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쿠바는 그들이 라틴 아메리카를 지배하는데 있어서
고양이 목의 방울처럼 상당히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었다. 그 쿠바의 중심에는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동생 라울, 그리고 체 게바라가
있었다. 미 CIA는 그중에서도 피델과 체 게바라에게 상당히 위협을 느꼈던 것 같다. 일례로 피델 카스트로 한사람에 대해 무려 8번에
걸친 암살을 기도했지만, 실패한 것과 체 게바라 한사람의 게릴라를 잡기 위해, 당시 최고의 정보기관 CIA가 총력을 기울였고,
미국이 자랑하는 특전대 그린베레의 게릴라전 특별 고문관들까지 파견한 것으로 보아 미국이 이 두사람에게 얼마나 큰 부담을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체 게바라에 대한 CIA의 보고서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는 두사람의
듬직한 동지를 가지고 있다. 한사람은 혁명의 도끼 역할을 하는 라울이고, 또 한사람은 그의 머리 역할을 하는 체 게바라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체 게바라는 하루 속히 제거 되어야 한다. 그가 쿠바의 카스트로에 두뇌로 건재하고 있는 한, 미국은
언젠가 그로 인해 재앙을 맞을 것이다." 미국이 체 게바라 문제로 골치를 썩고 있는 와중에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미국은 게릴라 중 두
사람의 변절자 덕분에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게릴라가 있는 곳을 알아낸 것이다. 명령은 간단했다. 즉시,
사살하라...... 두 사람의 변절자 바레라와 로카바드는 볼리비아 군대에서 게바라에 대해 아는 것을 전부
불어버렸다.
4월, 볼리비아군은 본격적으로 '게릴라 사냥'을 시작했다. 그 주역들은 2천명 이상의 병사와 대게릴라전
미국인 특별고문관들(그린베레), 그리고 CIA의 앞잡이들이였다. 게바라는 게릴라전에 관한 논문 <게릴라전-하나의 방법>을
쓰면서 연구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실패의 원인은 다른 데 있었는데, 그것을 미처 예측할 수 없었다.
그 실패의
원인이란 1. 아직 군대와 싸울 준비가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 발견되어 버렸다. 2. 볼리비아의 민중은 쿠바의 민중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이것은 게바라의 큰 오산이었다. 3. 당시 지극히 미약한 상태였던 게릴라 활동에 미국의 CIA와 그린베레가
개입하리란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 4. 볼리비아 공산당(비합법이어서 지하활동만 하고 있었음)의 지원이 없어, 도시와 연대가
이루어지지않아 통일전선 구축에 실패한 게릴라는 고립되어 있었다. 5. 당시의 볼리비아는 혁명적 조건이 성숙되지 못했다. 예를들어
바티스타 같은 독재자도 없었고, "7.26운동연합" 같은 조직이 결성돼 있지도 않았다. 체 게바라는 마지막 일기에서 상황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정부군이 게릴라를 추격하고 있음, 쿠바와 연결이 안됨, 라 파스와 연락이 두절됨,
볼리비아농민의 협력이 없음, 게릴라 내에 환자 속출, 식량 부족, 천식재발에 대한 초조함, 윤리의식의 저하, 부대가 둘로
갈라져 전투에 임했으나 한쪽이 전멸. (나머지 절반도 호아킨이 지휘하는 부대와 연락이 두절됨)"
8월 31일, 볼리비아군은
게릴라들이 당일 오노라트 로하즈라는 농부의 집으로 간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로하즈는 엘 이에소의 얕은 곳으로 마시쿠리강을
건너도록 게릴라를 안내할 예정이었다. 한달전, 게바라는 로하즈의 아이들을 치료해 준 적이 있었다. 결국 로하즈는 배신을
했다. 호아킨의 게릴라 부대가 얕은 내를 건너기 시작할 때, 매복해 있던 정부군은 집중 사격을 가했다. 순식간에 열 명의
게릴라가 쓰러졌다. 그중 오직 한 사람 파코만이 살아 남았다. 게바라의 일기와 볼리비아 군인들과 행동을 같이 했던 볼리비아인
저널리스트 호세 알카사르의 기록에 의하면 게바라부대는 겨우 달아났음에도 불구하고, 탈출에는 실패하여 결국은 다시
포위되었다. 게릴라는 둘로 나뉘어 행동했다. 게바라의 부대와 호아킨의 부대로 게릴라를 나눈 게바라는 그의 부대를 이끌고
고군분투하고 있었지만, 2000명 이상의 병력과 20여명의 게릴라는 너무 큰 전력차가 있었다. 체 게바라가 아무리 게릴라전의
귀재라 할지라도 역부족이었다.
