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ner, Neville <1924 - 잉글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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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직업에 종사하는지 오늘날의 사회에는
나름대로의 진로가 있다. 하물며 타고난 재능에 더해 특정한 기술을 습득해야 하는 연주가의 경우는 특히 예외가 거의 없다. 자기 자신이 음을 내지
않는 지휘자의 일도 마찬가지여서 이를테면 심포니 콘서트의 지휘대에 서기 위해서는 옛날의 독일이라면 오페라 극장의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정석 코스였으나 현재는 당장 콩쿠르에서 우승하는 것이 지름길이다. 그 밖에 작곡가가 自作을 지휘함으로써 지휘 활동을 늘려가는 경우도 있으며
최근에는 피아니스트나 바이올리니스트서 우선 성공한 뒤 그 명성을 타고 지휘자로 전향하는 예도 몇 가지 들 수가
있다.
그렇다고는 하나 어떤 코스를 거치든 결국은 훌륭한 음악을 만들 수가 없다면 의미가 없다. 그래서 "하늘은 두
가지를 주지 않는다"고까지는 말하지 않더라도 저마다의 특별한 천분이 있고 그렇지 못한 것이 있는 것은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이므로, 자연히
각 지휘자의 레퍼토리나 활동 범위가 정해지게 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오페라, 오라토리오, 콘서트, 바로크, 고전파, 낭만파, 현대
음악, 독일 음악, 프랑스 음악, 이탈리아 음악, 러시아 음악, 심포니, 콘체르토, 발레 음악, 종교 음악 등을 열겨해 나가 보면 이들 전부에
능란한 연주를 할 지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대다수가 이 중 둘이나 셋 혹은 몇 가지 분야에서 평가를 받게 되기
마련이다.
가령, 바로크를 장기로 하고 이 분야에서 지휘 활동을 시작한 카를 뮌힝거, 카를 리히터, 쟝 프랑스와
파이야르, 칼 하스 등은 각기 바로크 음악에 인접하는 전고전파에서 고작 빈(Wien)고전파 정도까지이고, 나머지는 바로크에 비교적 가까운 음악에
한정되어 있다. 확실히 그들이 무리하지 않고 연주를 할 수 있는 범위라고 하면 그 정도가 타당한 선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식"에도 예외는 생기게 된다. 소련에서 서구로 망명한 지휘자 루돌프 바르샤이와 잉글랜드의
네빌 마리너이다. 두 사람 모두, 원래 바로크의 전문가라기보다 현악기 주자에서 지휘자가 되어 그 현악기에 대한 조예를 살려서 실내 관현악단을
결성, 편성상에서 바로크 음악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점이 다분히 있다. 그러나 바르샤이는 어찌 되었든 마리너는 바로크의 전문가로서 세계적으로
명성을 높였으므로, 그가 [카르멘 모음곡]을 레코드에 취입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종래의 활동으로 생각하면 마리너는 이상적인
지휘자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의 경우도 바로크 음악에만 전력한다기보다는 역시 심포니 콘서트 지휘를 언젠가는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마리너도 바르샤이와 마찬가지로 우선 가능한 일부터 손을 대어 해나가려는 실행력을 가졌는데 그것이 마침 바로크
음악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이 지휘자가 바로크에 적합하지 않다는지, 단순한 방편으로 이 분야에 손을 대었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마리너는 훌륭한 바로크 음악의 지휘자인데 그 점은 그의 음악성을 아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자기 능력을 다 알 수 없는 일이 많은데, 마리너도 역시 그렇지 않을까? 그는 그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바로크 음악에 적절한
음악성을 가지고 있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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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빌 마리너는 1924년
4월15일에 잉글랜드 동부의 링컨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는 런던 왕립 음악원(로열 콜리지 오브 뮤직)과 파리 음악원에서 바이올린을 공부했는데,
바이올린 주자로서는 우선 실내악의 분야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즉 1946년부터 53년까지 마틴 현악 4중주단의 멤버가 되었고, 1950년
이후에는 버츄오소 현악 트리오의 멤버도 겸했다. 그러나 실내악으로는 좀처럼 생계를 꾸려나갈 수가 없었으므로, 1947년부터 이튼 콜리지의 교사로
근무하였고, 52년에는 모교인 왕립 음악원에서도 교편을 잡았다.
