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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케임브리지대 킹스 칼리지 연구실에서 7월 6일 만난 존 던 교수(왼쪽)는 3년 전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날카롭고 왕성한 정치
현실 분석을 보여줬다. 필자의 지도교수이자 은사인 그는 아시아 학생들을 따뜻하게 맞아주고 정성껏 지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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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는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주도적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성공한 정치체제의 중심에는 늘 민주주의가 자리한다.
그렇다고 민주주의가 인류의 이상이자 가장 바람직한 정치형태인가에 대해서는 견해가 엇갈린다. 세계화 시대에 민주주의가 단지 정치적 수사로 남지
않기 위해 민주주의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그 미래에 대한 관심이 요청되는 까닭이다. 민주주의에 관한 탁월한 연구를 해 온 존 던 교수를 만나
앞으로 민주주의의 과제와 방향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본다.
유서 깊고 고색창연하다는 명성을 가진 곳의 특징은 세상 변화의 기미를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미래'라는 주제를 안고 존 던(65) 교수를 만나러 간 케임브리지도 그런 변화의 여정에서 늘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는 곳이다. 다시 찾은 케임브리지의 시내에서는 새 건물을 짓는 공사가 한창이었고 예전엔 찾아보기 어려웠던 글로벌이라는 단어가 자주 눈에
띄기도 했지만, 강 건너 학교 쪽으로 들어서니 어느 하나 변한 게 없었다. 세계화 시대에 민주주의 역사의 한 장을 만들었던 곳에서는 변화하는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야기를 푸는 실마리로 '민주주의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의아심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민주주의는 정기적 선거를 통한 정부의 창출을 뜻하는 제도적 형태로 이해됐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의미로만 민주주의를
논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존 던 교수 역시 민주주의의 미래에 관한 대화의 시작으로 민주주의의 정의를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한때 민주주의로 불리는 것만으로 시민들의 정치적 지지를 얻을 수 있던 때가 있었다. 그 자체가 힘과 능력이 되던 때 말이다.
민주주의는 어떻게 인간이 정당한 방법으로 통치될 수 있는가를 설명해주는 근거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용어다. 그러나 21세기 다양한 형태의 정부
앞에서 민주주의는 절차적 과정을 의미하는 제도적 형태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올해 '민주주의에 관한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Setting the People Free'(사람들을 자유롭게 풀어주기)를 내놓은 던 교수에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를 알리는 일은
일종의 소명처럼 보였다. 던 교수가 민주주의의 의미를 새삼 강조할 때, 그가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을 강조하는 민주주의를 말하리라 필자는 예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던 교수는 정치 공동체에서 개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은 서로 충돌하는 내적인 모순을 지니기에 민주주의를 그런 도덕철학의 영역으로
보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비판한다. 민주주의가 자유와 자율성의 상호관계가 형성되는 조건에 관해
말하는 것은 아니므로, 정치학 대신 도덕철학이 있어야 한다는 아이디어 말이다. 이는 '반민주적' 이념이라고 그는 특유의 직설적 표현으로
강조했다.
"통치란 통치받는 사람들의 동의에 의해 정당화돼야 하며 정치적 권위의 정도와 지속성도 이들에 의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통치의 정당화 근거를 공식화하는 좋은 방식이다."
이어 던 교수는 그 좋은 방식의 가장 강하고
본질적인 장점은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결정을 할 수 있는 기회, 그리고 정부를 바꿀 수 있는 권한을 갖는 것이라 요약한다. 민주주의는 공동체의
의지에 반하여 공동체를 통치할 수 없다는 공동체와의 약속이라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통치의 정당성을 제시하는 정치적
담론이라는 점을 명확히 한 후, 이어지는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은 열정과 속도를 더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지금 보수와 진보가
이념적.정치적으로 날카롭게 대립.반목하고 있다. 유럽의 보수와 진보는 어떤 상황인가.
"유럽에서 보수와 진보의 대조는 프랑스
혁명을 통해서 나왔지만 그렇다고 어느 한쪽이 이기거나 지는 싸움은 아니다. 보수와 진보는 정치를 보는 두 방식이다. 진보 진영이 뚜렷한 경제적
아이디어를 지니고 있었을 때가 있었다. 어떻게 분배하느냐, 그리고 어떻게 생산체계를 조직하느냐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진보 진영의
경제적 실패로 인해 정치와 진보 이념을 지탱하는 현실적인 힘을 잃고 있다. 복지국가는 정치적으로 매력적인 답이지만, 후자에 관해서는 말하는 바가
없다. 배분 방식을 수정하는 것으로 생산체계 조직이 설명될 수는 없다. 또한 보수 진영도 지켜내야 할 어떠한 것을 갖고 있지 않다.
