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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 文化參考

민족사 최고의 천하 名文

鶴山 徐 仁 2005. 10. 19. 15:34
이 름   조갑제 날 짜   2005년 10월 19일 수요일
(7)민족사 최고의 천하 名文
민족사 최고의 천하 名文

우리 민족사를 통틀어 최고의 명문을 꼽으라면 나는 서슴지 않고 671년 신라 문무왕이 唐將 薛仁貴에게 보낸 답신을 추천할 것이다. 이 글은 신라의 名문장가 强首가 썼던 것으로 보인다. 「答薛仁貴書」라고 일컬어지는 이 글이 명문인 것은 민족사의 결정적 순간에 쓰인 글이라는 역사적 무게 때문이다.

이 글을 통해서 우리는 삼국통일을 해낸 신라 지도부의 고민을 읽는 정도가 아니라 숨결처럼 느낄 수 있다. 그만큼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쓰였다.

이 글이 명문인 또 다른 이유는 복잡다단한 상황에서 국가이익을 도모하여야 하는 문무왕의 고민이 고귀한 지혜와 품격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檄文(격문)이 아니라 외교문서이다. 唐과 정면대결할 수도, 굴종할 수도 없는 조건에서 어떻게 하면 가장 작게 굽히면서 가장 많은 것을 얻을까 하는 계산에 계산을 거듭하여 만들어 낸 글이다. 너무 굽히면 唐은 신라 지도부를 얕잡아 볼 것이고, 너무 버티면 전성기의 세계 최대 제국이 체면을 걸고 달려들 것이다. 신라가 死活을 걸어야 할 균형점은 어디인가,

그 줄타기의 스릴을 느낄 수 있는 이 글은 삼국사기 문무왕條에 자세히 실려 있다.

이 글을 이해하려면 신라가 삼국통일을 해내는 과정에서 羅唐연합을 유지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수모를 겪어야 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唐이 13만 명의 대군을 보내 신라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킬 때의 의도는 분명했다. 그것은, 신라를 이용하여 백제·고구려를 멸한 다음엔 신라마저 복속시킴으로써 한반도 전체를 唐의 식민지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 의도를 신라도 알았다. 서로를 잘 아는 羅唐은 공동의 敵 앞에서 손을 잡은 것이었다. 공동의 敵이 사라졌을 때는 결판을 내야 한다는 것을 신라도, 唐도 알면서 웃는 얼굴로 대하고 있을 뿐이었다.

唐은 신라와 함께 백제 부흥운동을 좌절시킨 다음에도 이 옛 백제 땅을 신라가 차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唐은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하여 唐의 명령하에 백제 땅을 다스리게 했다. 문무왕이 반발하자 唐은 압력을 넣어 문무왕과 부여융이 대등한 자격으로 상호 불가침 약속을 하도록 했다.

唐은 망한 백제사람들을 이용하여 신라를 견제하는 정책으로 나온 것이다. 唐은 또 문무왕을 鷄林대도독에 임명하였다. 신라왕을 唐의 한 지방행정관으로 격하시킨 꼴이었다. 문무왕이야 속으로 피눈물이 났겠지만 고구려 멸망이 아직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다. 참아야 했다.

서기 668년 평양성에 신라군이 먼저 돌입함으로써 고구려가 망했다. 唐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안동도호부는 백제 땅을 다스리는 웅진도독부와 신라=계림도독부를 아래에 둔 총독부였다. 이 순간 한반도는 형식상 唐의 식민지로 변한 것이다. 金庾信·문무왕으로 대표되는 신라 지도부는 전쟁이냐, 평화냐의 선택을 해야 했다. 이들은 굴욕적인 평화가 아닌 정의로운 전쟁을 선택했다.

이때 만약 신라 지도부가 비겁한 평화를 선택했다면, 즉 唐의 지배체제를 받아들였다면 신라는 唐을 이용하려다가 오히려 이용당해 한반도와 만주의 삼국을 唐에 넘겨준 어리석은 민족반역 세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로 해서 우리는 지금 중국의 일부가 되어 중국말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평가는 후대의 것이고, 만약 평화를 선택했다면 신라 지도부만은 唐으로부터 귀여움을 받으면서 잘 먹고 잘 살았을 것이다.

문무왕의 위대성은 이런 일시적 유혹과 안락을 거부하고 결코 결과를 낙관할 수 없는, 아니 절망적인 것처럼 보인 세계제국과의 決戰을 결단했다는 점에 있다. 문무왕이 그런 결단의 의지를 담아 쓴 것이 바로 「答薛仁貴書」인 것이다.


