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우리나라 畵壇

[스크랩] 솔바람 속의 먹내음 -7-

鶴山 徐 仁 2005. 11. 20. 16:08
산마을 그림순례] 솔바람 속의 먹내음

청송 대둔산 신촌 마을
▲ 풍송(39X58cm)
‘머리털이 백발이 되도록 그림 이외의 일에는 곁눈질하지 않고 살아온 야송(野松)이원좌(李元佐)에게 신(神)이 10년 이상의 시간적인 기회를 더 준다면 군립 청송야송미술관에 기증한 365점의 산수화와 청화백자를 효과적으로 보존 정리하겠습니다. 또 2008년 야송 칠순전을 마치고 2차 기증 작품으로 미술관의 질적 향상을 꾀할 것이며 미술 관련자료인 팜플렛, 카탈로그, 화집류와 기타 일반 도서인 시집, 소설, 위인전, 백과사전 등 3만여 점의 도서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겠습니다. 그 목록을 인터넷으로 공개하여 많은 화우(畵友)들이 부담없이 열람하여 그림의 정신적 문기(文氣)를 더하는 기회의 장으로 선용하겠습니다.’(‘군립 청송야송미술관 개관사’ 중에서 이원좌 경서).

수많은 예술가들이 제 생명과 정신의 모태인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것이 소망인데, 금의환향(錦衣還鄕)이라면 가히 기뻐서 춤출 일이다. 1937년 청송군 파천면 지경리 출생인 야송 이원좌 선생은 만년에 복이 터졌다. 평생 떠돌이 화가로 산천을 헤매고 다니던 선생이 고향과의 시절인연으로 모두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폐교를 전시공간으로 개조

그러나 세상살이에 공짜 있던가. 더구나 예술가에게는 가시밭길을 걸어간 만큼 메아리가 들리는 법. 선생의 삶은 들녘의 소나무처럼 외롭고 스산하였다. 소위 전업화가의 불안정한 수입 속에 오남매를 둔 가장으로 땅힘을 믿고 떠돌기엔 참으로 고단했다. 그러나 선생은 아직도 백발의 꽁지머리를 나부끼며 기운생동해 있다. 아니 새로운 출발로 흥분에 젖어 있었다.

“아이고, 어서 오시게.”

지난 시간 부득이 선약이 있어 미술관 개관식(2005.4.29)에 참석하기 어렵겠다는 전화통화에 적이 섭섭해 한 선생의 음성을 기억한 후 나는 빚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서울집이 한 동네인데도 왕래가 뜸했고, 작업장을 옮길 때마다 기다림의 손짓이 있었건만 찾아뵙지 못하였다. 또 얼마 전 소나무 살리기 예술인 서명운동(솔바람모임 주최) 때 청송에서 올라온 분을 차 한 잔 대접하지 못하고 내려가시게 한 것 또한 마음에 걸렸었다.
“선생님, 감축드립니다. 미술관이 아주 훌륭하군요.”
1943년 3월16일 개교 후 졸업생 2,874명을 배출한 신촌초등학교가 폐교(2003년 3월1일)된 곳에 들어선 군립청송야송미술관. 청송은 물론 경북 북부지역의 선구적인 미술센터다. 군수의 배려 속에 이경국 문화관광과장과 유홍락 계장이 전국 주요 미술관을 견학하고 전문가에게 자문을 청해 페교를 전시공간으로 탈바꿈시킨 후 작가를 모셔온 우여곡절의 노고가 이제 뿌리를 내린 것이다.

미술관은 1층(소전시장, 중전시장, 사무실, 도서실)과 2층(관장실, 대전시실, 수장고)으로 나뉘었고, 부속건물로 집단 숙식이 가능한 방들과 주방, 강의실, 창고 등이 마련되어 있었다.

▲ 청송야송미술관(40X31cm)
소장품 중 ‘둥글바우산’은 두루마리첩으로 야송 선생이 이곳에 정착하고서 심혈을 기울인 근작이다. 특히 화제의 내용은 이곳 산마을의 애정과 지형을 살피게 했다.

