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선조 25) 5월 7일 경남 거제시 옥포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일본의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의 함대를 무찌른 해전. 임진왜란 초기, 왜군의 기세에 전함을 버리고 수군(水軍)
1만을 해산시킨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은 전라·충청 지방에 이르는 해로(海路)의 목줄인 옥포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닫고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에 응하여 이순신은 휘하의 판옥선(板屋船) 25척, 협선(挾船) 15척, 포작선(鮑作船) 46척을 이끌고 당포
앞바다에서 합세하였다. 이때 원균은 그가 거느리고 있던 70여 척의 전선을 모두 잃고 겨우 3척으로 합세하였다. 5월 7일 낮 12시경 조선
함대는 옥포 포구에 정박하고 있는 적선 50여 척을 발견하고 이를 동서로 포위해서 포구를 빠져나오려는 적선들에게 맹렬히 포격을 가해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이 싸움의 결과 아군은 별 피해 없이 적선 26척을 격침하는 큰 전과를 올려 최초의 해전을 승리로 장식하였으며, 이어 이날
오후 4시경에는 합포(合浦:경남 마산) 앞바다에서 왜군의 대선 5척을 발견, 이를 모두 불태우는 전과를 올렸다.
당포해전
[唐浦海戰]
1592년(선조 25) 5월 29일부터 6월 1일 아침까지 전라좌수영의 이순신(李舜臣) 함대를 주축으로 한 조선 연합수군은 사천포해전을 통해 왜군 함선 13척을 격침시키고, 왜군 2,600여 명을 사살하였다. 같은 날 정오 무렵 이순신 함대 전선 23척과 원균(元均)이 이끄는 경상우수영 전선 3척은 삼천포(三千浦) 앞바다를 거쳐 사량도(蛇梁島)에 이르러 이곳에서 밤을 보냈다. 다음날 오전 8시 척후선으로부터 당포 선창에 왜선이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순신 함대는 곧 당포(지금의 통영시 산양면 삼덕리) 앞바다로 나아갔다. 당포 선창에는 왜군 대선 9척, 중선·소선 12척이 매어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배에는 붉은 일산이 세워져 있고, 장막 안에는 왜장 카메이 코레노리[龜井玆矩]가 앉아 있었다. 아군 함대가 접근하자 왜군은 조총을 쏘며 맞섰다. 아군은 개의치 않고 거북선을 앞세워 현자총통을 비롯한 천자·지자총통을 쏘아 대는 한편, 뱃머리로는 왜장선을 들이받으며 격파하였다. 이어 화포와 화살을 왜장선에 집중적으로 발사하였다. 이 와중에 왜장은 중위장 권준(權俊)이 쏜 화살에 맞아 바다로 떨어진 뒤, 첨사(僉使) 김완(金完)과 군관 진무성(陳武晟)에 의해 목이 베어졌다. 왜장 카메이 코레노리가 죽자, 왜군은 혼비백산하여 전선을 남겨 둔 채 달아나기에 바빴다. 왜선 21척은 모두 격침되었고, 사살된 왜군만도 수를 세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순신 함대가 제2차 출전에서 사천포해전에 이어 치른 두 번째 해전이다. 옥포·합포·적진포해전 등 제1차 출전까지 합하면 다섯 번째 해전이 된다. 적정과 지형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거북선을 앞세워 적의 대장선에 화력을 집중하는 이순신의 치밀한 전략이 돋보인 해전이다.
율포해전 [栗浦海戰]
한산도대첩 [閑山島大捷]
1592년(선조 25) 7월 7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
1592년 6월 7일 이순신이 이끄는 삼도수사(三道水使)의 연합함대는 거제도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 대선
5척, 소선 2척이 율포에서 나와 부산진 쪽으로 향하는 것을 발견, 율포만으로 쳐들어가 대선 2척, 소선 1척을 불사르고, 나머지는 모두
붙잡았다. 1592년(선조 25) 5월 29일부터 제2차로 출동한 이순신의 수군은 6월 10일까지 사천
선창(泗川船艙)·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율포해전(栗浦海戰)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육지에서는 계속 패전의 소식만이 들려왔다.