이 시대의 마리너는 음악 학자인 서스턴
다트(1921~71)를 알게 되어 두 사람은 친한 친구가 되었다. 연주가로서는 다트의 음악과 음악론은 마리너를 매료시켜 그는 이 때부터 바로크
음악의 연주가 장래 활발해질 것으로 확신했다. 그래서 1952년 다트와 마리너 두 사람은 자코비안 앙상블의 기초를 굳히고, 한편 마리너는 보이드
닐 현악 합주단의 멤버로서 바이올린을 담당했다. 그러나 당시의 영국에서는 아직 바로크 음악으로 생활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마리너는
1956년 런던 교향악단에 입단하여 제 2 바이올린 주자로서 일하였다. 그는 제 2 바이올린의 수석이 되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이 일에 실증이
나서, 1959년에 아카데미 실내 관현악단(The Academy of St. Martin in the Fields : 줄여서 ASMF)을
창설했다. 이것을 아카데미라고 명명한 것은 필하모닉과 같은 의미에서라고 한다.
-- 아카데미 성 마틴 실내 관현악단 --
이 악단은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에 있는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 교회의 원조로 발족했다. 따라서 악단 이름도 그 명칭을 빌어온 것인데 멤버는 런던의 각 오케스트라 중에서
일류 주자를 모았다. 그러나 편성은 항상 일정하지 않고 곡목에 따라 크게 달랐다. 물론 마리너는 수석 주자로 있으면서 지휘도 했는데, 이것이
발족했을 무렵, 당시 런던 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있던 피에르 몽퇴가 아카데미의 연주를 듣고, 마리너에게 본격적으로 지휘를 시작해 보라고
충고했다. 이런 일도 있고 해서, 마리너는 몽퇴가 주재하고 있던 미국의 메인州 행콕 하계 지휘법 강좌에 참가하여, 여기서 몽퇴에게 사사하여
정식으로 지휘법을 공부했다.
마리너와 아카데미 실내 관현악단은 그 청신한 연주로 금새 런던에 많은 지지자를 만들었다.
그러던 중 오와조 릴 회사가 이 악단에 주목하여 1961년 그들은 최초의 레코드를 녹음했다. 이것이 발매되자 매우 호평을 받아 마침내 이
아카데미는 아고, 영국 데카, 필립스, EMI 등 각사에서도 녹음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레코드들은 아카데미 실내 관현악단뿐 아니라 지휘자 네빌
마리너의 이름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마리너에게는 아카데미 실내 관현악단 외에 객원으로 지휘하는
일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959년, 마리너는 LA로부터 초빙되어, 아카데미 비슷한 LA 실내 관현악단의 수석 지휘자에 취임했다. 그 이래로
마리너는 아카데미를 연간 6,70회, LA를 연간 20회 지휘하는 다망한 생활을 시작했다. 또 이와 병행하여 영국의 노전 심포니아의 부지휘자가
되었는데, 1974년에는 LA 실내 관현악단을 이끌고 유럽 음악 여행을 성공시켰다.