3월 3일 : 게릴라, 매복하여 정부군을 기다림. 군측 7명 사망, 4명 부상, 10명
생포. 게릴라들은 야영지를 떠남. 4월10일 : 이리피티에서 군과 전투. 군병사 10명 사망, 6명 부상, 쿠바인 게릴라 루비오
전사. 4월20일 : 정부군을 속이기 위해 무유팜파로 내려감. 그곳에서 일행과 떨어져 있던 드브레와 브즈토스 두 사람이
체포됨. 게릴라는 길을 바꿈. 4월25일 : 정부군과 전투. 쿠바인 롤란도와 군측 병사 2명 사망. 항공부대가 지역 전체에 폭탄
투하. 5월 8일 : 매복하여 정부군을 기다림. 정부군 수색대 병사 3명 사망, 포로 10명(후에 즈봄만 석방). 게릴라 전원
병에 걸림. 5월30일 : 매복, 수색대 병사 3명 사망. 5월31일 : 다른 장소 매복, 수색대 병사 2명 사망. 6월26일
: 군과 전투, 수색대 병사 4명과 게릴라 도우미 사망. 게릴라 전체 인원은 24명이 됨. 7월20일 : 다른 그룹에 의한 매복.
군병사 4명과 게릴라 1명 사망. 7월27일 : 정부군과 전투. 4명 사망. 7월30일 : 군과 전투. 게릴라 라울 전사, 3명
부상, 군병사 6명 사망. 부상자가 속출하지만 약이 없었다. 8월26일 : 정부군과 전투. 사상자 없음. 8월31일 :
후위부대의 와나로 후퇴. 호아킨외 8명의 게릴라 전사. 9월26일 : 게릴라(게바라가 이끄는 그룹)에 대한 정부군의 매복 공격.
게릴라 2명 전사, 캄바와 레온은 적의 포로가 되었다. 10월6일 : 계곡에서 게릴라는 정부군 1천 8백명에게 포위됨. 도망갈 길이
없었다. 10월8일 : 운좋게 탈출한 세 명의 게릴라 중 한 사람이었던 베니그노는 게바라의 최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볼리비아 군은 우리를 발견했다. 촌장이 정보를 제공했던 것이다.
촌장은 마을의 한 노파와 사원의 경내에서 감자를
파는 그의 아들 두 사람에게서 우리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던 모양이다. 병사들이 산의 계곡에 배치되었다. 정부군은 우리가
그들에게 유리한 지점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우리는 그날 오전, 2시 반에 이동하기로 했다. 환자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두 시간의 착오가 생겼다. 잠에서 깬 게바라는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몸은 어떠냐고 물었다. 내게 어디
아픈 곳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정찰에 나갈 수 있겠느냐고 묻고는 '이 부근 전체를 정찰해 주었으면
좋겠네. 특히, 오른쪽에 있는 산을 말이야' 라고 말했다. 전투가 벌어질 경우를 대비하여 파쵸를 동반했다. 나는 그때, 한쪽
손밖에 쓸 수 없었다. 백미터 정도 나아가 전방의 구릉을 살피기 위해 덤불에 몸을 숨겼다. 그때 파죠가 구릉위에 서있는 한 사람을
발견하고, '저기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목동인가 했지만, 목동이 나오기에는 너무 이른 시각이었다. 그때가 아침
6시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보초병의 행동으로 보였다. 이윽고 구릉의 전체에 걸쳐 차례차례로 병사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캠프로 돌아와
게바라에게 전했다. '최악이다. 저 구릉 전체에 적이 깔려 있다.'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좋다. 오른쪽 계곡으로 나가서 적어도
오늘 하룻동안만이라도 발견되지 않도록 하자. 밤이 되면 봉우리를 넘어 포위망을 뚫고 탈출한다.' 계곡에는 숨을 곳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위장을 하였다. 봉우리는 5백미터 정도 앞에 있고 그곳에 군인들이 있는 것이다. 게바라는 모두를 격려하면서 방어체제를
조직하고, 탈출경로를 지시하고 흩어졌다가 어느장소에 재집결할 것인가도 결정했다. 계곡의 입구에 안토니오를 지휘관으로 하여
파쵸, 아르투로, 윌리가 복병으로 배치되었다. 계곡의 깊은 곳은 폼보와 나토, 우르바노가 맡았다. 계곡의 바위 근처에 나무
한 그루가 서있었는데 게바라는 나에게 그리고 가라고 했다. 내 위치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지만, 지시한
그곳은 적군의 움직임을 잘 관찰할 수 있는 유리한 장소였고, 공격을 받을 경우 탈출지점으로도 용이했기 때문에 가야만 했다. 아침
8시, 나는 인티와 다리오의 도움을 받아 그곳으로 갔다. 그리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아침 11경, 군대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리
