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비교. 통계자료

박정희와 노무현의 차이

鶴山 徐 仁 2006. 1. 30. 16:23
총선 앞두고 부가가치세 도입에 따른 정치적 부담을 감수했던 박정희, 지방선거 앞두고 '增稅'관련 말바꾸는 노무현
박정희 대통령은 ‘나라를 위해 필요하다’는 판단이 서자, 정치적 부담을 무릅쓰고 부가가치세제 도입을 강행했다. 그리고 결국 그로 인해 정권의 몰락, 아니 자신의 죽음까지 감수해야 했다.
 반면에 노무현은 분명히 “양극화 해소를 위해 세금을 더 걷고, 정부의 재정을 계속 확대해 나가야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고, 그런 주장을 피력한 적이 있으면서도, 그로 인한 정치적 부담은 회피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강철군화   
 1. 노무현의 멀로니 예찬
 
 최근 노무현의 증세론과 박근혜의 감세론이 정면 충돌하면서, 세금을 늘렸다가 정권붕괴로 이어졌던 사례들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는 것이 캐나다의 브라이언 멀로니 전 총리의 경우다. 멀로니 전 총리는 1991년 연방부가세 제도를 도입했다가 국민들의 반발을 사서 2년 뒤 총선에서 참패했다. 총선 전 189석의 의석을 자랑하던 멀로니 총리의 진보보수당은 총선 후 단 두 석만을 건졌다.
 
  노무현도 작년 10월 청와대 출입기자들과의 산행시 멀로니의 사례를 장황하게 설명했었다.
 그때 그는 "멀로니의 패배는 연방부가세 도입으로 민심을 잃은 게 가장 주된 원인"이라면서 “보수당 정권이 도입한 연방부가세에 힘입어 캐나다는 1997년 흑자재정으로 돌아섰고, 덩달아 인기가 폭발한 폴 마틴 재무장관은 지난해 장 크레티앙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됐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세제개혁으로 몰락한 보수당은 당분열과 통합 과정을 거치면서 현재 70여석으로 야당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마틴과 멀로니 두 지도자중에서 누가 소신 있는 정치인이며 누가 지도자냐, 수수께끼는 이것"이라고 말했다.
  노무현의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해 당시 언론은 "‘미래를 멀리 내다보면서 일할 수밖에 없는 것이 대통령의 자리’라는 국가통치권자로서의 고민을 전달하는 동시에 ‘내 임기동안 욕을 먹더라고 미래를 위해 옳은 일이라면 정파적 이해관계를 떠나 관철하겠다’는 평소 신념을 새삼 강조한 것“이라고 풀이됐다.
  노무현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그가 최근 이방원과의 정권다툼에서는 패했지만,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진 정도전에게 심취해 있는 것과도 맥을 같이 한다.
 
  당대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국가를 위해 진정으로 이로운 일을 행하려 고민하는 것은 국가지도자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이다. 노무현이 그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이러니 저러니 비판도 많이 했지만, 그러한 문제들을 가지고 고민하고 있는 것을 보면, 노무현에게도 자신이 지도자라는 최소한의 의식은 있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든다.
 
  2. 박정희 대통령과 부가가치세
 
 부가가치세제의 도입
 
  우리나라에도 노무현이 극찬해 마지않는 브라이언 멀로니 같은 지도자가 있었다.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 그 분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부가가치세를 도입해 국가재정을 안정기반 위에 올려놓았으나, 그 결과 총선에서 패배했고 그 후유증으로 정권의 몰락까지 감수해야 했다.
 
  박정희 정부가 부가가치세 도입을 천명한 것은 1971년이지만, 조세개혁 준비에 들어간 것은 1969년부터였다. 그해 10월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된 김정렴씨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재무부 장관만은 사정이 허락하는 한 가급적 장기근무할 수 있도록 하여 우리나라의 세제를 충분한 시간 여유를 가지고 장기적 관점에서 근본적으로 개혁하도록 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건의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건의를 받아들였다. 이후 9년간 남덕우(5년)-김용환(4년) 두 사람이 재무부 장관을 맡으면서 부가가치세 도입 등 조세개혁을 단행했다 (건국 이래 1969년까지 역대 재무부 장관의 평균재임기간은 11개월이었다).
 