진보주의로부터 보수주의로의 급격한 전환은 단지 보수주의가 경제적 성공을 구가했다는 점에서만 설명할 수 있다."
던 교수 역시 유럽적
맥락에서 보수의 성공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것이 일본 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주장하듯이 자유민주주의의 일방적 우월성에 기인한 성공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진보진영, 사회주의 진영의 역부족으로 얻게 된 판정승이라는 얘기다.
-자유민주주의의 승리 분위기가 팽배해
있는 시점에서 이른바 세계화론자들이 제기하는 '민주주의 위기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경제적 지구화의 영향으로 국민국가의 힘이 쇠퇴하고
있으며 지구화를 주도하는 글로벌 행위자, 글로벌 거버넌스의 비민주적 구조로 인해 민주주의 위기론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위기는 진정 새로운
것인가.
"위기라고 지적한 양상들로 인해 특정 장소에서 특정 정부가 도전을 받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위기로
몰아가는 더 큰 원인이 있다. 개별 국민국가가 경제정책을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범위가 지난 50년, 100년 전에 비해 크게 줄어든 게
핵심이다. 그러나 어느 국내 경제도 50년 전처럼 사법적이고 강압적인 국가 권력을 통해 결정될 수는 없는 게 지금의 상황이다. 세계화란 보다
커지고 덜 방해받는 시장이 있다는 의미다. 이것이 누구를 위한 악재인지는 아직 말할 단계가 아니다."
-세계화가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적 결과를 야기하지 않는다면 세계화의 정치적 함의, 특히 민주주의에 대한 함의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세계화와 민주주의가
편한 관계는 아니다. 세계화에 따른 경제적 변화는 사람들에게 비용을 치르게 한다.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통해 자신의 견해를 말할 기회를 갖고
그것을 관철하여 이익을 보려 한다. 혜택 배분에 대한 논의가 민주적인 환경에서 더 잘 이뤄질 수 있음은 분명하다."
-지금껏
민주주의는 국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데에 관심을 두었다. 9.11 이후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민주주의의 세계적 확산'을 역설했을 때도 이는
개별국가의 민주주의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러나 세계화 시대 민주주의는 국가를 넘어 초국가 차원에서도 요구되고 있다. 지역연합이나 국제기구
등의 중요성이 훨씬 부각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문제는 더욱 절실하지 않을까.
"유럽연합(EU)은 유럽의 국제적 경쟁력을 키우고
유럽의 군사적 안전을 구축하고자 하는 '정치적 형식'으로서 오랫동안 지지받아 왔다. 단일 국가로서는 하기 힘든 일을 국가를 대신해서 유럽연합이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유럽이 연합하는 과정에 민주적 절차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자주 나왔다. 시민 대부분의 관점을 고려하지 않고 전문 정치인들이
주도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반발은 올해 네덜란드와 프랑스에서 유럽연합 헌법이 거부된 사례가 방증한다. 국민국가와는 다른 정치적 공동체로의
변화가 있다 할지라도 이는 시민들의 의지에 반하여 창출될 수는 없다."
존 던 교수와 인터뷰를 한 이틀 뒤, 영국 에든버러에서
열리고 있는 G8회담을 겨냥한 듯 런던 테러가 일어났다. 세계의 미디어들은 런던 테러의 성격을 찾기에 바빴다. 반세계화? 문명 충돌? 그러나
지구적 차원의 정치.경제도 보다 민주적인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미래를 이야기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존 던은
영국 케임브리지대 정치이론 교수다. 케임브리지대에서 40년 동안 봉직하면서
가나.인도.일본.미국의 주요 대학에서 강의했다. 영국 학술원 회원이며 학술원의 정치학 위원장을 지냈다. 아직까지도 널리 읽히는 존 로크 사상에
관한 저서를 20대 후반에 출간한 이래 지치지 않는 연구열로 많은 논문과 저서를 내놓았다. 주요 저서로는 '미래의 서구 정치이론''민주주의:
끝없는 여정''비이성의 교활함: 정치의 이해'가 있으며 올 초 'Setting the People Free'를 출판하였다. 여러 저서를 통해
그는 민주주의의 역사적 과정, 민주주의의 힘과 위약함을 밝히는 데 비판적 통찰력을 보여준다. 던 교수는 특히 정치적 실패를 겪거나 실패로부터
재기한 나라들의 다양한 정치에 관해 각별한 관심과 이해를 보이고 있다. 14대 대선에서 낙선한 후 케임브리지에 6개월 동안 머물렀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으로 한국 정치에도 깊은 관심이 있다.
이화용 교수는
경희대 NGO대학원 소속이다.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를 나와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으로 '지구화와 주권 그리고 민주주의의 미래', 공저로
'이상국가론'이 있다.
2005.10.29 05:20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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