문무왕의 자존심

서기 668년부터 2년간 신라 문무왕은 對唐 결전을 준비해 간다. 문무왕은 고구려 유민들이 唐을 상대로 부흥운동을 하는 것을 지원했다. 고구려의 劍牟岑(검모잠)이 遺民들을 데리고 투항하자 익산 지방에 살게 했다. 그 뒤 고구려의 왕족인 安勝을 고구려왕으로 봉해 그가 이 유민들을 다스리게 했다.

唐이 백제왕족을 웅진도독에 임명하여 신라를 견제한 그 수법을 거꾸로 쓴 것이다. 고구려 유민들을 이용하여 백제 독립운동을 꺾으려 한 것이다. 문무왕은 또 對日공작을 개시한다.

唐은 한반도를 안동도호부의 지배下에 둔 다음 일본에도 2000명의 병력을 보내 주둔시키면서 지배下에 두려고 했다. 문무왕은 일본의 신라系 도래인들을 움직여 壬申의 亂 때 일본의 天武天皇 세력을 지원, 親신라정권이 들어서게 만드는 데 성공함으로써 唐의 對日공작을 좌절시킨다. 天武天皇 이후 약 30년간 日本은 唐과의 교류를 거의 끊고 신라에 대규모 사절단을 보내 문물을 배워 갔다.

701년 天武가 반포한 大寶律令은 일본 고대 국가의 완성을 의미하는 「古代의 명치유신」인데 신라를 모델로 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동북아시아를 안정시켜 그 뒤 200여 년간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다.

670년 드디어 문무왕은 행동을 개시했다. 唐의 괴뢰국 행세를 하던 옛 백제지역 웅진도독부로 쳐들어가서 城과 땅을 차지하였다. 비로소 백제 땅이 신라 땅이 된 것이다. 671년 여름 신라군은 백제군을 도우려던 唐軍과 싸워 5300명의 목을 베고 장군들을 포로로 잡았다. 그 한 달 뒤 唐의 총관 薛仁貴가 서해를 건너와서 신라 승려 임윤법사를 통해 문무왕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편지엔 이런 구절이 있다.

<지금 왕은 안전한 터전을 버리고 멀리 天命을 어기고, 天時를 무시하고, 이웃나라를 속여 침략하고, 한 모퉁이 궁벽한 땅에서 집집마다 병력을 징발하고, 해마다 무기를 들어서 과부가 곡식을 운반하고, 어린아이가 屯田하게 되니 지키려도 버틸 것이 없고, 이는 왕이 역량을 모르는 일입니다. 仁貴는 친히 위임을 받은 일이 있으니 글로 기록하여 (황제에게) 아뢰면 일이 반드시 환히 풀릴 터인데 어찌 조급하고 스스로 요란하게 합니까. 교전 중에도 사신은 왕래하니 이렇게 편지를 보냅니다>

薛仁貴는 과부와 어린이까지 동원되는 擧國一致의 단합으로 세계 최강의 제국과 정면대결하는 신라의 처절한 모습을 전하고 있는 셈이다.

이 편지에 대한 긴 答書의 서두에서 문무왕은 약속을 어긴 것은 唐임을 지적하면서 시작한다. 전쟁의 명분이 신라 측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신라는 善의 편이고 唐이 도덕적으로 결점이 많다는 것을 확실히 한 때문에 이 답신의 권위가 처음부터 잡힌다.

<唐 태종은 先王(태종무열왕)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것이 아니니 내가 양국을 평정하면 평양 이남과 백제의 토지를 모두 너희 신라에 주어 길이 안일케 하고자 한다」고>

문무왕은 백제를 멸망시키고 부흥운동을 토벌할 때 신라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음을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先王(무열왕)이 늙고 약해서 행군하기 어려웠으나 힘써 국경에까지 나아가 나를 보내어 唐의 대군을 응접하게 하였던 것이오. 唐의 수군이 겨우 강어귀에 들어올 때 육군은 이미 대적을 깨뜨리고 나라를 평정하였습니다. 그 뒤 漢兵(唐兵을 의미함) 1만 명과 신라병 7000명을 두어 지키게 하였는데 賊臣 福信이 난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이 군수품을 탈취하고 다시 府城을 포위하니 거의 함락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내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적의 포위를 뚫고 사면의 敵城을 모두 쳐부수어 먼저 그 위급을 구하고 다시 군량을 운반하여 드디어 1만 명의 漢兵으로 하여금 虎口의 위난을 면케 하였고, 머물러 지키는 굶주린 군사로서 자식을 서로 바꾸어 먹는 일이 없게 하였던 것이오.

