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식 불우이웃돕기
朴대통령은 정책을 통해서 서민들을 도왔을 뿐
아니라 언론보도나 정보보고를 통해서 알게 되는 불우한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많이 도왔다. 이럴 경우는 알리지 않고 했다. 원호처장을 지낸
朴基錫씨가 보관하고 있는 대통령 친서 하나. <朴基錫 처장 귀하. 전주시 고사동 1가463 蔡윤석 준위(예) 가족에게 생활비로
보내주시오. 정기예금을 하면 月이자가 5000원 정도 나올터이니 그러한 방법이 여하할는지? 외부에는 보도가 되지 않도록 조치하시기 바랍니다.
박정희> 蔡준위는 5.16군사혁명 때 참가한 공수단 출신이었다. 일찍 사망하여 가족들이 고생한다는 이야기를 대통령이 듣고 금일봉을
보내면서 쓴 편지였다. 朴대통령은 금일봉의 사용방법까지 생각해서 보냈다. 朴基錫 처장에서 어느 날 밤 10시쯤 박대통령이 전화를 걸었다.
6.25 때 국군이었던 남편을 잃고, 월남전에서 아들마저 잃은 신복진이란 여인을 도와주라고 지시했다. 그 다음날 대통령은 위로금과 친서를 동봉한
봉투를 朴처장에게 보냈다. <원호처장 귀하. 청룡부대 고 조기환군의 모친 신복진 여사의 입원비조로 사용해주시고, 신 여사가
퇴원하거너 전지요양을 할 정도가 되면 생계문제에 대하여 대책을 세우시면 나도 가능한 조력을 하겠습니다. 박정희>
“폭탄
피했다가 다시 일해야 합니다”
朴대통령은 월간경제동향보고회가 끝나면 꼭 표창 받은 새마을 지도자 및 모범 근로자들과 식사를 함께
하면서 실무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1975년 5월8일 경제기획원에서 있었던 대화를 소개한다. *朴대통령: (국제화학 梁正模 사장에게)
요즈음 수출이 어떻습니까? *梁사장: 어렵습니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습니다. *대통령: 조업단축은 안하시오? *梁사장: 직공이
많아 오더가 없으면 운영이 곤란합니다. 그러나 조업단축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통령: 손해 볼 때는 적자를 내더라도 조업단축을 하지
말고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 다음 경기가 좋아진 뒤에도 종업원이 열심히 일할 게 아니겠습니까? 梁사장, 金여사 같은 장기근속
사원에겐 아파트 같은 것이나 마련해주시오. 지금 셋집에서 산다는데 나하고 梁사장하고 반반씩 부담하여 아파트 한 칸 사줍시다. *梁사장: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통령: 사업가들이 요즈음 공산주의자들이 쳐들어온다고 동요하지 않나요? *梁사장: 그렇지 않습니다.
*대통령: 우리는 폭탄이 떨어질 땐 잠시 피했다가 다시 공장에 들어가 생산하는 정신으로 일해야 합니다.
朴대통령이 이들과
나눈 대화록을 읽어보면 수치가 많이 들어간 실무적 이야기가 主이다. 대통령이, 관념적인 헛소리가 일체 생략된, 생활과 밀착된 대화를 서민들과
나눌 수 있었다는 것은, 지식인들이 본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의 유신시대가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1975년10월6일 월간경제동향보고회 직후의
대화이다. *대통령: (대한전선선공장기술부) 金松씨는 월소득이 얼마나 됩니까? *金: 11만7000원입니다. *대통령: 세금
떼고 그렇게 됩니까? *金: 집에 들여가는 것은 8만원 정도 됩니다. *대통령: 11만원이면 정부관리로 어느 급일까? *金龍煥
재무장관: 국장급의 2갑3호봉을 기준으로 할 때 11만700원입니다. *대통령: (완도군 새마을 지도자 田宰眞씨에게) 가족은 얼마나 되며
섬에서 생활하는데 생활비가 얼마 듭니까? *田: 식비, 부식비 빼고 여섯 식구가 3만원 듭니다. *대통령: 田 지도자의 연간소득은
얼마입니까? *田: 200만원 정도입니다. *대통령: (완도군수에게) 완도군에 소득이 100만원 넘는 부락이 몇 개며 140만원은
언제 넘어서겠소? *군수: 100만원 넘는 부락은 네 개이고, 자립마을은 78년에, 기초마을은 81년에 가면 140만원이 넘겠습니다.
朴대통령은 한 농민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을 때 가장 기뻤을 것이다. “지금 농촌은 옛날과 많이 달라졌습니다. 옛날에는
100원 있으면 100원을 보태서 200원을 쓰려고 했는데, 요즘은 50원이 있으면 50원을 더 벌어서 100원을 만들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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