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文學산책 마당

[문학동네에 살고 지고…] 4. 서라벌의 金東里

鶴山 徐 仁 2006. 7. 10. 11:44
신라 망한 뒤의 폐도(廢都)에 떠오른
기묘하게는 아름다운 무지개여
- 서정주

금빛 날개를 치는 우리 옛 문화예술의 자랑거리가 어디 한 둘일까마는 그 중에서도 저 신라의 고도(古都)서라벌의 천년 영화로움의 장엄에 비할 바는 따로 없다. 그 이름을 따서 서라벌예술대학이 문을 연 것은 1953년이었고 더불어 문예창작과라는 낯선 학과가 생겨났다.

전쟁 통에 서울 유학은 꿈도 못꾸고 충청도 당진 산골에서 꼬박 고등학교까지 마치고(사실은 고1 때 서울로 튀어 올라왔다가 쫓겨 내려갔지만)어떻게든 넓은 바다로 나가서 헤엄을 쳐보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는 내게 '장학생 모집'이라는 광고가 잡혔다. 그것도 문예창작과가 있는 서라벌예술대학이었다.

학과시험은 없고 내신성적과 창작실기만으로 전형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방 사범대학을 가라는 할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장학생이 되겠다는 구실로 지망을 했다. 소나 논밭을 팔아야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던 시대였으니 장학생으로 대학을 갈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을 잡는 일이었다.

서울 미아리고개 너머 산을 깎은 언덕에 새로 들어선 캠퍼스에는 문예창작과 말고도 음악.미술.무용.연극.영화 등 예술가를 지망하는 전국의 천재(?)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누가 누구인지를 알지는 못하지만 서로 자신만만한 눈빛으로 실기고사장에서 어떤 주제가 나올까 긴장하고 있었다.

이윽고 키가 작달막하고 다부진 얼굴의 교수가 들어와서 칠판에 '아버지의 얼굴'이라고 쓰는 것이었다. 산문은 '아버지의 얼굴'이고 시는 자유제라고 했다. 그 분이 김동리(金東里)선생이었다. 나는 소설지망생이었는데 산문보다는 시에 더 자신이 있었던지 시를 써냈고 을류 장학생으로 뽑혔다.

갑류는 등록금 전액 면제로 한두 명뿐이었고 을류는 여러명이었을 것이다. 함께 응시했던 한 학생은 장학생에 낙방해 다음해 서울대 철학과에 합격했으니 응시자들의 면면과 경쟁이 치열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내가 을류 장학생이 된 것은 하느님의 동아밧줄을 잡은 것이었고 그 밧줄은 나를 샛길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고 오늘토록 글쓰기에 묶어매 옴쭉달싹 못하게 하고 있다.

서라벌예대의 교수진으로는 당대 최고의 소설가 김동리, 시인 서정주를 비롯해 안수길. 박목월. 곽종원. 이광래. 정태용. 김구용. 양원달 등 어느 명문대학보다도 앞서 있었다.

입학을 하고 보니 신춘문예 당선. 입선자가 3명이나 있었고 학원문학상 우수작. 전국백일장 장원 등 전국 고교문단의 스타들이 총집결해 있었다. 김민부. 천승세 .박경용은 신춘문예 관록파였고 송상옥. 서영수. 오재철. 이재령. 권영근 등은 이미 스타가 되어 있었다.

학과장인 김동리교수는 창작실기와 문학 전반의 해박한 이론으로 강의실의 안과 밖에서 제자들을 키워냈고 그 결과 우리 반에서만 소설에 천승세. 송상옥. 유현종. 김문수. 김주영. 백도기. 오찬식. 이재백 등이 쏟아져나왔고 시. 평론. 희곡. 아동문학 등 각 분야에서 40명을 헤아리는 문학 인재들을 배출하는 대기록을 세운 것이다.

동리선생은 서라벌 캠퍼스에서만이 아니라 해방 이후 우리 문학동네의 촌장으로 한국문학의 한 시대를 번쩍 들어올린 거인이었다. 동리선생은 1995년 6월 16일 세상을 뜨셨고 문학 생애에 맞수이던 미당 서정주선생은 1주기를 맞아 세운 산소의 비문을 이렇게 썼다.

'무슨 일에서건 지고는 못 견디는 한국문인 중의 가장 큰 욕심꾸러기, 어여쁜 것 앞에서는 매양 몸살을 앓던 탐미파 중의 탐미파, 신라 망한 뒤의 폐도에 떠오른 기묘하게도 아름다운 무지개여'.

이근배(시인·한국시인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