그렇게 되자 적은 해상에서도 다시 머리를 쳐들기 시작하여 가덕도(加德島)와 거제도(巨濟島) 부근에서 적선이 10여 척에서 30여 척까지 떼를
지어 출몰하면서 육군과 호응하고 있었다. 이런 보고를 접한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은 우수사(右水使) 이억기(李億祺)와 연락하여 재차
출동을 결정하였다. 이때 일본은 해상에서의 패전을 만회하기 위하여 병력을 증강하였다.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제1진은 70여 척을
거느리고 웅천(熊川) 방면에서 출동하였고,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의 제2진은 40여 척을, 제3진의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도 많은 병선을
이끌고 합세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7월 6일 이억기와 더불어 90척을 거느리고 좌수영을 출발, 노량(露梁)에 이르러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의 함선 7척과 합세하였다. 7일 저녁 조선 함대가 고성(固城) 땅 당포에 이르렀을 때 적함 대·중·소 70여 척이 견내량(見乃梁)에
들어갔다는 정보에 접하고 이튿날 전략상 유리한 한산도 앞바다로 적을 유인할 작전을 세웠다. 한산도는 거제도와 고성 사이에 있어 사방으로
헤엄쳐나갈 길도 없고, 적이 궁지에 몰려 상륙한다 해도 굶어죽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이리하여 먼저 판옥선(板屋船) 5, 6척으로 하여금 적의
선봉을 쫓아가서 급습, 이에 적선이 일시에 쫓아나오자 아군 함선은 거짓 후퇴를 하며 적을 유인하였다. 아군은 예정대로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미리 약속한 신호에 따라 모든 배가 일시에 북을 울리며 뱃길을 돌리고, 호각을 불면서 학익진(鶴翼陣)을 펴고 일제히 왜군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모든 지자총통(地字銃筒)·현자총통(玄字銃筒)·승자총통(勝字銃筒)을 한꺼번에 쏘아 적선을 격파하고 불사른 것만도 66척이나 되었다. 적의 목을
잘라 온 것이 86급(級), 기타 물에 빠지거나 찔려죽은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으며, 한산도로 도망친 400여 명은 군량이 없이 13일간을
굶주리다가 겨우 탈출하였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때의 3대첩(大捷)의 하나로, 그 결과 일본 수군은 전멸하였고, 이순신은 그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억기와 원균은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서(陞敍)되었다.
부산포해전 [釜山浦海戰]
이순신은 부산 부근의
서평포(西平浦)·다대포(多大浦)·절영도(絶影島) 등에서 왜군 전선 24척을 격파한 뒤, 왜군의 근거지인 부산과 일본 본국과의 연락을 차단할
계획을 세웠다. 이순신은 먼저 부산포 내의 왜군의 상황을 정찰하였고, 왜군 전선 470여 척이 숨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순신은 거북선을
선두로 하고 전함대를 동원하여 왜군을 쳤으며, 그들은 배를 버리고 육지에 상륙하여 대항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전선 100여 척을 격파한 뒤,
왜군과의 전투를 중지하고 여수(麗水)로 돌아갔다. 조선군이 육지에 올라간 왜군을 추격하지 않은 것은, 육전이 해전에 비해 불리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이 아끼던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 등 전사자 6명과 부상자 25명을 냈다.
안골포해전 [安骨浦海戰]
1592년(선조 25) 7월 10일 조선 수군이 경남 진해에 있는 안골포에서 일본 수군의 주력대를 격멸한 해전,1592년 7월 8일 이순신·원균·이억기(李億祺)는 한산섬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을 섬멸한 다음, 안골포에 왜군이 머무르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10일 새벽 일본 수군을 공격했다. 이순신은 학익진(鶴翼陣)을 펴 먼저 공격하고, 경상우수사 원균은 그 뒤를 따랐으며,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포구 바깥에 진치고 있다가 본대를 응원하였다. 왜선들은 모두 42척으로서 수군장 구키[九鬼嘉陸]와 가토[加藤嘉明]가 이끄는 제2의 수군부대였다. 조선 수군은 여러 번 왜선을 포구 밖으로 유인하려 하였으나 쉽게 응하지 않았다. 조선 수군은 작전계획을 변경하여 번갈아 포구에 침입하여 왜선을 공격하였다. 이에 왜군이 맞서 싸우자 이억기의 함대도 참가하여 전투가 벌어졌다. 하루 동안 계속된 싸움에서 왜군 250명이 사살되고 나머지 왜병들은 뭍으로 도망쳤다. 이 해전은 한산도대첩의 승리와 함께 일본 수군의 주력부대를 쳐서 멸했다는 의의가 있다
칠천해전 [漆川海戰]
1597년(선조 30) 7월 15일 칠천에서 벌어진 해전.칠천량(漆川梁)해전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중 일본은 명나라와의 화의가 결렬되자 1597년 조선을 재차 침략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삼도수군통제사 원균(元均)은 주색(酒色)에 빠져 군율(軍律)이 극도로 문란해졌다. 1597년 7월 일본은 앞서 조선 수군에게 패배하였던 한산도를 다시 공격하기 위하여 먼저 정탐으로 가나메 도키쓰라[要時羅]를 밀파하여 조선군을 유혹하니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은 원균을 불러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명령하였다. 이에 원균은 전병력을 동원하여 7월 7일 다대포(多大浦)에서 일본군의 빈 군함 8척을 불사르고 서생포(西生浦)에 이르러 적의 주력함대를 만나 패전하고 일부 군사는 풍랑으로 표류하는 지경이 되었다. 간신히 가덕도(加德島)에 당도한 원균은 다시 일본군의 복병을 만나 막대한 손해를 입고 거제도 앞 칠천에 정박하고 말았다. 이 전투의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진 원균은 도원수 권율에게 패전의 책임을 추궁당하여 태형(笞刑)까지 받게 되었는데, 이에 원균은 불만과 실의에 빠져 군사를 돌보지 않고 전략상 해전에 불리한 칠천에서 이진(移陣)도 않고 그대로 있다가 다시 일본군 함대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일본군은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와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전함 수백 척을 이끌고 부산에서 출진(出陣)하고,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시마즈 다다유타[島津忠豊] 등의 육군도 칠천으로 향하였으며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의 수군까지 합세하여 공격하였다. 결국 원균은 일본군의 수륙양면공격을 받아 대패하고 자신도 육지로 탈출하다가 전사하였다. 이 해전의 승리로 일본군은 한때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조선군은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최호(崔湖) 등의 용사가 전사하고 경상우수사 배설(裵楔)만이 생존하여 12척의 전함을 이끌고 한산도로 후퇴하였다.
