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문제를 다루는 6자회담이 위조지폐 공방에 막혀 2월 개최마저 어려워진 상황인데도 전향적으로 해석될 만한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입북 거부 상태이던 윤만준 현대아산 사장의 방북이 이뤄지고 장성급군사회담을 20개월여만에 재개하기로 남북이 합의한 것을 그 예로 꼽을 수 있다.
여기에 일본과의 수교협상을 3년3개월 만에 가진 것도 두드러진 움직임이다.
더욱이 이런 조치나 합의가 시기적으로 지난 달 10∼18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중국 방문을 전후해 나타나고 있다는 점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대목이다.
이 때문에 우리 정부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정책 변화에 대한 의지를 반영한 것인지 여부를 놓고 북한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하지만 이들 조치가 같은 방향성을 갖고 치밀한 계산에 따라 나온 것인 지 여부는 불투명한 만큼 아직은 그 배경을 뭐라고 딱 짚어내기는 어려운 상태다.
실제 북한이 이들 현안을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으로 판단했기에 성사됐을 것이라는 관측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런 관측에 더해 북한이 처한 안팎의 상황까지 감안할 때, 대외적 정세 와 경제적인 사정이 복합적으로 연결되면서 나온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우선 정치적으로 보면 마카오 소재 은행인 방코델타아시아(BDA)의 대북 금융거래 중단과 위폐 문제를 놓고 야기된 북미간 대치상황으로 인해 북한이 미국 이외의, 또는 6자회담 밖의 출로를 모색하도록 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가능하다.
이런 관측대로라면 김 위원장의 방중과 지난 4∼8일 북일 수교협상, 대남관계 진전 노력 등이 위폐 문제에 따른 수세에서 벗어나려는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상황 악화를 막기 위한 관리 노력이 외교로 나타난 셈이다.
실제 김 위원장의 베이징(北京)을 찾아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을 갖고 중국 수뇌부들과 면담한 것도 위폐나 BDA 문제에 따른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게 주된 목적으로 관측된 바 있다.
물론 북일 수교협상 재개는 이미 작년 말에 합의한 사항인데다 5일간의 만남을 갖고도 별 성과 없이 끝났다는 점에서 최근의 흐름과 거리감이 있어 보인다는 지적도 있지만, 만났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여기에 제3차 남북장성급군사회담을 2월말부터 3월초 사이에 여는 데 동의한 것은 대남관계의 유지는 물론 군사적 신뢰구축까지 기대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이런 흐름은 2004년 상반기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 해 4월 19∼21일 김 위원장이 베이징에서 후 주석과 첫 정상회담을 가졌고 5월7일에는 제14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군사당국자회담 개최에 처음으로 합의한 데 이어 같은 달 22일에는 김 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 사이에 2차 정상회담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당시 북핵 상황은 2월말 열린 제2차 6자회담이 회담의 모멘텀을 유지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이른바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핵폐기’(CVID)와 고농축우라늄(HEU) 문제를 놓고 공방이 치열했다.
물론 같은 해 6월 3차 회담 이후 작년 7월까지 6자회담이 열리지 못했고 남북관계도 휴지기에 들어갔지만, 북한이 미국과 대치상태에서 보여준 공세적 외교의 사례로 거론하기에는 충분해 보인다.
하지만 최근 흐름은 HEU 문제가 잠복한 가운데 위폐와 제재 문제가 불거지면서 북한을 경제적으로도 옥죄고 있다는 점에서 2004년 상반기와 차이가 있다.
경제적 악재까지 떠안은 북한으로서는 더욱 심각한 상황에 처한 셈이다.
특히 BDA의 거래중단은 북한의 현금 유동성을 저해하면서 대내 경제상황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게 북한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일각에서는 BDA 외에 북한의 다른 해외 자금융통 라인까지 흔들리는 게 아니냐는 관측마저 나온다.
이 관측이 맞다면 자금난은 갈수록 심각해질 수 밖에 없다.
이런 관점은 김정일 위원장의 ‘남순’(南巡), 우리측에 대한 비료 45만t 지원 요청, 현대아산 윤만준 사장의 방북 허용 및 금강산 개발총계획 협의 등의 조치가 북한의 장단기 재정난 타개를 위한 행동계획에 따른 것일 수 있다는 해석을 낳는다.
더욱이 북한이 지난 달 10일 올 들어 처음으로 우리측에 제안해 온 회담이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위원급 실무접촉이었다는 점은 시사점이 적지 않다.
이 접촉의 핵심의제가 신발, 의류, 비누 등 3대 경공업 원자재의 대북 제공문제였다는 점에서 다급한 북한의 사정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장성급회담 개최도 경제적인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
군사적 문제에 걸려 열차 시험운행 등 우리측 중점 과제에 진전이 없으면서 결과적으로 경공업 원자재 같은 북측의 핵심 현안도 속도를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북일 수교협상도 경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협상에서 북한의 최대 관심사는 일본의 과거청산이며, 여기에는 일제의 죄행에 대한 대북 피해 보상이 핵심을 이룬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북일 협상이나 금강산 개발의 경우 단기간에 경제적 효과를 보기 어려운 점을 들어 미국과의 장기전에 대비하는 게 아니냐는 시각도 없지 않다.
이 같은 관측을 종합해 볼 때 북한의 최근 움직임은 위폐 문제에 따른 대미 긴장관계를 다른 나라를 통해 뚫고 경제적으로도 안전판을 확보하겠다는 판단에서 나왔을 것으로 적지 않은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외무성 대변인이 지난 9일 화폐위조나 돈세탁 같은 불법행위가 있으면 엄격히 처벌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국제적인 반자금 세척활동에 적극 합류해 나갈 것”이라고 밝힌 것은 긍정적인 시그널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는 일단 북한이 공개적으로 성의를 보인 것으로 해석되지만 미국의 반응 여하에 따라 향후 어떤 국면은 유동적일 전망이다.
남북 간에는 21∼23일 적십자회담이, 이르면 이달 말에 장성급군사회담, 3월 28∼31일 장관급회담이 각각 예정돼 있고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의 방북 카드도 던져진 상태인 만큼 북한의 움직임을 전망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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