‘이 그림의 구성은 비봉산(飛鳳山)을 시작으로 선유대(仙遊臺), 선희대(仙戱臺), 등선대(登仙臺), 강선대(降仙臺), 구름재로 펼쳐지는 물굽이 안쪽은 꽤 넓은 공간이 있어 뭇사람들의 놀이마당으로 금상첨화다. 할매꼬부랑길 무학봉(舞鶴峰), 우하폭포(雨夏瀑布), 돈오대(頓悟臺) 등산로를 따라 망야송(望野松), 사선대(四仙臺) 지나 필운봉(弼雲峰) 할매꼬부랑길, 화장재, 태항산, 문필봉으로 이루어져 있다.’(2004년 66세 노인 야송 삼가 그림).
수천 그루 노송 늘어선 사선대
이곳 신촌 마을은 구역상 북쪽으로 영양군 석보면과 경계를 이루고 대둔산(大遯山)에서 발원한 서시천(西施川)이 마을을 휘돌아 서쪽으로 흘러간다. 고려 말 평산신씨와 조선 초엽에 영해박씨들이 터를 잡았으며 예전엔 상리(上里)라고 불렀다. 근자에 와서 진보군 동면 사무소가 개설되면서 새마을이 생겼다하여 신촌(新村)이라 부르게 되었다. 주변의 뱀밭골, 웃마을(신촌2리), 원골, 청석골, 황새골 등의 산마을이 연결되어 있다.

저녁은 미술관 입구 포항식당에서 이곳 명물인 닭날개구이를 대접 받았는데, 배운하(50)-이순조(46) 부부가 경영하는 곳이다. 그 중 배씨는 미술관 관리책임자로 임명되어 새 직장을 얻었다.

오남매를 모두 서울에 두고 단둘이 관사에 머무는 야송 선생 부부. 부인 유정희(柳貞姬?59) 여사는 남편을 꼭 “야송 선생님”으로 깍듯이 존칭하여 부르니 그간의 고초 속에서도 선생을 섬긴 내조의 공덕을 알겠다.

▲ (왼쪽부터) 솔바람(33X24.5cm) ,솔바람 물소리(33X24.5cm)
“야송 선생님은 하루 밥 세 공기 뚝딱, 소주 한 병 뚝딱, 담배 한 갑 뚝딱 해치우며 그림을 그리시지요”

푸근한 부인의 말을 듣고 선생과 나는 미술관 숙소로 잠자리를 옮겼다. 이튿날 날이 밝자 선생은 나를 위해 어제 본 그림의 현장인 둥글바위산부터 오르잔다. 마을의 서시천을 걸어 오르는 바위산은 벌써 녹음이 짙어 바위들을 덮고 있었다. 병풍처럼 둘린 바위산에 올라 내려다보자 마을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저 멀리 태행산(太行山?933m)이 우뚝하고 아래로 문필봉이 솟았으며, 그 앞으로 마을 주산인 대둔산이 마을을 품고 있다. 또 능선의 끝자락으로 비봉산이 기와지붕 형태로 아스라하다. 마을은 둥글바위산을 경계로 산자락 아래 벌판 속에 펼쳐지는데, 기다란 솔숲 아래로 미술관이 드러난다.

그 중 선생이 손짓하는 황학골의 황새목 형상설은 흥미로웠다. 조선시대의 한 스님이 학의 형상을 한 이곳 지형을 발견하고 마을 농부에게 그 터에 집을 짓게 해 부자가 되었으나 후일 교만해져 망했다는 것. 한편 중국의 이여송 장군이 임진왜란때 이곳에 와 명당의 지맥(황새목혈)을 끊어 놓았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한편 선생은 무성해진 활엽수 사이로 드러나는 바위틈의 노송을 살펴보라 하니 어느 하나 명송이 아닌 것이 없다. 바위틈에서 거친 비바람 눈보라를 감내하며 자란 낙락장송은 갖가지 형태가 신비의 자태 그 자체다. 이 병풍 같은 둥글바위산에 노송이 수백, 수천 그루나 된다하니 어쩌면 야송(野松)이란 호를 가진 선생의 복이요, 마땅히 의지처로 삼을 만한 길지(吉地)다.
마을 추진사업에 의해 활엽수를 제거하고 나면 둥굴바위산 위에 우뚝우뚝 솟아날 소나무의 장관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 능선을 타며 살펴본 솔숲의 기상은 청송은 물론 한국의 명소로서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들판이 농부들 경작지로 온통 푸르러
하산길에 선생께서 정자를 세울 계획인 마당바위로, 사선대(四仙臺)로 명명한 곳에 이르렀는데, 나는 바위에 앉은 선생의 모습을 화첩에 담았다. 관사로 돌아와 부인께서 준비해준 산나물 밥상을 물리고 이제 본격적인 마을순례를 떠나는 길. 언덕 위 솔숲 속에 미술관이 터를 잡았고, 솔숲 우거진 언덕 너머로는 자연호수가 솔바람에 일렁인다.