1977년 마리너는 로체스터의
메도우 브루크 음악제의 예술 감독에 취임, 동시에 슈투트가르트 방송 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로서도 계약했다. 이듬해 78년 마리너는
스쿠로바체프스키의 후임으로서 미네소타 관현악단과 계약, 1979~80년의 시즌부터 이 악단의 음악 감독 및 상임 지휘자로 취임하였다. 드디어
마리너는 대교향악단의 상임이 된 것이다. 그는 79년에 아카데미를 떠났는데, 아주 관계를 끊은 것이 아니라 장래에도 아카데미와의 새로운 레코드가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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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마리너의 바로크 음악이 25년간에 달하는 로버트
서스턴 다트 교수와의 공동 작업의 성과라는 것을 다시금 강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다트는 왕립 음악원(RCM)과 엑세터 대학에서 배우고, 그
후 브뤼셀에서 음악 학자 자를르 반 덴 보랭에게 사사했다. 마리너는 1946년 다트와 만나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듀오를 시도했다고 하는데, 다트가
1946년에 런던으로 돌아오자 그에세 협력했던 자코비안 앙상블을 결성했다. 그리고 마리너는 훌륭한 쳄발로 주자이기도 했던 다트에 의해 바로크
음악이란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무릇 음악학이 이처럼 구체적으로 연주와 결부된 예는 달리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다. 다트 자신은 연주가로서 음악학을 실천 활동에 융합시키자는 주장을 평생 동안 일관해 왔다. 1947년부터 캠브리지 대학의 지저스 콜리지의
부강사로 있다가 1962년에 교수가 되었는데 그동안에도 자기의 주장을 제시하기 위해 1955년부터 59년까지 필로무지카 오브 런던의 예술 감독이
되었다. 이 단체가 다트의 지휘로 오와조 릴 회사에서 녹음한 바하나 헨델의 작품은 지금도 들을 수가 있는데 이들 속에 나타난 다트 교수의 연구
성과는 1959년에 조직된 마리너의 아카데미 실내 관현악단에 계승되었고, 다시 그 후의 연구에 입각하여 완성된 표현을 만들어간다. 즉
1959년까지 거의 고군분투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다트는 마리너가 아카데미를 조직했기 때문에, 실천 활동의 많은 부분을 마리너에게
맡기게 되었다.
마리너도 [서스턴 다트에의 감사]라는 제목의 짧은 글 속에서 다음과 같이 적어 놓고 있다. "그와의
교우에서 나는 처음으로 17세기와 18세기의 음악의 연주에 있어 납득이 갈 만한 악기 연주 스타일의 법칙을 터득했던 것이다. (중략) 음악학은
별도로 하더라도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영국에 있어서의 바로크 음악연주에 영향을 주었다."
다트는 1964년에 런던
대학 총장이 되었고 쳄발로 주자로서도 죽기 약 1개월 전까지 연주를 계속했다. 그의 마지막 연주는 마리너 지휘의 바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오리지널版)의 콘티누오(通奏)이다. 그러나 다트는 필로무지카 오브 런던과 아카데미의 두 시대를 통하여, 소위 오리지날 악기의 연주는
생각하지 않았다. 쳄발로 주자 크리스토퍼 호그우드가 현재 협력하고 있는 아카데미 오브 앤션트 뮤직(영국 오와조 릴 회사에 다수의 녹음이 있다)
등의 방향과는 약간 달랐던 것이다. 아마 다트의 생각이 마리너에게 계승되어 있다고 보아도 좋은데 마리너는 시대 양식을 존중은 하지만 옛 악기를
쓰는 것에는 흥미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본래 악보에의 충실함을 추구하는 일과 편성의 규모 등을 작곡 당시로 되돌릴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것은 단순한 복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고, 음악성을 나타내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째서 다트가 연주의 실천의 큰 부분을 마리너에게 넘겨주었는가 하는 것은 다트 지휘의 필로무지카 오브 런던에 의한 바하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전곡(LGT 147~8)이나 [관현악 모음곡 제2/3번] (LGT 1146)을 아카데미 실내 관현악단의 연주와 비교해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즉 다트가 손수 쳄발로를 연주하면서 지휘하는 것보다도 마리너가 지휘하고 다트가 보면의 정비와 쳄발로에 전념하는 팀웍이 보다 훌륭한
