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은 지금 후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교육 수준을 회복하고자 각
분야에서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들의 교육개혁에 관한 관심과 열의는 우리나라 못지않게 뜨겁다. 실제로 개혁의 부산물로 산출되는 각종
부작용을 해결하지 못한 채 성급히 변하고 있는 학교를 현장에서 경험하고 있다.
독일 교육개혁의 핵심은 교육의 경쟁력이다. 1968년, 프랑크프르트 학파에
의해 주도된 문화혁명 이후 상실했던 경쟁력을 다시 회복하자는 것이다. 독일은 지난 40여 년간 경쟁 없는 참교육을 추진해 왔다. 그러나
국제학력평가 결과 최하위권에 속해 있다는 쇼크와 함께 독일 교육이 실패했다는 목소리가 드높게 되었고 개혁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20세기
초 독일이 누렸던 학문적 명성에 비해 당연히 수치스러운 일이다. 교육의 진정한 의미를 인격교육에만 편중하고 지식을 닦아야 하는 것 또한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지나쳐 버린 결과이다.
무엇보다도 교육에 있어서만은 좌파든 우파든 이념의 종이 되어서 휘둘려서는
안 된다. 이 세상에는 어떤 경우에도 완벽하게 이상적인 이념이란 있을 수 없으며 극단적으로 한쪽 성향에만 집착하다보면 결국 가장 이상적이라고
믿었던 진실이 바로 가장 큰 실패의 원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좌파적 참교육만을 강조하고 경쟁력을 등한시한 오늘날 독일 교육의 문제점이 그
대표적인 예다.
독일 교육은 분명 활기를 잃었고 자타가 공인할 만큼 침체의 늪에 빠져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경쟁력을 내어주고 그들이 얻은 것은 참다운 인간을 만들어 내는 교육이다.
독일은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으로 지금까지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나라다. 2차 세계대전이후 독일인들은 자라나는 2세들의 인격교육에 남다른 공을 들여왔다. 전쟁을 일으키고
양민을 학살했던 잔인성에 대한 책임이 교육에도 상당부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경쟁은 비인간적이라고 하여 학교와 학생의 서열화를
반대하고 대학을 평준화했다. 또 체벌과 교육적 강제를 행사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엄하고 권위적인 학습 분위기를 배제했다.
학교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을 보면
느낌이 거의 비슷하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면이 보이지만 자신의 의견을 말할 때는 성인과 같은 성숙한 모습을 보인다. 또한 남을 속이거나 거짓말
하는 것을 가장 큰 수치로 생각하고 법을 어기는 것을 무서워한다.
독일 사람은 공부에 관한한 우리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시험 성적이
아무리 나빠도 친구들에게 당당하게 밝힌다. 학교에서 한두 번 정도 낙제한 일을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학부모가 되어서도 자기
아이에게 학교 다닐 때 낙제했던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공부를 못하는 일을 가장 부끄럽게 생각했던 한국 사람에게는 조금 생소한 이야기다.
학교에서 낙제하는 것 보다 이들이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남을 속이고 규율이나 법을 어긴 경우다. 그런 일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가장 지탄받고
무시당한다. 주로 독일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외국인들이 많이 경험하는 일이다. 독일사회가 느슨해 보인다고 해서 얼렁뚱땅 일을 처리하고,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해서 어물쩍 넘어가려다가 덜미를 잡혀 톡톡히 망신을 당하고 갖은 모욕을 받는 경우가 있다.
선생님을 믿는 교육풍토 또한 참교육의 중요한 성과중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독일에서 아이를 키우다 보면 성적 때문에 답답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특히 독일어와 영어, 수학 등 중요과목을 제외한 사회와
자연과학, 예체능 과목의 성적처리는 철저히 교사의 자율성에 의지한다. 어떤 선생님은 시험도 보고 노트정리도 검사하고 수업시간 태도도
채점하여 객관적 평가를 위해 노력하기도 하지만, 어떤 선생님은 오로지 수업태도만을 점수화한다. 때문에 결과의
공정성에 대해 불만의 소리가 나오는 일이 많다. 성적표를 받을 때가 되면 학교에 면담신청을 하는 학부모들이 줄을 잇는다. 하지만 한가지
중요한 점은,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불만을 털어 놓다가도 성적에 대한 선생님의 견해를 듣고 나면 수긍한다는 것이다. 간혹 성적
대문에 법정에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그 것은 신문에나 나오는 흔하지 않은 일이다. 완전히 교사의 자율에 맡겨진
성적처리는 선생님에 대한 깊은 신뢰가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유럽사회에서 가장 강국이라는 차원과는 걸맞지 않게 어린이 보육제도가
낙후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독일 유치원은 일하는 여성들을 위한 편의를 보장하지 않는다. 종일반이 있기는 하지만
근무시간과 맞추기가 어려워 아이를 하루 종일 유치원에 맡기는 일은 쉽지 않다.
