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文學산책 마당

[문학동네에 살고 지고…] 2. '휴전선'의 시인 박봉우

鶴山 徐 仁 2006. 7. 10. 11:40
 
꼭 한번은 천둥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휴전선'중

새해 첫날 문학동네에는 여러 신문사들이 쏘아올리는 신춘문예의 불꽃잔치가 하늘을 수 놓는다.

문단 등단의 길은 문예지의 추천과 신춘문예의 두 갈래가 있는데 추천제도는 대개 소설은 2회, 시는 3회를 거쳐야 하는 긴 여로가 기다리고 있기도 했거니와 그나마 등단의 문이 열려 있는 문예지는 '현대문학''자유문학'정도여서 뚫기가 힘들었다.

때문에 높은 상금과 큰 신문에서 대문짝만하게 작품도 싣고 얼굴도 내어주는 신춘문예가 이 땅의 문학지망생에게는 최고의 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해방 공간의 혼란과 6.25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끊겨있던 신춘문예가 부활한 것은 1956년이었다. 우리 문학을 신인에 의해 한 단계씩 높여왔던 신춘문예의 부활을 기다리는 뜨거운 시선들 앞에 조선일보가 터뜨린 시 당선작은 추봉령(秋鳳嶺)의 '휴전선'이었다.

"언제 한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같이 징그러운 바람이여,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살이를 또 한번 겪으라는가. 아무런 죄도 없이 피어날 꽃은 시방 자리에서 얼마를 더 살아야 하는가. 아름다운 길은 이 길뿐인가."

전문을 다 인용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거니와 그 때만 해도 신춘문예는 1월 1일자 신문에 발표되어야 비로소 당선자도 알게 되는 때라 필명 추봉령은 전남 광주의 정치학도인 박봉우(朴鳳宇)였다.

그는 하루 아침에 기린아가 되어 서울에 올라왔고, 광주고의 후배인 서울대 국문과의 박철.임보씨, 그리고 나와 서라벌 문예창작과의 한반이었으며 지금 역사학자로 활동이 왕성한 이이화씨 등과 동인을 하던 우리는 명동에서 박봉우와 자주 만나며 신춘문예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세기사적 비극인 동족상잔의 참화와 그로 인해 산하를 갈라놓은 휴전선 1백55마일을 모국어로 소스라치게 노래한 '휴전선'의 시인 박봉우는 4.19혁명이 일어나자 다시 한번 '4월의 화요일'을 시로 승화시킨다. 가장 절박한 민족사의 중심에서 치열한 모국어의 불꽃을 피우던 박봉우는 어찌된 셈인지 현실생활에서는 그 기백을 발휘하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열심히 시를 쓰고 잡문을 썼지만 그것으로는 생활의 뒷받침이 되지 못했던 것이고 직장도 뜻대로 안되던 때였다.

신춘문예 당선 시인들끼리만 하는 '신춘시'동인지를 같이하면서 다방.술집에서 자주 어울리는 편이었는데 평소에는 말이 없다가도 술만 마시면 웬 용기가 하늘을 치받던지 술집에 앉아 있다가도 갑자기 명동파출소로 달려가서 오줌을 눈다든지 통행금지가 지나서 광화문 네 거리를 건너다 "누구냐!"고 경찰이 부르면 "나 박봉우시인이다"하고 큰 소리 치든지도 했다.

그러나 한없이 여린 성격이 현실과의 괴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점차 정신적으로 쇠약해져서 가까운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몸도 마음도 지친 그는 친구의 도움으로 전주에서 요양하다가 56세의 나이로 분단의 아픔, 광주의 아픔을 안은 채 잠든 화산이 되었다. 나라와 겨레 생각이 얼마나 깊었으면 아들 이름은 '겨레', 두 딸은 '하나'와 '나라'로 지었을까!

통일이 되는 날 다시 한번 '천둥같은 화산'으로 터지는 시를 저 하늘에서 쓰겠지.

이근배(시인·한국시인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