연주를 만들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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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마리너의 연주란 대체 어떤 것일까? 이 지휘자는
이미 바로크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곡목으로 수많은 레코드를 만들고 있는데 바로크 음악으로는 코렐리의 [합주 협주곡 작품 6번], 비발디의 [조화와
영감 작품 3번], [라 스트라바간짜 작품 4번], 헨델의 [합주 협주곡 작품 6번], [메시아], 바하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집], 신구
2개의 [관현악 모음곡] 전4곡, [푸가의 기법], [미사곡 b 단조], 고전파로는 하이든의 교향곡 10여 곡과 모차르트의 [초기 교향곡집],
[후기 교향곡집], [관악기를 위한 협주곡 전집] 등 수많은 곡을 포함하고 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마리너의
연주는 관습적인 양식에 전혀 구애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그의 연주의 준비는 우선 사용 악보부터 시작된다. 이야말로 다트로부터 이어받은 것이며,
이것이 마리너의 17~8세기 음악의 연주를 두드러지게 특징짓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다음에 그 예를 열거해 보기로 한다. 우선 코렐리의 [합주
협주곡 작품 6번]인데 이것은 호그우드가 교정한 실용판 악보와 오케스트라의 배치를 채용하고 있다. 비발디의 [4계 작품 8번]은 통주지음에
쳄발로 외에 오르간을 쓰고, 상당히 다양한 장식음을 붙여서 작품의 표제성을 강조하고 있다. 역시 비발디의 [작품 3번]과 [작품 4번]도
통주지음의 편성에 특색이 있는데 이것도 호그우드의 생각으로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헨델의 [작품 6번]은 다트
교정의 악보를 썼고 [메시아]는 1743년 3월23일의 런던 초연에 의한 크리스토퍼 호그우드판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이것은 보수적인 청중을
놀라게 하는 악보인 동시에 연주이다. 또 [水上의 음악(전곡)]은 피츠윌리엄 박물관 소장의 월쉬版이나 레너드版, 기타의 자료에 의해 일찌기
다트가 연주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3개의 모음곡으로 연주하고 있다. 바하의 [브란덴부르크협주곡] 전곡은 "오리지널版에 의한 세계에서 첫번째의
녹음"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바하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집]을 그 이전에 씌어진 6곡의 콘체르토에 가필한 사보집이라고 생각하여 그 오리지널을
C.F. 펜첼의 옛 사보 등을 구하여, 다트가 편집한 악보에 의한 것이다. 이 또한 바하 연주에 문제를 제기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관현악 모음곡]도 신반은 대개 [新바하 전집]을 쓰고 있지만 구반은 역시 펜첼의 사본 등을 참고로 한 다트의 악보에 의한다. [푸가의 기법]은
마리너와 앤드루 데이비스 편이고, [음악의 헌정]은 마리너의 편집 및 편곡이다.
같은 바하의 [b단조 미사]에
[新바하 전집], 하이든의 교향곡에 로빈스 란든版을 쓰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더라도,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프란츠 바이엘版이라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또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교향곡에서는 물론 베토벤의 [교향곡 제1번/제2번], [제4번]에서 모차르트의 경우와
같은 규모의 현의 편성(8, 6, 4, 4, 2)을 취하고 있는 것도 유의할 만한 일이다.
