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科學. 硏究分野

[21세기를 논하다] 5. 맥아더 동상 '반전' 메시지 새겨 보존해야

鶴山 徐 仁 2005. 11. 14. 17:11

21년 만에 만난 스승 글렌 페이지(左)는 '비폭력'에서 한걸음 나아간 '비살생' 이론으로 늙은 제자를 감동시켰다. 9월 14, 15일 이틀에 걸쳐 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 연구실에서 그와 나눈 얘기는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시급하면서도 유익한 충고로 들렸다.
세계 각국이 테러와 폭력으로 공포에 떨고 있다.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폭탄 테러, 프랑스 시위사태에서 무차별로 이뤄지는 방화 등 21세기 초에도 인류는 폭력 앞에 무기력하다. 인간이 인간을 향해 휘두르는 물리적 힘은 결국 증오와 보복의 악순환으로 피를 부른다. 글렌 페이지는 지난 30년 동안 비폭력의 가치를 역설하며 책과 강연으로 이를 널리 알려온 대표적 지식인이다.'비폭력과 비살생(非殺生)의 전도사'를 자임하는 그에게 폭력이 일상화한 오늘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을 물었다.

글렌 페이지(76) 교수를 다시 만났다. 엊그제 일 같은데 벌써 21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84년 당시 나는 하와이대 대학원 박사과정생으로 페이지 교수의 '비폭력 대안들'이란 강의를 들었다. "비폭력 사회는 가능한가"란 질문으로 시작된 강의였다.

그는 마키아벨리, 홉스, 로크, 마르크스, 베버에 이르는 기존의 근대 정치이론을 모두 폭력을 용인하는 이론이라고 비판했다. 나는 그의 주장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플라톤이 인류의 '이상국가'를 그리면서 폭력 전문조직인 군사계급을 포함한 것은 상상력 빈곤이라고 그는 지적했다. 자유주의나 사회주의를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모두 폭력을 용인한 이데올로기라고 그는 비판했다. 그러고 나서 강의실 밖으로 나가 함께 쓰레기를 줍는 비폭력 실습을 했던 일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오랜만에 다시 스승을 만난 제자는 한국의 현안부터 물었다.

"지금 한국에서는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 문제로 보수진영과 진보세력 간 치열한 공방이 오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는 한국의 기아차를 몰고 다니며 라디오로 매일 한국 소식을 듣고 있다.

"물론 모든 군인은 직업적인 살생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지상에 있는 모든 전쟁기념물을 다 뜯어 없애야 합니까? 아니지요. 그런 동상은 '인간이 비살생에 실패한 것을 상기시켜 주는 기념물'로 남겨두는 게 낫지요. 그 대신 우리는 다른 쪽에 인간의 살생에 반대했던 영웅의 동상을 또 세우면 됩니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했던 맥아더 장군은 중국 본토 폭격을 주장했던 모범군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55년 평화주의자로 바뀌어 전쟁을 반대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전쟁을 소멸시키지 않는 한 문명의 진보는 결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 지도자는 느림보입니다. 우리는 새롭게 생각해야 하고 새로운 이념과 개념을 취해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라는 꽉 막힌 제복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는 내용이지요. 맥아더장군 동상에 이 말을 새로 새겨넣어 교훈을 삼는 것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페이지 교수가 비폭력에 정열적이기 때문에 매우 급진적인 대답이 나올 것으로 생각했던 나로서는 한방 먹은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그가 일찍이 정치지도자의 '창조적 잠재력'에 유의하며 정치에 대한 리더십 접근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을 떠올렸다.

동시에 비폭력 정치이론이 폭력과 폭력적 현실에 대한 파괴적.부정적 접근이 아니라 인간의 비폭력적 잠재력과 가능성을 일깨우고 확장시키는 건설적.긍정적 접근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비폭력 리더십의 개발과 보급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좀 더 이론적인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은 어떠한 근거에서 비폭력 사회가 가능하다고 주장하시는 것이지요?"

대답은 명쾌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폭력과 살생을 인간의 피할 수 없는 본성으로 인식했지요. 또 그것을 상식으로 조장하고 합리화하는 문화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전쟁과 억압과 살생이 만연한 살벌하고 끔찍한 근대문명입니다.