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에 나에게로 다가온 게바라에게 보고했다. 곧 우리의 말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지점에까지 적이
바짝 다가왔다. 우리는 나무 뒤쪽에 몸을 숨겼다. 나무는 둥치는 곧았고 뭄을 숨기기에도 매우 작은 은폐물이었다. 게바라가 있는
곳에 윌리와 함께 몸을 감추고 있던 아니세트와 엘나토가 폼보와 우르바노가 있는 쪽으로 파견되었다. 폼보 등을 게바라가 있는 쪽으로
다시 집결시키기 위해서였다. 아니세트가 계곡의 중앙으로 한발자욱씩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언덕 위의 병사들에게 발견되어
버렸다. 그는 즉시 사살되었다. 그리고 나서 총격전이 시작되었다. 오후 1시 반 경이었다. 다른 동지들이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인티와 다리오 그리고 나 세사람은 높은 위치에 있었으므로 적을 쏠 수 있었지만, 나머지 동지들은 낮은 곳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에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적들을 미처 볼 수가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다른 동지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른 채 우리는 총격전을 계속했다. 적군 5명 사망, 부상자 6명 발생. 오후 늦게 폼보가 우르바노와 엘 나토와 함께
우리들이 올라왔던 지점으로 계곡을 건너오려고 했다. 우리는 몸짓으로 그렇게 하면 전멸할 것이라고 필사적으로 전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어두워지길 기다리면서 우리가 내려갈 때까지 숨어있었다. 우리가 모두 다시 집결했을 때, 폼보가 '게바라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우리도 동시에 그들에게 반문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게바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시한 집합장소
어디에서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배낭과 발자국이 남아있어서 부상당했을 것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더 멀리 떨어진 집합장소로
갔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 "봉우리를 넘어서 라 이게라 시가로 돌아가려 할 때
한바탕 총격전이 벌어졌으나 그 이후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우리는 라 이게라시가에서 6백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관목지대에 몸을
숨겼다. 아침 9시 반 경, 마을 쪽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11시 쯤 다시 몇 발의 총소리가 더 들려왔다. 후에 그것이 윌리와
엘치노, 또 체 게바라를 살해하는 총소리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체 게바라"의 최후
무릎 꿇고 살기보다는 서서 죽겠다 - Che
Guevara
입회인으로서 체 게바라의 총살을 목격했던 사람은 두 사람의 저널리스트, 볼리비아인 알카사르와 프랑스인 레지
드브레였다. 그들의 증언에 의하면 체 게바라는 부상당한 상태에서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함께 붙잡힌 사람은 볼리비아인 광부 윌리와
시몬 쿠바였다. 10월 8일 오후 세시 반 경이었다. 10월 9일 11시15분, CIA는 게바라를 총살하기로
결정했다. 볼리비아군은 총살을 집행하기 위해 하사관 세 사람을 불렀다. 그들은 그 중 마리오 테란을 선택했다. 테란은 차분히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체 게바라를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테란은 분노에 불타는 체 게바라 의 눈빛에서 자신이 임무를
완수할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그 때 체 게바라는 그가 일을 끝낼 수 있도록 격려한다. "쏴! 겁내지 말고! 방아쇠를
당겨!" 감히 체 게바라를 쏘지 못했던 심약한 볼리비아 병사는 오후 12시가 되고, 술까지 한잔 한 상태에서 방아쇠를 당겼다.
그 직후 다시 다른 볼리비아 군인 페레스 중위가 확인사살로 게바라의 목에 총을 쏘았다. 후일 마리오 테란은 라파스의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쫓겨 다니다가, 1968년 4월 자신이 살던 집 4층에서 투신자살했다.