이상에 든 레코드는 전부
아카데미 실내 관현악단의 연주인데 이들에 공통된 특색으로서는 현의 울림이 맑고 아름다우며 프레이징이 합법칙적으로 최소단위로 세분되어 나누어져
있는 점, 레가토와 논 레가토와 논 레가토의 구별이 뚜렷한 것, 빠른 템포의 경우에는 작은 규모의 편성의 잇점을 살려서 마르카토처럼 음
하나하나를 똑똑히 부상시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리듬감이 매우 예민한 점 등을 들 수가 있다. 또 헨델이나 바하의 작품에 나타나는 프랑스풍
서곡의 템포가 독일 같은 곳의 관습적인 연주에 비하면 매우 빠르고 특히 느린 부분에 대하여 급속한 부분을 단지 2배의 템포로 잡는 륄리풍의
양식이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다. 그 때문에 결과적으로 느린 부분이 일반의 상투적인 속도보다 빨라진 것 같이 들리는데 이것은 논리적인 귀결이며,
동시에 현대적인 운동성과 추진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생각된다. 마리너의 연주는 항상 매우 산뜻한 인상을 주는데, 그 원인은 음의 투명도의
높이나 리듬에 대한 예민함 뿐 아니라 이런 운동성에 있다고 해도 좋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바하나 헨델에 익숙해지게 되면 관습적인 연주에 얼마만큼
19세기적인 양식이 가해져 있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고전파의 연주에 있어서도 기본적으로는 마찬가지여서 이를테면
하이든의 교향곡에는 동독의 연주에서 볼 수 있는 극명성은 없지만 그 유동감과 감각적인 날카로움은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된다. 다이나믹도 적절하지만
그러나 大오케스트라의 경우처럼 거창하지 않게 처리되어 있으며, 극단적인 경우는 모차르트의 [교향곡 제26번]에서 볼 수 있는 마디마디의 f p
f p f p f와 같은 강약의 지시도 실로 세밀하게 살려져 있다. 그리고 베토벤의 곡에서는 규모가 작은 연주가 현과 관의 밸런스를 무리 없이
정비하고 이에 의하여 음량과 주법의 자연스러움을 획득, 다시 각 파트의 움직임과 악기의 증감의 효과를 정직하게 나타나게 되는 것을 들으면,
대규모의 연주로 잃어버리고 있던 순수한 고전미가 마리너에 의해 다시금 나타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지휘자의 표현은
기본적으로는 극히 단정하고 고전주의적인 양식에 의거하고 있다. 비발디의 [4계]등 때로는 문자 그대로 바로크적인 미라고도 할 수 있는 왜곡된
느낌을 유머러스하게 나타내는 수가 있는데 설사 그런 부분이라고 기본적으로는 매우 단정한 음악이고, 왜곡은 사전에 계획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휘의 솜씨도 솔직하고 허실이 없는데, 그것도 당연한 일로 [4계]와 같이 작품이 요구하고 있는 경우 이외에는 악보에 쓸데없는 표정을 덧붙이지
않으므로 부담스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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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마리너의 연주는 여러 각도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어 거기에서 신선한 느낌이 생겨나고 있다. 더우기 양식적인 단정함을 궤뚫고 격렬한 감흥이 나타나는 경우도 많은데, 특히 합창을 수반한 작품,
곧 바하의 [b단조 미사]나 모차르트의 [레퀴엠]에서는 대위법적인 기법을 착실히 그리면서 차갑지도 딱딱하지도 않은 풍부한 공감이 음악에 장대한
고양감을 주고 있다. 이것은 합창이라는 것이 인간적인 작업이기 때문일까?
그건 어찌 되었든 이러한 마리너가 실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겸 리더로부터 탈피하여 소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었을 때 어떤 음악이 만들어질 것인가? 같은 사람이므로 본질적으로
음악성이 달라질 리가 없지만, 바로크 음악에서의 다트나 호그우드와의 협동 작업이 마리너가 자신도 예기치 못했을 만큼 훌륭한 성과를 거둔 동시에
이 지휘자의 자유로운 거동을 규정하고, 약점을 덜어주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오르게 된다.
확실히 바로크
음악이나 고전파 교향곡과 협주곡 이외에서의 마리너는 바로크 음악의 경우처럼 모두가 성공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를테면 로시니의 [서곡집]의
레코드가 2집 14곡 있는데, 같은 아카데미 실내 관현악단을 지휘했는데도 제1집의 [세빌리아의 이발사]나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 등 로시니의
시대를 상기시키는 단려한 명연인 데 비해, 제2집의 [윌리엄 텔]이나 [도둑까치], [세미라미데]에서는 결정적인 대목에서 뚜렷하지 않은 높낮음의
나약함, 첼로의 피치의 안정이 결여되고 있는 점 등 기술적인 데 대한 불만조차 느끼게 된다.
