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대한민국 探訪

순천 낙양읍성

鶴山 徐 仁 2006. 7. 4. 08:17
▲ 순천 낙안읍성 초가집과 담쟁이 모습
ⓒ2005 서종규
물론 그 시절, 박정희 정권의 요란한 새마을 운동으로 어머니의 초가지붕은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었지요. 지금은 군데군데 구멍난 지붕에 꺼먼 이끼만 잔뜩 뒤덮여 있지만요. 그래서 더욱 마음의 고향엔 노란 초가지붕이 차곡차곡 쌓여만 가는가 봐요.

초가지붕만 변한 것 아니었다구요. 구들장도 변하였어요. 구들장 위에 연탄 보일러 배관이 덧입혀 졌지요. 다시 그 위에 기름 보일러 배관이 놓았지요. 그랬던 것을, 부모님이 도시로 이사가버린 시골집은 빈집으로 남겨 지고, 한 두 달에 한 번씩 들러보는 어머니의 손길이 그리워 보일러마저 고장이 나 버렸어요.

▲ 순천 낙안읍성 민가의 모습
ⓒ2005 서종규
▲ 낙안읍성의 성곽과 마을 전경
ⓒ2005 서종규
도시의 하루가 더 삭막해지는 요즈음, 나이가 들면서 시골집과 지붕, 그리고 구들장이 그리워지는 것은 우리 모두의 고향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찾아가고 싶어도 썰렁한 방바닥의 냉기가 잡풀들이 너부러져 있는 지붕의 썩은 잡풀들 마냥 손사래를 쳐대지 않겠어요.

지난 11일, 광주경신중학교 학부모독서회의 문학기행에 동참했어요. 광주에서 오전 9시에 출발하여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순천 선암사를 답사하고, 순천 낙안읍성을 찾아갔답니다. 목적지를 순천 낙악읍성을 잡은 것은 초가집 탐방이라는 테마 기행으로 잡았기 때문이었습니다.

▲ 순천 낙안읍성 돌담길
ⓒ2005 서종규
▲ 순천 낙안읍성 성곽의 모습
ⓒ2005 서종규
순천 낙안읍은 원래 마한의 옛터로 시작하여 백제 때 파지성으로, 조선 태조 때 낙안군이 되면서 왜구를 토벌하기 위하여 토성을 쌓았고, 조선 인조 때 석성으로 다시 쌓아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데, 성안에 관아 9동과 많은 초가집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어서 남도의 유명한 민속마을이 되었다네요.

순천 낙악읍성의 특징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대부분의 초가집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지요. 지금 낙안읍성에는 총 85세대 약 230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네요.

▲ 쑥을 널고 있는 여인의 모습
ⓒ2005 서종규
▲ 빨랫줄에 옷을 널고 있는 여인의 모습, 누워있는 누렁이
ⓒ2005 서종규
행여 여러 민속촌을 다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전시용으로 지어 놓은 초가집들이 즐비하지 않던가요? 그리고 안동 하회마을은 전통 한옥 기와집으로 되어 있는데요, 민속마을이 된 낙안읍성 초가집 한 채 한 채에 지금도 사람들이 실제로 살고 있다는 것이 더욱 정겹지 않은가요?

관아와 민가를 나누는 가운데 큰길을 중심으로 식당이나 상점들이 있고, 각종 전통 민속 체험의 집들이 놓여 있는데, 외곽으로 조금 나가면 그야말로 서로 어깨를 가지런히 비비대고 있는 초가집들이 정겨웠답니다. 구불구불한 골목의 돌담들에 담쟁이 넝쿨이 팔랑대고 있었지요.

▲ 돌담에 숨어서 살짝 내려다 보고 있는 광주 경신중학교 학부모 독서회원들
ⓒ2005 서종규
어떤 집은 빨래가 가지런히 널려 있는 집도 있었고, 어떤 집 텃밭에서 일하고 있는 아주머니의 모습도 보였고, 자전거가 보관되어 있는 마당, 누렁개가 늘어져 있는 개집, 아궁이에 지필 장작더미, 그러면서도 가지런한 돌담과 대나무로 엮어서 만든 대문들, 이제는 쓰지 않고 처마 밑에 매달아 놓은 멍석, 가끔은 마당에 놓여져 있는 승용차까지, 사람의 냄새가 가득한 초가집이었어요.

차마 일하고 있는 아주머니께 말을 붙이지 못했답니다. 그냥 그리워하고만 말았지요. 우리 어머니의 초가집이 머릿속을 맴돌고만 있었지요. 초가지붕 아래, 뜨끈뜨끈한 아랫목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앉아서 반나마 타버린 군고구마라도 먹고 있었던 우리 어머니의 초가집이 조금은 되살아 난 것 같았어요.

▲ 여행객들의 민속 체험의 모습(다듬이질)
ⓒ2005 서종규
초가집 문에는 간혹 민박 몇 호라는 조그마한 간판이 붙어 있었는데, 초가집에서 하룻밤을 지새울 수 있는 서비스까지 제공하는 것을 보고 많은 미련이 남았답니다. 한 일주일 정도 장작불에 이글거리는 아랫목에 앉았다가 장작도 패보고, 마당도 쓸어보고, 나가서 도자기 체험이나 황톳물들이기 체험, 다듬이나 동네 가운데 커다란 은행나무의 금줄까지 모두 체험하고 싶었다니까요.

성곽을 따라 한 바퀴 돌면서 내려다보는 초가지붕들의 정겨운 모습에서 완전히 어린시절 우리 마을을 보는 것 같았어요. 잘 정비된 성곽엔 동문, 서문, 남문 3개의 출입문이 있고, 성내에는 낙민루, 낙풍루, 쌍청루, 빙허루 등 4개의 누각과 동헌이나 객사, 임경업 장군의 비각도 잘 보전되어 있었어요.

▲ 아궁이에서 활활 타오르기를 기다리는 장작 더미, 그 옆에 있는 자전거
ⓒ2005 서종규
지난 5월 8일 어버이날, 부모님께서 살고 계시는 아파트에 찾아갔습니다. 이야기 도중에 시골에 비어 있는 집을 수리하여 다시 구들장을 놓고 불을 지필 수 있게 하면 어떻겠느냐는 말씀을 넌지시 하였지요. 당장은 반대하시는 어머니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답니다. 저의 지나가는 말 한마디가 그렇게 좋으셨던 우리 어머니의 집이 옛날에는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필 수 있는 초가집이었다는 거 아니겠어요.

자료 : http://blog.naver.com/kuksd/20013575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