  1971년 남덕우 당시 재무부 장관은 <장기 세제의 방향>에서 부가가치세 도입방침을 공표했다.
 박정희 정부가 부가가치세를 도입하려 한 가장 큰 이유는 경제개발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함께 부가가치세의 도입으로 조세체계의 정비도 기대되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세제는 온갖 명목을 찾아 세수 증대에 주력한 나머지 세제가 복잡했다. 또 높은 세율의 직접세에 치중하다보니 조세저항이 심했다. 세무당국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거한 ‘인정과세’로 인한 탈세 등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경제개발에 소요되는 막대한 재정수요를 뒷받침하면서도, 국민들에게 부담을 적게 주고 간편하게 거둘 수 있는 새로운 간접세의 도입이 요구되고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간접세제는 술,담배,자동차,석유 등 개별 생산품에 대해 세금을 매기는 개별소비세 중심이었다. 개별소비세제 아래서는 예를 들어 컴퓨터가 등장해서 여기에 세금을 매기기 위해서는‘컴퓨터세’를 신설해야 했다. 산업발전에 따라 세제를 손 봐야 했고, 세제가 복잡했으며, 세금탈루의 가능성도 높았다.
 이에 따라 정부는 재화나 용역이 제공,생산되거나 유통되는 모든 단계에서 기업(사업자)이 부가하는 가치에 대해 과세하는 일반소비세인 부가가치세 도입을 검토하기 시작한 것이다. 부가가치세는 제2차세계대전 후 맥아더사령부의 요청으로 일본의 세제개혁안을 마련했던 미국의 재정학자인 샤프 박사가 “소비세의 역사적 발전과정에 있어서 최신의, 그리고 아마도 최후 단계의 일반소비세”라고 평가했던 선진적인 조세제도였다.
 
 이후 정부는 6년여에 걸쳐 부가가치세제 도입작업을 벌였다. 1976년 12월에는 관련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정부는 이듬해 7월1일부터 부가가치세제 실시방침을 공포했다.
 
 박대통령,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냐”
 
 그런데 부가가치세제 도입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각계에서 반발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기존의 개별소비세제 아래서 과세 대상에서 벗어나 있다가 부가가치세 과세 대상에 포함되거나 부가가치세 도입과 함께 영수증 주고받기와 자진신고납부를 강화하면서 사업자들이 느끼게 되는 부담, 제품에 부과되는 부가가치세만큼 제품가격이 오르고 이곳이 물가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만만치 않았다.
 야당은 당론으로 부가가치세제 도입을 반대했다. 전경련 등 경제4단체에서도 부가가치세제 실시 연기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여당인 공화당이나 정부 안에서도 반대목소리가 높았다. 1978년 실시예정인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 부담이 된다는 것이었다.
 
 부가가치세제 실시를 두 주 가량 앞둔 1977년 6월13일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부가가치세제 도입에 관한 당정협의를 가졌다. 박대통령은 참석자 모두에게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도록 했다. 김정렴 비서실장, 김용환 재무부 장관 정도가 부가가치세 도입 강행을 주장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용환 재무부 장관에게 “부가가치세를 꼭 지금 도입해야 하느냐”,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냐”고 물었다. 김용환 장관은 부가가치세제 도입의 당위성을 다시 한번 설명했다. 그러자 박정희 대통령은 부가가치세제를 예정대로 실시하기로 결단을 내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정치는 내가 걱정할 테니, 장관은 경제를 잘 챙기도록 하시오.”
 
 당시 공화당이나 내각에서 1977년 7월1일부터 부가가치세제를 도입하는데 반대했던 것은 제10대 총선이 1년 반 앞으로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8년 12월로 예정되어 있던 제10대 국회의원 총선은 정치적으로 아주 중요한 선거였다. 이 선거는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선으로 선출하고, 지방자치제도도 없던 당시로서는 민심이 표출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더욱이 제10대 총선은 유신헌법 공포 직후인 1973년 2월 제9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진 지 근 6년 만에 치러지는 첫 선거였다. 유신체제에 대한 중간평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따라서 선거를 앞두고 조세저항, 조세마찰을 유발할 수 있는 새로운 세제를 도입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공화당에서는 부가가치세제 도입이 꼭 필요하다면 제10대 총선 이후인 1979년 이후로 연기하자고 요청했다.
 박정희 대통령도 부가가치세제 도입이 선거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부가가치세가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는 대답을 듣자, “정치는 내가 걱정할 테니, 장관은 경제를 잘 챙기라”면서 부가가치세제 실시를 승낙했던 것이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고 말하곤 했던 박정희 대통령다운 선택이었다.
 
 유신체제의 붕괴로 이어진 부가가치세 도입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은 그에 대해 혹독한 댓가를 치러야 했다. 이듬해 12월12일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여당인 공화당이 의석 수에서는 신민당에게 앞섰지만, 득표율에서 신민당에게 1.11% 뒤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바뀌는 것은 없는 듯 했다. 하나의 선거구에서 두 명의 국회의원을 뽑고, 유정회라는 간선 국회의원들 덕분에 여당이 여전히 국회에서 다수당을 차지하고 있었다. 모든 권력은 여전히 청와대로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개월 후 유신체제는 붕괴하고 말았다.
 