생각해 보면 마리너의
음악성에는 사소한 과장도 없고 약간의 달콤한 데는 있어도 극적인 심각성이나 강렬함 같은 것은 없다. 능란한 지휘자이긴 하지만 역시 인간인 이상,
장단점은 있는 것이다. 얼른 생각할 때, 마리너에게 런던 교향악단을 지휘시켜 비제의 [카르멘 모음곡]이나 [아를르의 여인 모음곡]을 녹음한다는
의도를 얼른 이해할 수 없겠지만 완성된 레코드의 연주를 들어보면 과연 종래의 연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중용의 템포의 차분함과 높은 격조, 세부의
섬세함, 극명한 리듬, 울림의 중후함을 느낄 수가 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마리너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비제에게 있어서 이러한 작품 해석이 필요한가 하고 생각해 볼 때, 아무래도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는다. [카르멘]에는 밸런스의
아름다움보다도 열광이, 신중함보다 긴장감이 바람직하다. [밀수업자의 행진]이나 [투우사의 노래]도 어딘지 생기가 부족한 것처럼
느껴진다.
런던 필하모니 관현악단을 지휘한 [주페 서곡집]의 경우도 너무나도 솔직하고 품위있게 억제된 표현이다.
이것이 영국인의 취미인지 모르지만 곡 속에서 쓰인 폴카나 왈츠에는 보다 더 멋을 내는 데가 있어도 좋지 않을까? 주페의 서곡은 이렇게까지 품위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서민적인 멋있는 센스가 필요하다. [시인과 농부] 첫머리 같은 데는 이래서는 너무 장중하다는 느낌이다. 이런
데를 어떻게 재미있게 들려주는가 하는 것이 앞으로의 마리너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영국의 작품의 경우에는
영국계의 지휘자들에게 공통된 곡에 대한 애정이 마리너 속에도 있는지, 이 지휘자의 음악성이 살아나게 되는 것도 흥미 싶다. 즉 비제나 주페에게서
약점이 되어 있던 것이 영국의 곡에서는 모조리 장점으로 전화하는 것이다. 아카데미 실내 관현악단을 지휘한 본 윌리엄스의 [탈리스의 주제에 의한
환상곡] 외의 한 장,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우 관현악단을 지휘한 홀스트의 [혹성], 엘가의 [수수께끼(Enigma) 변주곡] 등, 모두 경청할
만한 호연이며 특히 본 윌리엄스의 [탈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과 [그린 슬리브스에 의한 환상곡]에서는 담백한 울림과 확실한 구성미, 음영이
짙은 표정이 서로 어울려 그야말로 절묘하다고 할 만한 표현이 만들어져 있다.
홀스트의 [혹성]도 영국의 지휘자라면
요구받는 일이 많은 작품이겠지만 이또한 스코어의 지시를 세밀하게 살리고 있으며, 그 표정의 솔직함과 자연스런 유동감이 들을수록 지휘자의 존재를
잊게 하는 그런 음악을 만든다. 그러고 보니 바로크 음악에서는 단적으로 작품을 표출하면 할수록 마리너의 개성 같은 것을 느끼게 했었는데, 본
윌리엄스나 홀스트, 엘가에서는 전혀 그런 점이 없다.
[혹성] 속의 [목성 - 쾌락의 신]의 영국 민요조의 선율도
더없이 친근감 있게 노래불리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의 종곡 [해왕성 - 신비의 신]이 환상적이라기보다 순음악적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은 역시
마리너답다고 하겠다.
