로 동리 집에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한다. "다른 반찬은 필요 없고
그저 된장찌개면 되네." 정지용은 쇠고기 한 근을 사들고 동리댁에 가서 저녁상을 받고 술상을 받아도 쇠고기는 그림자도 안
보였다.
"내가 쇠고기 한칼 사왔었는데…." 혼자 중얼거리자 그제서야 동리가 생각이 난 듯 "여보 정선생이 고기 사오셨잖소"하고
아내를 불러 세웠다. 부인은 "제가요, 한번도 쇠고기로 반찬을 만들어 본 적이 없어서요"하고 고개를 떨군다.
그날 밤 "참으로
적빈여세(赤貧如洗 : 가난하기가 마치 물로 씻은 듯하여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음)로구나"라며 정지용은 술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동리! 왜
자네 사회주의 문학 안 하나?" 라고 소리쳤다.
순수문학의 고집쟁이 동리와 지용이 남긴 아이러니의 한 장면이다.
이근배(시인·한국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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