 우선 제10대 국회의원 총선에서의 승리(?)를 계기로 야당이 기세를 올리기 시작했다. 다음해 5월, 그 여세를 타고 야당인 신민당의 당권은 ‘선명야당’의 기치를 내건 김영삼에게 넘어갔다. 김영삼은 사사건건 박정희 정권과 대립각을 세우다가 결국 국회에서 제명당했다. 김영삼의 제명은 부마사태로 이어졌고, 부마사태에 수습방안에 대한 정권 내부의 갈등은 10-26사태를 불러왔다.
 
 또 하나, 제10대 총선이 가져온 박정희 정권 내부의 역학관계 변화도 10-26사태의 한 원인이 되었다.
 당시 공화당, 중앙정보부, 언론에서는 한결같이 여당의 가장 중요한 패인 가운데 하나로 부가가치세 도입을 들었다. 정보당국에서는 1977~78년 육류-수산물 등 생필품 가격 급등으로 인한 도시서민층의 불만, 새로운 다수확 품종으로 정부에서 적극 권장했던 ‘노풍’을 파종했다가 병충해 피해를 입은 호남 농민들의 불만과 함께, 부가가치세 정착과정에서의 상공인들의 불만을 선거의 패인으로 꼽으면서 당시 경제의 축이던 김정렴 비서실장-남덕우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김용환 재무부 장관에 대한 인책을 건의하는 보고서를 세 번이나 올렸다.
 결국 그해 12월 개각과 함께 김정렴 당시 비서실장은 9년3개월만에 청와대를 떠났다. 대통령의 신임과 10년 가까운 청와대 비서실장 재직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권위를 갖고 있던 김정렴 실장이 청와대를 떠나면서, 권력은 급속히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쏠렸다. 김정렴 비서실장의 후임인 김계원 실장은 군출신이기는 하지만 성격이 유순한데다가 6년 이상 주중화민국 대사로 국내를 떠나 있었던 탓에 국내 정세에 어두웠다. 그는 김재규와 차지철 사이의 갈등을 적절히 조절하는데 실패했다.
 10-26 직후 당시 주일대사이던 김정렴 전 실장이 조문차 귀국했을 때, 김경원-함병춘 대통령 특보 등이 이구동성으로 “김정렴 실장이 계속 비서실장으로 있었더라면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김정렴 시장의 부재가 권부 내의 역학관계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주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부가가치세제 도입을 위한 조세개혁의 단초를 마련했고, 부가가치세제 도입 과정에서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던 김정렴 실장이 그 결과 비서실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그의 부재가 10-26의 한 원인이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3. 노무현과 박정희
 
 국민들이 화수분이라도 하나씩 갖고 있는 줄 아나
 
 청와대는 1월27일 <박 대표 기자회견에 대한 청와대 입장>이라는 제목으로 김만수 청와대 대변인 명의의 논평을 냈다. 김만수 대변인은 이 논평에서 재정과 예산 규모를 줄이자는 박 대표의 제안에 대해 "이는 듣기에는 좋은 이야기지만 마치 홀쭉이가 살빼기 하자는 것처럼 적절치 않은 주장"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한나라당이 주장하고 있는 기초연금제만 하더라도 연간 9조5천억의 재정이 소요되는데, 세금도 줄이고 예산도 줄이자면서 양극화를 해소하자고 하는 것은 무책임하고 전형적인 포퓰리즘적인 발언"이라면서 "박근혜 대표는 맹물로 가는 자동차라도 발명했다는 것인가"라고 비아냥거렸다.
 이는 “대통령도 국민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할 수 없고, 국민이 반대하는 일을 무리하게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라면서 “당장 증세를 주장하지는 않는다”던 이틀 전 노무현의 신년기자회견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권의 정책기조는 기본적으로 증세와 재정확대에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노무현은 1월18일 대국민연설에서는 "양극화 해결을 위한 일자리 대책, 사회안전망 구축, 미래대책을 제대로 해나가기 위해서는 많은 재원이 필요하며, 2030년까지 장기재정계획을 세워보면 아무리 재정의 효율성을 높이고 지출구조를 바꾸더라도 재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며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노무현은 작년 8월25일에는 KBS <참여정부 2년6개월 노무현 대통령에게 듣는다>에서 "조세부담율이 높을수록 건강하고 좋은 것"이라면서 "중산층이 좀 짜증나시더라도 연금 좀 부지런히 내시고 세금도 좀 더 내시고 이렇게 해서 전체적으로 하면 정부가 꼭 책임지겠다"고 주장했었다. 그때도 노무현은 ‘양극화 해소’를 강조했었다.
 