앞으로 인류문명이 진정 '포스트모던'이 되기 위해서는 그동안의 문명이 폭력문명, 폭력을 용인하는 문명이었음을 깊이 인식하고 비폭력 사회 건설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나는 다음 세 가지 근거에서 인간은 비폭력적 존재이고, 또 비폭력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역사적으로 경험적으로 대부분 사람은 다른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 통계적으로 인류의 절반인 여성은 전투에서 살인자가 되는 경우가 매우 드물고, 남성도 소수만이 살생을 합니다. 군사훈련의 중요한 과제가 인간 심성 깊숙이 자리한 살인에 대한 저항감을 극복하는 것이라는 어느 군사전문가의 말은 인간이 타고난 살인자라는 가정을 뒤집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지상의 종교는 모두 '생명존중과 살생금지'의 가치를 공유하고 있지요.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는 '살인하지 말라'는 신의 계명을, 자이나교와 힌두교는 '비폭력은 생명에 관한 최고의 법'이란 계율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첫째 계율도 '살생을 금하라'이지요.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살인하지 않겠다는 종교적 신념은 사람을 죽여도 좋다는 정치적 명령과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타고난 동물적 본성 때문에 살인할 수밖에 없다는 가설은 과학적으로 오류입니다. 천적관계인 쥐와 고양이도 훈련받으면 사이좋게 지낸다는 실험이 보고된 지 오랩니다.

86년 세계의 많은 과학자가'폭력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인간의 폭력적 본성이 유전적으로 생성된다는 것, 인간이 공격적 성향으로 진화됐다는 것, 인간이 '폭력적인 두뇌'를 지니고 있다는 것 등은 모두 과학적으로 오류임을 일일이 지적했지요."

그는 자신의 비폭력 정치이론이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여러 분야의 이론적 탐구와 조사, 그리고 방법론적으로 얼마든지 뒷받침되고 있음을 설명했다.

"70년 이후 남아프리카공화국.미얀마.체코슬로바키아 등 세계 각지에서 있었던 비폭력 정치투쟁의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습니다. 프랑스혁명, 미국 독립혁명, 러시아혁명, 중국혁명 같은 기존의 폭력적 정치혁명과는 다른 비폭력 운동입니다. 비폭력 사회를 지향하는 운동은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사형제 폐지, 병역 거부, 군대 폐지, 비폭력적 민방위대 설립, 전쟁세 폐지, 핵무기와 대량살상무기 폐기, 지뢰 제거 운동 등이지요.

2000년 현재 73개국이 사형제를 폐지했고, 아르헨티나.브라질.이스라엘에서는 계엄이나 전쟁시를 제외하고는 일반범죄에 대한 사형제를 폐지한 지 오랩니다."

나는 과거 그의 연구실 벽에 나란히 걸려 있던 태극기와 인공기 그림 밑에 '살인은 그만(No More Killing)'이라고 쓰여 있던 것을 기억해 내고 다시 물었다.

"요즈음에는 비폭력(nonviolence) 대신 비살생(nonkilling)이란 용어를 더 자주 쓰시네요. 이유가 있나요."

"비살생이란 개념이 비폭력이나 평화 개념보다 훨씬 생생하고 구체적이기 때문입니다. 또 비살생은 비폭력보다 측정이 더 쉽지요. 죽은 사람의 숫자는 정확하게 셀 수 있잖아요. 그래서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데 유리합니다."

저녁 시간에 나는 페이지 교수의 비폭력 동지인 부인 글렌다와 해후했다. 부인은 페이지 교수의 간절한 소망을 말해 줬다. 적어도 21억 달러를 모아 비살생 연구와 교육을 전담 지원하는 재단을 설립하는 일이란다.

페이지 교수는 "인간이 비살생적임이 틀림없는 한, 그렇다면 우리가 직업이 무엇이든 세계의 모든 사람을 교육하고 훈련시켜 그들의 비살생 능력을 강화시키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내게 물었다.

폭력의 위협에 언제나 노출됐던 우리야말로 '비폭력-비살생'으로 가치전환을 이룰 수 있는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렌 페이지 교수는

현대 정치학자 가운데 비폭력 정치이론 분야의 최고 권위자이자 정책결정이론 전문학자로 꼽힌다. 프린스턴 대학 종신고용 교수를 지낸 뒤 67년 하와이대학으로 옮겨 정치 리더십을 강의했다.2002년 펴낸 '비살생 지구 정치학'(Nonkilling Global Political Science)은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24개국어로 번역되었고 한국어판도 곧 나올 계획이다. 그는 최근 몇 년 동안 세계 각지로 쉴새없이 비폭력 강연 여행을 하고 있다. 전쟁과 억압의 역사 속에서 폭력과 폭력의 용인이 일상화되었던 그간의 한국사회에서 그의 비폭력 정치이론은 냉대받은 감이 있다. 실제로 그는 유신시대 이후 김지하 시인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석방운동을 벌여 오랫동안 소위 '반한 지식인'으로 분류됐고 일부 한국인에게는 기피인사로 '낙인찍혀' 있었다.

정윤재 교수는

한국학중앙연구원(옛 정신문화연구원) 소속이다. 서울대 정치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하와이대에서 '정치 리더십의 메디칼 이론'을 주제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정치 리더십과 한국 민주주의' '다사리 공동체를 향하여-민세 안재홍 평전' 등이 있다.

2005.11.11 05:03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