체 게바라의 사살을 확인하기 위해 미 국방부와 CIA는 총력을 기울여 움직였다. 여기서,
그의 사형에 대한 미 국방부와 CIA의 보고서 내용을 일자별로 잠시 요약해 보겠다.
미국방부 기밀 문서 1967년 4월
28일 미국 정부는 게바라의 게릴라부대를 볼리비아에서 제거하기 위해 파나마에 있는 미 8사단의 특수부대 소속 그린베레
16명의 최정예 요원과 CIA 전문가들을 파견하여 볼리비아 제2보병대대를 훈련시키고 체 게바라를 제거하겠다는 내용.
백악관
기밀문서 1967년 5월 11일 메모 형식의 이 보고서는 미대통령에게 체 게바라의 행적을 CIA가 계속 추적하고
있으며, 대통령에게 그가 어디에 있는지를 계속 인지시켜주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백악관 기밀문서 1967년 10월
9일 존슨 대통령에게 보내는 메모로 볼리비아부대가 체 게바라를 사살했다는 미확인 정보 내용.
백악관 문서 1967년
10월 10일 1967년 볼리비아 부대의 보고 내용으로 볼때, 10월 8일의 공세에서 체 게바라가 게릴라 희생자들 사이에
있다는 확신을 할 수 없다는 내용.
백악관 보고서 1967년 10월 11일 이 보고서에서 Walt Rostow는 존슨
대통령에게 99%의 확신을 가지고, 체 게바라가 지난 전투에서 사살되었음을 확신한다고 보고한다. 또한 미국에 16명의 그린베레
최정예 요원들에게 훈련받은 볼리비아 제 2보병대대가 그를 코너로 몰았고, 그리고 그를 사살했음을 보고한다.
미 국무부
보고서 1967년 10월12일 체 게바라의 죽음이 라틴아메리카와 미국 그리고 소련에 미칠 중요한 의미를 중심으로 지역 전문가가 만든
보고서이다.
백악관 기밀문서 1967년 10월13일 백악관은 체 게바라가 제거 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는 정보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정보국 CIA 기밀문서 1967년 10월 17일 CIA가 1966년 9월부터 1967년 6월까지 수집한
쿠바와 소련사이에 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혁명활동에 대한 불화와 이견에 대해 본국에 보내는 보고서이다.
볼리비아 주재
미 대사 핸더슨의 보고서 1967년 10월 18일 볼리비아주재 미 대사인 핸더슨이 본국에 보내는 체 게바라의 죽음에 관한
보고서로써 체 게바라는 확실히 사살되었으며, 그 증거로 CIA요원의 감시 아래 두 손목을 잘랐으며, 시신은 비밀리에 빌라그란데 근처의
활주로에 매장 되었음을 보고한다. 볼리비아 제2보병대대의 훈련경과와 활동, 체 게바라의 체포에 관련된 모든 사항을 상세히 기술한
보고서이다. 특히 마지막으로 체 게바라를 쏜 볼리비아 병사의 보고가 흥미롭다. 체 게바라가 그에게 한 마지막 말은 "Know
this now, you are killing a man"이었다. 그는 죽음 앞에서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후에, 이 병사는
방아쇠를 당길 때의 심정을 이렇게 진술한다. "그의 눈은 강하게 빛나고 있었고, 전 그의 눈에 매혹 당했죠. 나는 그 위대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CIA 보고서 1967년 10월 18일 체 게바라의 죽음에 관한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국민을 향한 연설을 번역.
1967년10월9일 12시 쿠바혁명의 주역이었으며, 라틴 아메리카의 혁명을
꿈꾸던, 한 젊은이의 파란 많은 일생은 39세를 일기로 볼리비아의 이름 없는 작은 촌락 라이게라(La Higuera)에서 수발의
총성으로 막을 내렸다. 부르조아의 아들이었으나, 진정 민중을 사랑하여, 안락한 의사의 직업도, 국가 중앙은행 총재라는 명예도
쿠바의 2인자 라는 지위도 모두 포기한 채, 항상 민중과 함께 먹고 함께 입으며, 억압에 대항하는 민중해방 전쟁의
최전선에서 투쟁했던 이 위대한 게릴라 전사는 "무릎 꿇고 살기보다는 서서 죽겠다"고 한 자신의 말처럼, 두 눈을 감지 못한 채
신화(神話)가 되어 쓰러졌다.