 그리 많지 않은 월급이 조금 올라봤자, 세금이나 국민건강보험, 국민연금은 월급 인상폭보다 훨씬 높은 폭으로 올라간다. 각종 공공요금이나 물가가 오르는 것까지 치면 작년보다 마이너스가 안 되면 다행일 지경이다.
 노무현은 “좀 짜증이 나시더라도”운운 해 가며 세금 더 내라고 요구했지만, 국민들의 허리야 휘건 말건 “지금 정부는 큰 정부가 아니다”라며 악귀 같이 세금 더 걷어갈 궁리만 하는 노무현과 그 졸당들을 보면 ‘짜증’ 정도가 아니라 ‘열불’이 난다.
 청와대 대변인이란 놈은 감세론을 주장하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를 향해 “박근혜 대표는 맹물로 가는 자동차라도 발명했다는 것인가"라고 비아냥거렸지만, 나는 오히려 노무현과 청와대 대변인을 향해 되묻고 싶다.
 “청와대는 국민들이 아무리 돈을 꺼내 써도 마르지 않는 화수분이라도 하나씩 갖고 있는 줄 아느냐”고 말이다.
 
 정치적 부담 감수한 박정희, 정치적 부담 회피하는 노무현
 
 당대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맡기겠다는 자세를 보인다는 점이나 재정확대를 추진한다는 점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노무현은 일정 부분 닮아 보인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점에서 박대통령과 노무현은 다르다.
 
 첫째, 박정희 대통령이 부가가치세제를 도입하면서 재정을 확충하려 한 것은, 기본적으로 경제개발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반면에 노무현이 재정을 확대하겠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분배’를 위한 것이다.
 
 둘째, 박정희 대통령은 ‘나라를 위해 필요하다’는 판단이 서자, 정치적 부담을 무릅쓰고 부가가치세제 도입을 강행했다. 그리고 결국 그로 인해 정권의 몰락, 아니 자신의 죽음까지 감수해야 했다.
 반면에 노무현은 분명히 “양극화 해소를 위해 세금을 더 걷고, 정부의 재정을 계속 확대해 나가야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고, 그런 주장을 피력한 적이 있으면서도, 그로 인한 정치적 부담은 회피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청와대 대변인이 "큰 정부는 없다. 아직 할 일을 다하지 못한 작은 정부가 있을 뿐이다“라고 억지를 쓰는 것을 보면, 이 놈의 정부는 정부의 허리띠부터 졸라맬 생각은 죽어도 없는 것이 분명하다.
 돈 쓸 곳은 많은데 지출을 줄이지 않겠다면, 방법은 세금을 더 걷거나 나라빚을 늘리는 방법밖에는 없다. 어느 쪽이건 부담은 국민들에게 전가된다. 노무현 스스로도 작년 8월, 분명히 자기 입으로 "조세부담율이 높을수록 건강하고 좋은 것"이라면서 "중산층이 좀 짜증나시더라도 연금 좀 부지런히 내시고 세금도 좀 더 내시라”고 말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론의 반발이 거세자 노무현은 짐짓 “대통령도 국민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할 수 없고, 국민이 반대하는 일을 무리하게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라면서 “당장 증세를 주장하지는 않는다”고 의뭉을 떨고 있다.
 여기서 핵심은 “당장 증세를 주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왜?
 이유는 간단하다. 지방선거가 5개월 앞으로 다가와 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경제를 비롯해 하는 일마다 꼬여 민심이 등을 돌린 마당에서, 증세 얘기 함부로 했다가는 지방선거에서 참패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당초 올 2~4월으로 예정됐던 <중-장기 세제개혁방안> 발표가 지방선거 이후로 미루어질 것이라는 얘기가 솔솔 나오는 이유도 빤하다.
 
 마음은 여전히 ‘증세’에 있고, 머릿속으로도 여전히 그 궁리만 하면서도, 정치적 판단 때문에 짐짓 그 논의를 지방선거 뒤로 미루려는 것은 비열함의 극치이다.
 
 ‘성장’과 ‘분배’ 가운데 어느 쪽을 중시하느냐 하는 것은 개인의 철학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달리 생각할 수도 있는 문제라고 치자.
 하지만 노무현이 ‘정치적 부담’ 때문에 “당장 증세를 주장하지는 않는다”고 의뭉을 떠는 것은 정말 역겹다. 그의 이런 자세는 ‘나라를 위해 필요하다’면 ‘정치적 부담’까지도 기꺼이 감수했던 박정희 대통령과는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
 내가 27년 전에 돌아가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는 깍듯이 ‘대통령’이라는 호칭을 붙이면서도, 현직 대통령인 노무현에게는 ‘대통령’ 호칭을 붙이지 않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 2006-01-30, 0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