웅진의 漢兵 1000명이 적을 치다가 패배하여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였으니 웅진으로부터 군사를 보내달라는 청이 밤낮을 계속하였소. 신라에서는 괴질이 유행하여서 兵馬를 징발할 수 없었어도 쓰라린 청을 거역하기 어려워 드디어 많은 군사를 일으켜서 周留城을 포위하였으나 적은 아군의 병마가 적은 것을 알고 곧 나와 쳤으므로 병마만 크게 상하고 이득없이 돌아오니 남방의 여러 성이 일시에 배반하여 복신에게로 가고 복신은 승세를 타고 다시 府城을 포위하였소. 이로 인하여 곧 웅진의 길이 끊기어 소금·된장이 다 떨어졌으니 곧 건아를 모집하여 길을 엿보아 소금을 보내어 그 곤경을 구하였소>


「당신네의 血肉은 우리 것이오」

671년 문무왕의 答薛仁貴書는 계속된다.

그는, 신라가 백제 지방에 주둔한 唐兵과 고구려 원정 唐軍에 대한 군량미 수송의 2중 임무를 어떻게 수행하였는가를 사실적으로 적고 있다.

<6월에 先王이 돌아가서 장례가 겨우 끝나고 상복을 벗지 못하여 부름에 응하지 못하였는데, (황제의) 勅旨에 신라로 하여금 평양에 軍糧을 공급하라고 하였소. 이때 웅진에서 사람이 와서 府城의 위급함을 알리니, 劉德敏 총관은 나와 더불어 상의하여 말하기를, 『만역 먼저 평양에 군량을 보낸다면 곧 웅진의 길이 끊어질 염려가 있고, 웅진의 길이 끊어지면 머물러 지키는 漢兵이 적의 수중에 들어갈 것입니다』라고 하였소.

12월에 이르러 웅진에 군량이 다하였으나 웅진으로 군량을 운송한다면 勅旨를 어길까 두려웠고, 평양으로 운송한다면 웅진의 양식이 떨어질까 염려되었으므로 노약자를 보내어 웅진으로 운송하고, 강건한 精兵은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으나 웅진에 군량을 보낼 때 路上에서 눈을 만나 人馬가 다 죽어 100에 하나도 돌아오지 못하였소.

劉총관은 김유신과 함께 군량을 운송하는데 당시에 달을 이어 비가 내리고 풍설로 극히 추워 사람과 말이 얼어죽으니 가지고 가던 군량을 능히 전달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평양의 대군이 또 돌아가려 하므로 신라의 병마도 양식이 다하여 역시 회군하던 중에, 병사들은 굶주리고 추워 수족이 얼어터지고 노상에서 죽는 자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소. 이 군사가 집에 도착하고 한 달도 못 되어 웅진 府城에서 곡식 종사를 자주 요청하므로 前後에 보낸 것이 수만 가마였소.

南으로 웅진에 보내고 北으로 평양에 바쳐 조그마한 신라가 양쪽으로 이바지함에, 인력이 극히 피곤하고 牛馬가 거의 다 죽었으며, 농사의 시기를 잃어서 곡식이 익지 못하고, 곳간에 저장된 양곡은 다 수송되었으니 신라 백성은 풀뿌리도 오히려 부족하였으나, 웅진의 漢兵은 오히려 여유가 있었소. 머물러 지키는 漢兵은 집을 떠나온 지 오래이므로 의복이 해져 온전한 것이 없었으니 신라는 백성들에게 勸課하여 철에 맞는 옷을 보내었소. 都護 劉仁願이 멀리 와서 지키자니 四面이 모두 적이라 항상 백제의 침위가 있었으므로 신라의 구원을 받았으며, 1만 명의 漢兵이 4년을 신라에게 衣食하였으니, 仁願 이하 병사 이상이 가죽과 뼈는 비록 漢나라 땅에서 태어났으나 피와 살은 신라의 육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오>

「당신들 唐軍의 皮骨은 당나라 것이지만 당신들의 血肉은 신라 것이오」라고 부르짖듯이 말한 문무왕의 이 대목이야말로 신라가 온갖 고통과 수모를 견디면서 삼국통일의 대업을 위해 희생했던 심정을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문장이 答薛仁貴書의 한 클라이맥스이다.

신라가 백제지역 주둔 唐軍과 고구려 원정 唐軍에게 동시에 군량미를 공급하기 위하여 노약자까지 동원하여야 했던 상황에 대한 묘사는 르포 기사를 읽는 것처럼 생생하다. 이런 고통을 지배층과 백성들이 장기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신라 사회의 내부 단결이 잘 유지되었다는 것이 증명된다. 唐은 신라 지배층 내부의 분열을 기다렸으나 일어나지 않았다.

신라가 對唐 결전을 통해서 삼국통일을 완수할 수 있었던 데는 내부 단합과 이에 근거한 동원체제의 유지가 결정적 요인이었다. 신라의 승리는 정치의 승리인 것이다. 지도층의 솔선수범과 명예심, 다양한 구성원의 통합, 특히 軍官民의 일체감이 장기간의 통일전쟁 중에서도 신라의 체제를 지켜냈다.