엘가의 [에니그마 변주곡]과 [위풍 당당]의 3곡도 좋고, [에니그마]의 fff 등은 다만
물리적으로 큰 소리라는 것 이상으로 감동이 깃들어 있다. [위풍당당 제1번]의 저 유명한 [희망과 영광의 나라]의 선율도 얼마나 자연스러운
동경을 가지고 노래불리고 있는지, 그리고 이들 영국 음악에서 떠오르는 풍부한 서정성은 마리너의 음악이 그 고전주의적인 외관의 내부에, 의외로
느껴질 만큼 따뜻하고 로맨틱한 기질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고전으로는 아카데미 실내 관현악단과
녹음한 하이든의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의 일곱 가지 말씀(오리지널版)]도 마리너의 따뜻한 서정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서정성의 표출이라는
의미에서는 LA 실내 관현악단을 지휘한 버질 톰슨의 [대지를 가는 호미], [강]이라는 두 곡의 영화 음악에서의 모음곡이 훌륭한 연주가 되어
있는 것도 호감이 간다. 이들 톰슨의 작품은 자칫하면 저속하게 연주되거나, 메마른 음의 나열에 빠져들기 쉬우나 마리너의 연주에서는 결코 그런
일이 없다.
LA의 도로시 찬들러 파필리온을 소형으로 모방한 것 같은 파사데나의 앰버서더 오디토리엄이라는 음향 효과가
좋은 홀에서 녹음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여기서도 마리너의 순음악적인 표현법이 작품에서 상쾌한 인상을 받도록 만든다. 특히, [강]은 이 기록
영화의 담담한 카메라 시각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된다.
마리너와 LA 실내 관현악단의 레코드는 이 밖에 그들의 데뷔
음반이 된 스트라빈스키의 [덤바튼 오크스 협주곡]이나 레스피기의 [류트를 위한 古風의 무곡과 아리아] 등이 있는데 스트라빈스키에 대해서도 톰슨의
작품과 꼭 같은 말을 할 수가 있다. 그들이 유럽 음악 여행에서 호평을 받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 밖에
마리너의 레코드로서 주목할 만한 것을 들면 모두 아카데미 실내 관현악단의 연주로 비제의 [교향곡 C장조]와 프로코피에프의 [고전 교향곡],
바그너의 [지크프리트의 목가]와 R. 쉬트라우스의 [變容], 레스피기의 [새], [보티첼리의 3장의 그림], 스트라빈스키의 [풀치넬라] 등이
있으며, 그 밖에도 많은 것이 있다. 마리너의 디스크그래피를 만든다면 굉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많은 레코드를
통해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마리너가 지휘자로서 서서히 성숙하고 있고 최근에는 이전에 없던 원숙미와 큰 스케일을 보여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리너의 가장 초기의 오와조 릴 회사에서의 녹음인 [이탈리아 바로크 명곡집]이나 [매혹의 바로크 명곡집]과 최근의 레코드를
비교해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지만, 그보다도 두 종류의 바하의 [관현악 모음곡]을 듣고 비교해 보는 것이 음악적 원숙을 보다 뚜렷이 알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실제에 있어서 이 두 종류의 [관현악 모음곡]의 레코드는 판이 다르기도 해서 어느 쪽이 좋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나 지휘자 마리너라는 의미에서는 새로운 녹음이 한층 원만한 음악을 만들고 있다. 제3번의 서곡 등에서 급속한 부분이 약간
느리게 되어 관습적인 템포에 가까와지고 있는 것이 흥미로운데, 전체적으로 음악을 폭넓게 다루고 극명해져 있으므로, 느린 템포라도 충실감이
강하다. 세부도 한층 선명하며, 악기를 힘껏 울리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마리너가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서 활동을 시작한 뒤의
녹음이므로, 그런 새로운 분야로부터의 영향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상상할 수 있지만 그러나 역시 이 지휘자의 음악이 크고 왕성하게 성장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뒤집어 말하면 이색적인 지휘자가 이색적이 아닌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만큼의 능력과 성실성이 있다면 길은 반드시 열리게 될 것이다.
-- 음악 평론가 고이시 마코토(小石忠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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