이처럼 일하는 엄마들에게 불편하기 짝이 없는 보육제도를 고수하고 있는
이유는, 어떤 훌륭한 유치원에서도 채워 줄 수 없는 것이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적인 인격이 갖추어지는 유치원 시기에 어머니의 보살핌이 부족하다면 사랑이 결핍된 아이로 자랄 수 있는 확률이 많다는 것이다. 제도권 교육이
아무리 완벽하고 과학이 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변하지 않는 진실이 있다면 사랑이다. 독일 아이들은 부실한 보육 제도 때문에라도 하루 종일 어머니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다.
한 의사 부부의 아이들 키우는 모습을 예로 들면 독일 중산층이 교육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함께 병원을 개업하고 있는 이 의사 부부는 두 아이의 부모이기도 하다. 아이가 유치원을 다닐
때부터 우리 아이와 비슷한 또래여서 알게 되었다. 그들은 병원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절대로 아이들을 유치원에 하루 종일 맡겨두지
않았다. 12시, 병원 휴식시간이 되면 서둘러 아이를 데려와 점심을 먹인 후, 2시에 다시 데려다 준다. 당연히 여자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고, 남편과 역할 분담을 해야만 병원시간과 맞출 수 있다.
이들이 하루 종일 아이를 유치원에 마음 놓고 맡기지 못하는 것은 유치원
시설이 낙후되어서도 선생님을 믿지 못해서도 아니다. 유치원 교육의 질은 세계 어디에 내어 놓아도 부족하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따뜻한 점심을 함께 먹으며 잠시 동안만이라도 부모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는 것, 그 일이 그들에게는 다른 어떤 교육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아이가 어릴수록 부부가 모두 아이들 키우는 일로 바쁜 하루를 보내야 하는
것이 보통 독일가정의 모습이다. 그들이 바쁜 것은 우리나라처럼 배울 것이 많아서 아이들을 이 학원 저 학원에
끌고 다녀야 하기 때문이 아니다. 배우는 것이 있다면 일주일에 한번, 운동이나 악기 정도가 전부다. 나머지 시간은 엄마와 함께 동화책을 읽거나
게임을 한다든지, 공원에 산책을 나간다든지, 각종 어린이를 위한 문화행사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등 정서교육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독일 교육의 실패를 논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교육의 경쟁력에만 목소리를
높인다. 지나친 경쟁력 속에 묻혀버리는 인간의 존엄성과 그와 연관된 바람직한 인격형성을 위한 교육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는 경우가
많다.
독일 교육이 실패했다고 하지만 교육의 실패는 비단 독일의 문제만은 아니다.
시장경제 원리에 의한 강한 경쟁력을 바탕으로 오늘날 세계 최강국의 신화를 이루어낸 미국 교육 또한 그림자가 없지는 않다. 교육의 경쟁력과 그로
인해 막강한 나라를 세우는 데에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자신들의 밥그릇을 채우기 위해 제3국에서 전쟁을 일으키고 신의
이름으로 무차별하게 인명을 살상하고 있는 그들이 과연 교육의 진정한 목표인 참 인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 점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학문의 경쟁력에만 집착한 나머지 윤리와 도덕을 던져버린 황우석 교수 사태를 보면 그 중요성을 더욱 절감할 수 있다. 그것도 한
사람의 잘못으로 이루어진 결과가 아니라 수많은 엘리트들이 관여된 희대의 사기 행각이라 생각하면 허탈해 지기까지 하다. 승자와 패자로 분류되는
비인간적이고 냉엄한 경쟁 속에서 교육받은, 윤리와 도덕이 결여된 지식인들이 만들어낸 치욕스런 역사가 바로 이 사건이다.
독일도 물론 어두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20세기 초, 유럽 최고의 산업 국가로 발전을 거듭하던 독일이, 왜 전쟁의 폐허 속에서 다시 시작해야만 했는지 생각해 본다면, 인간
교육을 무시하고 경쟁에만 내돌려지는 교육이 얼마나 위험한 종말을 예고하는지 알 수 있다.
지금 독일은 100년 전 자신들의 명성이 역사 속에 묻히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 것을 다시 찾기 위해 반세기 동안 쌓아왔던 참교육을 버리고 살벌한 경쟁 속에 다시 뛰어들고자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독일의 교육개혁을 반대한다. 교육이 백년대계라고 한다면, 100년 후 독일 사람들은 결국 교육의 경쟁력을 회복하고 옛 영광을 다시 찾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결과를 얻기 위해 잃어버린 것들을 생각하며, 100년 전의 오늘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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