▲ 청송 대둔산 신촌 마을(96X58cm)
모내기 준비로 이양기를 모는 젊은이, 그를 바라보는 노인의 눈길이 부자의 정처럼 따스하다. 지금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은 없을 것이다. 들판이 이곳 주산물인 사과 과수원, 담배, 고추로 푸르다. 빛바래고 갈라진 황토 담배건조막은 마을의 지난 사연을 들려준다.

마을이장(이동국·46)을 만나자 ‘농촌마을 종합개발 예비계획서’를 보여준다. 그런데 청송의 명품인 꽃돌(화문석) 가게와 화훼, 분재하우스 속에 파묻혀 사는 이장의 손길은 대단한 경지였다. 다양하게 토종 야생화를 가꾸는 정성이며 무엇보다 소나무 분재 솜씨는 가히 일품으로 돋보였다. 땅에서 익어온 순박한 표정, 투박한 손을 지닌 젊은 이장의 눈빛. 그는 촌장으로서의 의지와 소명감으로 단단한 어깨를 지니고 있었다.

현재 157가구에 400명에 이르는 신촌1리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신촌약수와 화문석, 닭백숙에 야송미술관이 새로운 명소로 자리 잡았다. 미술관과 마을숲(둥글바우산)을 활용한 분재 야생화 공원, 약수탕 앞산(둥글바우산)을 이용한 인공폭포, 구름다리, 팔각정 설치와 벚꽃 산책로를 마을 발전 계획으로 삼고 있다.

이장과 인사를 나누고 미술관으로 향하는데, 큰길에 청송꽃돌 전시장이 눈길을 끌어 전시장으로 들어가 보니 참으로 놀라울 뿐이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신비의 꽃돌’이라는 슬로건처럼 돌은 매혹적인 문양과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 국화, 해바라기, 장미꽃 문양이 보이는가 하면 멀리서 보면 올챙이 알들이 모여 있는 것 같다. 또 세포분열 현상이나 눈꽃이 피는 형상,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그윽한 것도 있다.

이 꽃돌은 유독 청송의 산에서만 채취되는 것으로, 7, 8부 능선에서 채석하고 일자맥과 직선 라사맥으로 채굴한다. 꽃돌은 연마하지 않으면 육안으로 살펴지지 않지만, 연마하고 나면 신비한 보석으로 변해 보는 이들에게 황홀경을 선물하는 것이다. 이 아름다운 꽃돌이 유출되지 않고 박물관이라도 지어서 오래도록 기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왼쪽부터) '만바우촌'을 운영하는 백선옥씨. 마을주민 김옥섭씨.
다시 길을 재촉하는데 갑자기 비가 뿌려 머물 곳을 찾아 들어선 곳은 ‘청송불로주’ 가게였다. 주인(조복래)이 야송 선생을 반기며 나그네에겐 청송물로 빚은 약술 ‘낭군님’을 안겨주니 참으로 난처하다. 그런데 챙겨준 자료를 본 즉 뉴욕에서 열린 음식료 분야 국제품평회(뉴욕 컨벤센 2002)에서 품질 부문 금상을 받은 술이 청송불로주가 아닌가.