명량대첩 [鳴梁大捷]
1597년(선조 30) 9월 정유재란 때 조선 수군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을 쳐부순 싸움.
이순신이 통제사(統制使)에서 물러난 뒤 원균(元均)은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어 일본
수군과 대전했으나 다대포(多大浦)·칠천곡(漆川谷)에서 대패하여 해상권을 상실하였다. 원균의 패전으로 같은 해 백의종군(白衣從軍) 중인 이순신을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로 기용하였다. 이 때 이순신은 패전 후 남은 13척의 전선과 수군을 정비하여 닥쳐올 전투에 대비하였다. 8월 왜선 8척이
남해 어란포(於蘭浦)에 출현하자 이를 격퇴하고, 진(陣)을 진도(珍島) 벽파진(碧波津)으로 옮겼다. 9월 7일에는 서쪽으로 이동하던 왜선 55척
중 호위 적선 13척이 어란포에 나타나자, 한밤중에 이순신이 선두에서 지휘하여 적선을 격퇴시켰다. 다시 적의 함대가 어란포에 들어온다는 보고를
받고 9월 15일에 벽파진에서 우수영(右水營)으로 진을 옮긴 뒤 장병들에게 “必死卽生, 必生卽死(필사즉생 필생즉사)”라고 말하고 필승의 신념으로
적의 내습을 기다리고 있었다. 9월 16일 왜선 133척이 어란포를 떠나 명량으로 공격해오자, 12척의 전선과 군사를 정비하여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道總]와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가 지위하는 왜선 31척을 무찔렀다. 이 싸움으로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노량해전 [露梁海戰]
1598년(선조 31) 11월 19일 노량 앞바다에서
이순신(李舜臣)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과 벌인 마지막 해전
정유재란으로 조선에 주둔해 있던 왜군은 왜장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병사(病死)들이었다. 그들이 주둔해 있던 곳에서 철군하게 되었는데, 이때 이순신은 명나라의 수사제독(水師提督)
진린(陳璘)과 합세하여 적의 퇴로를 막기로 하였다. 그런데 철수부대를 실은 왜선의 해로를 열어줄 것을 조건으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게서
뇌물을 받은 진린은 이순신에게 왜군의 퇴로를 차단하지 말자고 권고하였다. 이순신은 이에 강경하게 반대하여 진린을 설득한 후 함께 왜군을 치기로
하였다. 고니시는 경남 사천(泗川)에 주둔 중인 시마쓰 요시히로[島津義弘]와 남해의 소(小) 시라노부[宗調信]에게 구원을 청하여 전선 500여
척을 얻어 노량 앞바다에 집결시켰다. 그러자 이순신은 휘하 장병에게 진격 명령을 내려 노량 앞바다로 쳐들어가 적선 50여 척을 격파하고 200여
명의 적병을 죽였다. 이때 왜군은 이순신을 잡을 목적으로 그를 포위하려 하였으나 도리어 진린의 협공을 받아 관음포(觀音浦)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이순신은 적선의 퇴로를 막고 이를 공격하여 격파하는 동시에 적에게 포위된 진린도 구출하였다. 이 회전(會戰)에서 400여 척의 전선을 격파당한
왜군은 남해 방면으로 도망쳤는데, 이순신은 이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추격하였다. 이 추격전에서 이순신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순신은 죽는 순간까지 자기의 죽음을 알리지 말고 추격을 계속하여 적을 격파하라고 유언했기 때문에, 조선군은 왜군을 격파한 후에 이순신의
전사소식을 들었다. 이 추격전에서 왜군은 다시 50여 척의 전선이 격파당하고 겨우 50여 척의 남은 배를 수습하여 도망쳤다. 이 전투에서는
이순신 외에도 명나라의 등자룡(鄧子龍), 조선 수군의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 이영남(李英男), 낙안군수(樂安郡守) 방덕룡(方德龍),
흥양현감(興陽縣監) 고득장(高得蔣) 등이 전사하였다.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7년간이나 끌던 조선과 일본 간의 전쟁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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