체 게바라의 죽음 이후 최근까지 활발한 역사적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흔히들
말하는 "역사가 말해줄 것이다."란 말이 새삼스럽게 와 닿는다. 체 게바라는 "산타클라라 전투의 영웅", "위대한 민중의 사령관",
"전사 그리스도", "20세기 최후의 전사", "최후의 게릴라"등등 온갖 미사어구가 난무할 정도로 역사적으로 위대하게 평가 받는
가운데, 또다른 쿠바혁명의 영웅 피델 카스트로는 이 재평가 작업에서 체 게바라의 죽음을 방조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당시 미국의 견제와 미국과 문제를 일으키기 싫었던 소련의 압력은 피델이 조직했던 체 게바라 구조특공대의 해체를 요구했고,
피델 카스트로는 이에 굴복해 체 게바라에게 원조 병력을 보내주지 않았다.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체 게바라는 결국
부상을 당한 채 체포되어, 볼리비아군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과연 피델 카스트로는 위의 내용처럼 소련의 눈치를 보느라 쿠바
혁명의 둘도 없는 동지인 체 게바라를 버렸을까? 사실을 알 수는 없지만, 만약 정말로 그랬다면, 그는 이미 체 게바라와 쿠바의
혁명을 이야기하던 그가 아니다. 권력에 눈이 먼 또다른 독재자일 뿐이다. 쿠바의 대다수 민중들은 그때 왜 피델이 구원병을 보내지
않았는지 의심하고 있다. 그리고, 피델 카스트로가 죽은 후에 그가 과연 체 게바라 만큼 민중의 존경을 받을 수 있을지도 의심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체 게바라는 최후의 순간까지 피델을 믿었던 것 같다. 아니 믿고 싶었던 것 같다. 사형당하기 직전 그가 한
유언 내용이 "피델에게 전해 주시오. 이 실패가 혁명의 종말이 아니라고......"라고 말한 것을 보면,,,,, 게바라가
볼리비아에서 체포된 직후, 그를 처음으로 만났던 구스만이라는 사람이 게바라의 최후 순간을 공개했는데, 당시 헬리콥터 조종사였던
구스만은 체 게바라 등 생존 게릴라들이 억류된 마을로 파견됐다.
그는 게바라가 처형되기전 그와 장시간 마지막 대화를 나눈
증인으로, 대화는 볼리비아 군인 수명이 둘러싼 작은 방에서 이뤄졌다고 한다. 데 구스만에 따르면 체 게바라는 피맺힌
목소리로 "피델이 날 배신했다"고 몇번이나 되풀이했다고 한다. 게바라는 혁명의 실패 원인에 대해 "쿠바와 볼리비아
공산당으로부터의 지원이 줄고, 당과 볼리비아 노동자 세력의 분열이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데 구스만은 게바라에게 담배를 주었고
부상당한 체 게바라는 고마움의 표시로 장화속에서 갈색표지의 육필로 쓴 소책자를 꺼내 구스만에게 건냈다고 한다. 진정 피델
카스트로는 그를 배신했단 말인가? 이 역시 시간이 더 흐른 후 역사가 말해 줄 것이다. 어쨌든, 체 게바라를 쿠바민중들의 품으로
꼭! 찾아오겠다는 피델 카스트로의 약속은 지켜졌다. 비록 유해로 돌아왔지만.......
체 게바라를 살해한 볼리비아군은 이 위대한 게릴라의 두 손목을 잘라 그를 사형시킨 증거로
그의 친구 피델 카스트로에게로 보냈다. 그리고, 아무도 찾지 못하도록 암매장했다. 그는 갔지만,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혹자들은 그에게 "최후의 게릴라"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틀린 말이란 것을 그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시체 위로
또다른 게릴라들이 민중을 위해 싸울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패배해도 승리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에베레스트 산정에 도달하려다가 많은 사람이 실패했지만, 결국 에베레스트는 정복되었습니다."- Che
Guevara
(비밀리에 매장된 체 게바라의 시신은 1997년에야 발견되었고, 그가 죽은지 30년만에 그가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켰던, 조국 쿠바로 돌아와 묻혔다.)
*개인적인 후기를 작성, 체 게바라 7편까지 만들어 연장선상에
놓으려했는데 뭐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 그런 생각에 이만 끝을 맺을까 한다 ^^
(끄읕``)
1940년대 이탈리아 빨치산들이 부른 노래로 유럽전역에 전파되면서 현재에는 신자유주의반대운동,
반전평화운동의 집회장에서 대표적으로 불리우는 노래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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