청송불로주는 암반층에서 뽑아 올려 천연 미네랄이 풍부한 탄산약수를 이용, 우리 쌀과 밀을 누룩으로 발효시켜 증류한 순곡주라고 한다. 병 모양도 웃는 하회탈로 디자인하여 한국의 이미지를 드러낸 것이 인상적인데, 둘러본 내부의 술 공장은 의외로 현대적인 설비로 충만하다. 옛날부터 유명한 신촌약수가 오늘에 와 술을 빚는데 크게 공헌한 바, 청송의 또 다른 명품이 된 까닭일 것이다.
분재 수백 점도 소장하고 있어
늦은 점심은 또 관사에서 부인께서 마련해준 찜닭과 닭죽을 후히 대접 받았다. 그런데 선생은 수저를 놓자마자 아침나절 문이 잠겨 들르지 못한 둥글바위산 앞집을 꼭 가보아야 한다며 앞장선다. ‘만바우촌’이라는 야외식당인데 내 생각인즉 ‘만 개의 바위와 함께 어우러진 집’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를 맞이한 주인 백선옥 사장은 영국인 남편(클라이브 에드슨)과 함께 이곳 바위산이 마음에 끌려 넓은 터를 구입, 집을 짓고 산다고 한다.

매우 이색적인 삶을 꾸려가는 부부는 국제적인 감각을 갖춘 이들로, 한국 자연의 아름다움을 이웃에게 나누고 싶다고 한다. 마을분들에게도 편의를 제공하여 노인 잔치를 이곳에서 치렀단다. 외국인에 대한 접대와 통역이 자연스럽고 마을 홍보에 대해서도 적극성을 가진 백 사장은 밝은 인상에 친절한 매너를 지녔다. 실제 식당과 세미나실 등 내부구조를 살펴보자 디자인과 공간 건축미가 돋보인다.

▲ 모내기 준비(32X49cm)
“선생님, 혹 외국 손님이나 중요한 미술관 행사를 이곳에 연결해 사용하시면 매우 빛날 것 같습니다만-”

“예, 그러지 않아도 주인과는 잦은 왕래가 있고 앞으로 긴히 협조할 사항이 참 많을 것 같습니다.”

결국 문화예술의 파급과 효능은 기획, 전시, 홍보는 물론 교통의 편의, 숙식 등이 중대하므로 미술관 주변의 생활문화와 편의시설이 함께 살아나야 도움이 될 것이다. 미술관 운동장은 앞으로 조각공원과 야생화 단지로 꾸밀 계획이라는 말을 들으며 다시 미술관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마침 배대윤(裵大潤) 군수와 관계 공무원들이 외부 손님을 모시고 와 함께 관람하고 있었다.

사실 미술관의 운명은 지속적인 관심과 투자가 이어져야만 존속하게 되는 것. 당장의 자본을 믿고 개인미술관을 지었다가 훗날 관리도 되지 않고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사례를 종종 보는 바, 야송미술관은 이 점에 있어 군과 함께 하는 든든한 뿌리를 내린 것이다. 관리인에 의하면 폐교된 모교를 안타깝게 여기던 동문과 동창들이 제일 먼저 반기며 앞으로 미술관 덕분에 동문회가 활발해질 것이라는 귀띰 또한 반가운 소식이다.

모쪼록 야송 선생의 여생이 미술관과 함께 풍요롭고, 작품세계 또한 깊어지시길 기원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리고 부디 청송의 자랑으로 신촌 마을의 자존으로 자리매김하기를 빌어본다.

이제 길을 떠나려 배낭을 꾸리자 선생은 방명화첩을 펼치며 붓 들기를 권한다. 나는 잠시 망설였으나 이내 아침에 올라본 둥글바위산, 그 바위산 벼랑에 걸린 노송이 떠올랐다. 온갖 비바람과 눈보라 속에서도 의연하게 기상을 잃지 않고 장엄하게 뻗어가는 소나무. 그 솔바람 속에 먹내음이 그윽한 작가의 생애를 기리며 나는 풍송(風松)을 남겼다. 저 들녘의 소나무(野松)와 바람속의 소나무(風松)는 늘 친애하리라.
그림·글 이호신 한국화가 lhs1957@lycos.co.kr

 
출처 : .. |글쓴이 : 너와집나그네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