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文學산책 마당

[문학동네에 살고 지고…] 1. 화두집 '청동문학'

鶴山 徐 仁 2006. 7. 10. 11:39
어둠을 불평하기 보다는
차라리 한 자루의 촛불을 켜라-펄벅

꽃자리는 정해진 곳이 아니었다. 청동다방은 공초 오상순을 만나러 오는 문인들이나 사회인사들, 그리고 문학청소년과 소녀들을 앉히기에는 비좁아서 공초는 길 건너 서라벌다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소설 '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읽혔고 193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펄벅 여사가 서울에 왔을 때 서라벌다방으로 공초를 만나러 온것은 1960년 11월 4일이었다.

공초보다 두 살 위인 펄벅은 공초가 담배를 좋아한다는 소문을 들었는지 '사슴'담배 두 갑을 내놓고는 "어둠을 불평하기 보다는 차라리 한 자루의 촛불을 켜라"는 화두를 악필의 영문으로 써놓고 갔다.

공초의 둘레엔 불빛을 찾아드는 날것들인 양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와서는 '한 마디 하고'가는 것이 의무이기도 했다. '청동문학'은 삶의 길목에서 문득 생각나는 대로 내뱉는 '한 마디'를 적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그냥 사인 북으로 부르기보다는 나는 '화두집(話頭集)'으로 이름 짓고 싶은 것이다.

1백10권까지는 '청동문학'으로 하다 1백11권부터 '청동산맥'으로 바뀌었는데 마지막 1백95권까지 쌓인 화두는 높은 산과 겨룰 만한 것이었다. 거기에서 얼핏 눈에 뛰는 몇몇의 사리(舍利)들을 내뵈어 본다.

생화(生花)속에 노는 공초
자네 것이 되었구나
청산의 범 나비
네 멋대로 날아라

-월탄 박종화


서라벌 옛 성터에
청동의 새 탑을 깎는
석공이 있어
공(空)을 부정하며
공을 긍정하며
공을 초월하며
공을 잉태하며(하략)

-일석 이희승

오고 싶지 않은 곳으로 온 공초여
가고 싶은 곳도 없는 공초여
그러길래 공초는 오지 않았고
가지도 않을 것이다

-노산 이은상

안녕하시었는가 백인의 번뇌
내 고향의 그리운 벗들

-미당 서정주

공에 젓가락이 있고
무에 약주술이 넘친다

-김동리


지금 이 책을 받아 들었습니다
이 책의 종잇장을 쓸어 봅니다
공초선생의 살갗이 쓸려 집니다
우리의 살갗입니다.

-황순원


어찌 다 헤아리랴, 이름 있는 사람들과 이름을 감춘 사람들과 이름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공초와 주고받은 선문답들을. 구상. 서정주 같은 분들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공초를 따로 대접하거나 자주 집으로 모셔갔다. 대통령선거에도 나섰던 국회의원 김준현은 전매청에서 국회의원이나 장관들만 피우라고 따로 만들었던, 금빛으로 무궁화가 찍힌 담배를 들고 왔다.

공초는 내게 오아시스를 뜻하는 사천(沙泉)이라는 호를 주셨지만 실은 공초가 계신 곳이 우리들 오갈 곳 없는 명동의 떠돌이에게는 꽃도 새도 물도 있는 오아시스였다. 나는 따뜻한 차 한잔 국밥 한 그릇 제대로 못해드렸는데 어느 때는 내 옆자리에 와서 슬그머니 몇 백원을 손에 쥐어 주시기도 했다.

시 '방랑의 마음'에서 '흐름 위에 보금 자리친 나의 혼'을 노래한 시인 공초는 가진 것 아무 것 없이도 늘 넉넉하게 명동의 한 복판에서 영혼의 밝은 촛불을 밝히고 계셨던 것이다.
 

이근배(시인·한국시인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