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집 - 문태준
빈집 1
흙더버기 빗길 떠나간 당신의 자리 같았습니다. 둘 데 없는
내 마음이 헌 신발들처럼 남아 바람도 들이고 비도 맞았습니
다. 다시 지필 수 없을까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으면 방고래
무너져내려 피지 못하는 불씨들
종이로 바른 창 위로 바람이 손가락을 세워 구멍을 냅니다
우리가 한때 부리로 지푸라기를 물어다 지은 그 기억의 집
장대바람에 허물어집니다 하지만 오랜 후에 당신이 돌아와
서 나란히 앉아 있는 장독들을 보신다면, 그 안에 고여 곰팡
이 슨 내 기기다림을 보신다면 그래, 그래 닳고 닳은 싸리비를
들고 험한 마당 후련하게 쓸어줄 일입니다.
빈집 2
지붕위로 기어오르는 넝쿨을 심고 녹이 슨 호미는 닦아서
걸어두겠습니다. 육십촉 알전구일랑 바꾸어 끼우고 부질없
을망정 불을 기다리렵니다. 흙손으로 무너진 곳 때워보겠습
니다 고리 빠진 문도 고쳐보겠습니다
옹이 같았던 사랑은 날 좋은 대패로 밀고 문지방에 백반을
놓아 뱀 넘나들지 않게 또 깨끗한 달력 그 방 가득 걸어도 좋
겠습니다
빈집 3
이 방은 이물스럽다 저녁이 이울고
구석서부터 물오르는 소리들의 구근
장판 걷혀진 구들장으로 불기둥이
훅 지나간다 흔적은 얼마나 관능적인가
까마귀가 내려앉은 부적 위를 지나,
퉁퉁한 거미 문설주 저켠으로 금줄을 친다
처마 밑 망태까지 차올라
밤새 둥근 알을 낳는 닭의 難産
낡고 해져 이 집 흙담처럼 기울어도
검은 가죽나무에 터잡은 마음 다잡으면
빈집은 화려하다 소리들의 구근을 씹을수록
아, 떠나간 자의 이 파한만장함.
첫사랑 - 문태준
눈매가 하얀 초승달을 닮았던 사람
내 광대뼈가 불거져 볼 수 없네
이지러지는 우물 속의 사람
불에 구운 돌처럼
보기만 해도 홧홧해지던 사람
그러나, 내 마음이 수초밭에
방개처럼 갇혀 이를 수 없네
마늘종처럼 깡마른 내가슴에
까만 제비의 노랫소리만 왕진 올 뿐
뒤란으로 돌아앉은 장독대처럼
내 사랑 쓸쓸한 빈 독에서 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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