수모를 참고 견딘 이유는

문무왕이 피를 토하듯이 쓴(문장가 强首의 대필인 듯) 答薛仁貴書에는 그동안 신라가 唐과의 연합을 위하여 참았던 굴욕을 털어놓고 쌓인 울분을 품위 있게 드러내는 내용들이 많다. 신라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모욕을 참아낸 것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唐의 힘을 빌린 다음에 보자는 스스로의 기약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참다운 승리는 굴욕을 참아낸 뒤에 온다는 것을 보여 주는 글이다. 문무왕은 唐이 개입하여, 망한 백제와 흥한 신라가 억지 會盟하도록 한 상황을 실감 있게 설명한다.

서기 663년 倭는 국력을 총동원하여 3만 명의 해군을 함선에 실어 보낸다. 이 대함대는 백제부흥운동을 돕기 위해 파견된 것인데 역사적인 白村江(지금의 금강)의 해전이 벌어진다. 문무왕의 편지는 이 상황을 묘사해 주는 귀중한 기록이다.

<총관 孫仁師가 군사를 거느리고 府城을 구원하러 올 때 신라의 병마 또한 함께 치기로 하여 周留城 아래 당도하였소. 이때 왜국의 해군이 백제를 원조하여 왜선 1000척이 白沙에 정박하고 백제의 精騎兵은 언덕 위에서 배를 지켰소. 신라의 날랜 기병이 漢의 선봉이 되어 먼저 언덕의 陣을 부수니 주류성은 용기를 잃고 드디어 항복하였소. 남방이 이미 평정되었으므로 군사를 돌이켜 北을 치자 任存城 하나만이 고집을 부리고 항복하지 않기에 양군이 협력하여서 하나의 城을 쳤으나 굳게 지키어 항거하니 깨뜨리지 못하였소.

신라가 돌아가려는데 杜大夫가 말하기를, 『勅旨에 평정된 후에는 함께 맹세하라고 하였으니 임존성만이 비록 항복하지는 않았다 해도 함께 회맹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신라는 『임존성이 항복하지 않았으니 평정되었다고 할 수 없으며 또 백제는 간사하고 반복이 무상하니 지금 서로 회맹한다 해도 뒤에 후회할 것이다』고 하여 맹세를 정지할 것을 주청하였소.

麟德 원년(664)에 (唐 고종이) 다시 엄한 칙지를 내려 맹세치 않을 것을 책망하므로 곧 熊領으로 사람을 보내어 단을 쌓아 서로 회맹하고 회맹한 곳(지금 公州市의 就利山)을 양국의 경계선으로 삼았소. 회맹은 비록 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감히 칙지를 어길 수 없었소>

唐은 망해 버린 백제를 唐의 직할로 하여 신라와 형제의 맹세를 하게 한 것이다. 신라로서는 敗者와 勝者를 같이 취급하는 唐의 정책에 이를 갈았지만 후일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문무왕은 편지에서 신라군이 668년에 평양성을 함락시켜 고구려를 멸할 때도 선봉에 섰던 사실을 설인귀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唐의 체면을 세워 주면서도 이겨야 했던 전쟁

<蕃漢의 모든 군사가 蛇水에 총집합하니 南建(연개소문의 아들)은 군사를 내어 한번 싸움으로써 승부를 결정하려고 하였소. 신라 병마가 홀로 선봉이 되어 먼저 대부대를 부수니, 평양 城中은 사기가 꺾이고 기운이 빠졌소. 후에 영공(英國公 李勣)은 다시 신라의 날랜 기병 500명을 취하여 먼저 성문으로 들어가 드디어 평양을 부수고 큰 공을 이루게 된 것이오>

문무왕은 신라의 공이 큼에도 唐이 신라 장병들에게 상을 주지 않고 박대한 것을 조목조목 비판한 뒤 신라가 갖고 있던 비열성을 唐이 빼앗아 고구려(멸망한 뒤 唐이 다스리고 있던)의 관할로 넘겨 준 것이라든지, 백제의 옛땅을 모두 웅진도독의 백제사람들에게 돌려 주라고 압력을 넣은 것, 그리고 이제 와서 군사를 보내어 신라를 치려고 하는 사실들을 들어 이럴 수가 있느냐고 공박한다.

<이제 억울함을 열거하여 배반함이 없었다는 것을 기록하는 것이오. 양국이 평정되지 않을 때까지는 신라가 심부름꾼으로 쓰이더니 이제 敵이 사라지니 요리사의 제물이 되게 되었소. 백제는 상을 받고 신라는 죽음을 당하게 생겼소. 태양이 비록 빛을 주지 않을망정 해바라기의 본심은 오히려 태양을 생각하는 것이오. 청컨대 총관은 자세히 헤아려서 글월을 갖추어 황제께 말씀드리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