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낮고, 느리게 살기 - 김용택 (시인, 시노래모임 '나팔꽃' 회장) |
우리들은 분명
문명의 혜택 속에서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지만 그 문명이 얼마나 야만의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보려 하지 않는다. 느린 평화와 조촐한
행복, 끝없는 자유와 아름다운 창조, 따스한 사랑과 한없는 존경, 적막한 기다림과 오랜 그리움 같은 사람의 덕목들은 이제 자취를 감춰버린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모두 크고, 빠르고, 거대하고 화려한 것들을 찾아 바쁘게 헤맨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마법의 손의 조종에 홀린 것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이 무엇인가를 찾으며 쫓아다닌다. 이것인가 싶으면 이게 아니고, 저것인가 싶으면 저게 아니다.
모두 바쁘게 흘러다니므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루어져야 할 진정한 소통은 막혀 있다. 노래를 잃어버린 것이다. 어떨 때는 내가 왜 여기 이
자리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우린 분명 무엇인가 중요한 것들을 빼먹고 허둥지둥 살고 있다.
이 바쁜 때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흘끗거릴지 모르겠지만 우린 좀 천천히 세상과 나를 들여다보며 가고 싶다. 아니 살고 싶다. 무엇이 그리 바쁜가. 어디를, 어디로
왜 그리 부산하게들 달려가는가. 저기 있는 산도 좀 보자. 저기 가는 저 노인의 발걸음이라도 좀 가만히 앉아 바라보고, 저기 서 있는 나뭇가지에
수도 없이 피어나 작은 바람결에 흔들리는 이파리라도 좀 한가하게 앉아 바라보자. 마른 땅에 떨어지는 한 줄기 빗방울, 허공을 흘러오는 작은
눈송이들, 한적한 공터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 저 들 끝에 묻어오는 소낙비, 저물어 어두운 골목길 흐린 불빛 속에서 새어나오는
아내와 남편의 한가한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우리들은 미미하고 보잘것없는 것들을 챙기고 싶다.
좀 천천히 가고 싶다.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애착을 보이고 싶다. 사람들이 모여들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우린 이 번잡하고 빠르고
거대한 세상에 한 그루의 느티나무 같은 한가한 그늘을 만들고 싶다. 사람들이 거기 와서 지친 몸들을 쉬게 하고 싶다. 수도 없이 많은 느티나무
이파리를 바라보며, 내가 사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닌데, 이러면 안 되는데, 그래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하며 세상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곳이
되게 하고도 싶다. 작고 느리고 따사로운 것들이 세상을 천천히 오래오래 적시는 외로움을 사람들에게 주고 싶다.
인간들의
끝없는 욕망이 불러오는 오만과 독선으로 인간이 살아가야 할 세상은 병들어 죽어간다. 이것은 역설적이게도 인간과 자연에게 반문명적이다. 크고,
거대하고, 화려한 것들은 재빠르게 지나간다. 그리고 순식간에 또 다른 얼굴을 하고 겁나게 달려온다. 작고, 낮고, 느린 것들은 이 세상에
사소하고 힘이 없는 것 같지만 인간들의 맨살에 천천히 가 닿고 깊숙이 스민다. 우린 그렇게 시대착오적이고 싶은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