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6월 아주 우연한 기회에 시작한 한 루마니아 할머니에 관한 다큐멘타리 작업이 KBS
<수요기획>(미르초유, 나의
남편은 조정호입니다)을 통해 방송되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1년이 흘렀고 나는 아직도 그 루마니아 할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고 있지 못하다.
어쩌면 북경 나비의 날개짓이 태평양 한가운데 커다란 허리케인을 일으켰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004년 2월 영화감독 박찬욱 선배 쪽에서 연락이왔다. 동문선배이기도 한 그는 영화 <올드보이>의
제작을 마치고 머리도
식힐겸 동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야 아주 기막힌 사연을 지닌 할머니가 한분있어..."
박찬욱 감독이 루마니아에서 아주 우연히 접한 그 할머니의 이름은 제오르제따 미르초유,
나이 70세. 1934년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태어나 1952년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그녀가
첫번째로 발령된 곳은 수도 부크레슈티에서 남쪽으로 100km 떨어진 시레뜨
‘조선인민학교’,
당시 18세였던 그녀는 이곳에서 북한인 청년교사 김명준(가명)을 만나 국경과 이념을 초월한
사랑에 빠진다.
사실 이들이 펼쳐나간 러브스토리에는 우리 현대사의 알려지지 않은 에피소드 한가지가 깔려있다.
바로 1952년부터 1959년까지
북한이 전쟁고아들을 루마니아를 비롯한 동구권 공산국가에
위탁교육시킨 사실이다. 당시 북한에서는 한국전쟁의 여파로 수많은 고아들이
발생했다.
하지만 이들을 수용하고 양육시킬 여건이 부족했던 북한당국은 사회주의 형제국으로 전쟁고아들을
위탁교육시킨다.
1952년 9월 3000명의 북한전쟁고아들을 이끌고 루마니아에 온 청년교사 김명준과 루마니아
여선생님의 만남은 이렇게 이뤄진
것이다.
현재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딸과 함께 살고 있는 그녀는 아직도 김명준과의 사랑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녀의 나이 이제 70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단 한번도 김명준이란 이름을 잊어본
적이 없다. 사랑을 잊지 않기 위해 그녀가 시작한 일은 한글공부, 오로지 혼자만의 힘으로
시작한 한글공부는 이제 ‘한국어-루마니아어 사전’으로 결실을 맺고 있다.
한 단어 한 단어 거북이처럼 시작한 그 일은 벌써
다섯박스 분량을 넘고 있다고 한다
“한국 말 쓸 때 준, 가깝습니다. 매일 생각합니다. 많이 사랑합니다…”
단어 하나에 사랑과, 단어 하나에 눈물과 단어 하나에 그리움을 담아가며 그녀는 최초의
한국어-루마니아어 사전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사실 1959년 그녀는 루마니아와 북한 당국의 정식결혼허가를 받고 평양으로 이주한다.
7년 동안의 숨죽이며 키워온 사랑이 결실을
맺고 평양에 신혼살림을 꾸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행복한 결혼시절은 오래가지 못한다. 딸 미란이 두살 무렵 칼슘부족으로 뼈가
구부러지는 병에 걸리고 결국 딸과 함께 루마니아로 일시 귀국한 이후 두 사람의 운명은
엇갈리고 만다.
하지만 그 배경에는 1960년대부터 일기 시작한 북한의 외국인배척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주체사상이 확립되어가던 시기이기도 했던
당시, 북한에서는 외국인과의 연락을 금하고
국제결혼한 부부 중에 강제 추방당한 외국인 아내와 남편들이 속출했다.
가족의 재회를 꿈꾸며 편지왕래로 마음을 달래던 두 사람은 1966년 편지를 끝으로 연락이
끊어져 있다. 이후 40년 넘게 그녀는
북한 당국은 물론이고 국제사회에 남편의 신변확보에
관한 탄원서를 무수히 올렸지만 북한당국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실종’이란 일관된
답변만을
유지하고 있다.
...............
원래 다큐멘타리스트들은 남이 모르는 사실, 남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현장에 접근할 때 희열을 느낀다. 그런 면에서 사실 이 작업은
나에게 적지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국전쟁 직후 해외입양을 통해 국내 고아문제를 처리했던 대한민국.
어쩌면 그동안 정치적 열등감으로 인해 북한 고아들의 사회주의권
위탁교육은
우리에겐 숨겨진 역사의 한 페이지였다.
그런 숨겨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찾아내고 직접 루마니아 기록필름보관소에서 어렵게
확보한
당시 고아들의 생생한 모습이 담긴 자료화면들을 가지고 귀국할 때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벅차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 짐짝만큼 커다란 짐도 안고 돌아와야 했다.
"이렇게 방송 나가면 우리 남편을 만날 수 있는 거죠..."
우리는 방송에 쓸 계획으로 통일부 홈페이지에 떠있는 '이산가족재회신청서'를 한부
가져갔다. 그리고 할머니가 직접 작성하는 모습을
촬영했다. 떠듬떠듬, 또박또박
한글로 남편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적어놓으면서 미르초유는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이 프로그램의 존재이유를
재확인시켜주었다.
"네...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우리는 돌아와서 통일부에 미르초유의 이산가족재회신청서를 접수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통일부의 답변은 간단명확했다.
"외국인은 접수할 수 없다"
.........................
통일부가 마련한 이산가족의 범주에는 외국인을 허용할 공간이 없다. 아니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이산가족'하면 의례 당연히
남과 북의 헤어진 가족을 떠올릴 수밖에 없으므로...
하지만 미르초유의 취재를 통해 우리는 러시아와 동유럽에 미르초유와 비슷한 처지를
지닌 또다른 할머니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미르초유, 나의 남편은 조정호입니다> 제작 1년을 맞이하면서
내가 지키지 못한 약속을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하겠다고 마음먹게된 이유는
어쩌면 나 안에 있다.
"정말 나는 무엇을 위해서, 또 누구를 위해서
방송을 제작하였는가..."
시청율에 죽고사는 것이 방송이라지만
방송만 나가면 어쨌든 제작비는 회수된다는 방송이지만
적어도 나는 <미르초유>의
방송 이후
단 1mm도 성장하지 못한 것같다.
난 또 이렇게 비겁한 변명도 늘어놔본다.
만약 이 프로그램이 독립외주프로덕션에 의해서 발굴되고 제작되지 않았다면
과연
어떠했을까 하고 말이다.
우리는 간혹 아이템이란 것을 넘기는 일도 있다.
더 파워풀한 기획과 집중도, 사회적 반향...이런 것들을
위해서
나는 이 아이템을 토스해야 되는 것은 아니었을까...
방송이 나간 후 몇달이 지나서
미르초유 여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네...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
난 정말 최선을 다했을까...?
지금부터 다시 곰곰히 따져봐야겠다
2005년 6월 6일
김덕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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