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의 해상전 전술은 함포전이었습니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판옥선이 일제히 일자진(一子陳)을 펼쳐 왜선을 섬멸하죠.
최근 충무공 관련 학술회의에서 일본인 학자인 스카와 히데노리 요코하마국립대 교수가 '군사기술의 혁신과 이순신 장군'이란 주제로 강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실린 내용을 발췌해 보겠습니다. 읽어보시면 충무공의 지략이 동양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놀랄 만큼 뛰어났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세계 각국의 해상전 발달사도 함께.
세계4대 해전의 하나로 꼽히는 1592년 음력 7월 8일 충무공의 한산대첩도. 거북선을 앞세우고 학익진을 펼친 조선 수군은 이날 왜적의 대형 전선 25척, 중형 전선 17척, 소형 전선 5척 등 47척을 깨뜨리거나 불태웠습니다. 이밖에 세계4대 해전은 기원전 480년 그리스의 살라미스해전, 1588년 영국의 칼레해전, 1805년 영국 넬슨 제독의 트라팔가해전 등이 있습니다.
상업의 시대는 동남아시아, 일본, 만주라고 하는 중화의 주변에 있어서, 화승총과 같은 신군사기술의 유입과 더불어 사회를 크게 변모시켰다.
그러나 중국, 한국에 관해서 본다면, 그 직접적인 영향은 경제적 면에 한정되고 있었고 오히려 변모한 주변부로부터의 군사적팽창이 보다 심각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즉 19세기의 웨스턴임팩트와 같은 거대한 충격력은 갖고 있지 않았다. 그 이유의 하나로서, 19세기에 있어서 압도적 격차가 존재했던 군사기술 면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화약무기 발달 이전에 있어서의 해상전투방식은, 동서양을 불문하고 육상 전투의 연장이었다. 즉 접근해서 화살, 불화살 등으로 공격하거나 적선으로 옮겨 타서 도검, 창 등의 검류무기를 이용하여 적병과 싸우고 적선(敵船)에 불을 붙인 후 철수한다고 하는 패턴에서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지중해에서 흔히 이용되었던 노를 사용한 갤리선과 같이 적선에 충돌시키기 위한 충각(衝角)을 갖춘 경우도 있었지만, 이것은 선체공격용이라기보다는 적선에 옮겨타기 위한 발판이기도 했다.
그리고 북유럽의 바이킹과 동아시아 왜구의 경우, 배는 단순히 해상 이동의 수단이었으며 배 그 자체가 전투용 장비를 갖추고 있지는 않았다. 화약의 발명은 중국이었지만, 화약을 이용해서 석탄(石彈) 등을 발사하는 대포는 유럽에서 발명되었던 듯, 1326년 그려진 회화에는 원시적인 화포가 등장하고 있다.
실전에 사용된 것도 이와 비슷한 시기로 보이는데 크고 무거운 화포는 기동성이 요구되는 야전에서는 좀처럼 사용되지 못하였고, 공성전(攻城戰)에 있어서 진지에 고정해서 사용하는 상태가 오래 계속되었다.
화포의 적극적 사용은 이동에 제한이 있는 지상전보다도 선박에의 탑재가 진행되었다. 15세기에 들어서 지중해에서 흔히 사용되던 갤리선에 화포탑재가 시작하였지만, 현측(舷側)이 낮고 다수의 노가 현측에서 돌출되어 있는 갤리선에서는 화포 탑재에 한계가 있었다.
즉 전장식(前裝式) 대형화포를 탑재할 수 있는 장소는 선수루(船首樓) 밖에 없었고, 이러한 탑재위치에서는 기껏해야 5문(門) 정도의 탑재에 그쳤고, 측면, 선미(船尾)에는 장착하지 못했다.
더우기 전투방식에 있어서도 일렬횡대로 초승달형의 진형을 만들어 항상 배 정면을 적선으로 향하면서 발포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현측에도 약통장전식(藥筒裝塡式) 소형 선회포(旋回砲)를 탑재했지만 이것은 적함(敵艦)을 파괴하는 것이라기보다 접근전이 되었을 때 적함의 갑판에 노출되어 있는 병사와 조수(漕手) 등을 살상해서 전투력을 상실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마지막에는 불화살로 불을 붙인다던가 적선에 올라 타서 도검으로 승부를 결정짓는 방식에는 차이가 없었다.
다른 배의 한 종류로서 돛대를 주(主)로 해서 높은 선수루를 가지고 현측에 화포를 장착할 수 있는 카라크선이 있다. 그러나 카라크선은 콜럼부스가 신대륙에의 항해에 사용한 산타마리아호에서 보여지듯이, 선폭(船幅)에 대해서 전후가 짧고 둥그스름한 선형(船型)이었으며 외양항해(外洋航海)를 위해 건현(乾舷)이 높았다.
이 때문에 선내에 포갑판(砲甲板)을 증설하고 현측에 포문을 열어서 갑판에 화포를 장착할 경우 배의 중심이 높게 되어 전복의 위험성이 증가할 뿐 아니라, 둥그스름한 선형때문에 배의 속도도 느려서 군선(軍船)으로서는 적당하지 않았다.
1571년 지중해의 제해권을 둘러싼 오스만투르크제국과 스페인을 중심으로 한 연합해군의 전투인 레판트해전에 있어서의 주역은 갤리선이었고 베네치아의 대형갤리선(갤리어스선)에 다수의 화포를 탑재한 이동 포대(砲臺)도 출현하고 있다.
16세기 말 이후에는 포갑판(砲甲板)을 설치해서 조수(漕手)를 없앤 범장(帆裝) 중심의 카라크선의 선수루를 폐지한 외향항해가 가능한 갈레온선이 출현하고, 현측에 다수의 화포를 장비하고 이후의 유럽군선의 기본이 되어 갔다.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와 영국함대의 해전이 있었는데 스페인함대는 갤리어스선을 선두에 세우고 다수의 갈레온선을 레판트해전과 같이 밀집시켜 초승달형 진형(陣形)으로 배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위풍당당한 진형은 갈레온선의 현측 화포의 위력을 전혀 발휘할 수 없었으며, 드레이크가 이끄는 영국함대의 진형을 무시한 접근과 현측포화를 가하는(사략선[私掠船]을 끌어 모은 것으로 밀집한 진형운동[陣形運動] 등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소형 갈레온선의 위력을 충분히 발휘한 전법에 패배하고 있다.
16세기 말 유럽에서의 두 해전은 흥미 깊은 다음의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즉 이 시기는 유럽 군선의 급속한 발달시기로 신구교대의 시기였지만 그 효과적인 전술에 관해서는 모색중이었던 것이다.
한편 동아시아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원(元)시대인 1332년에 화포의 주조가 행해져서 동서에서 거의 동시에 화포가 제조되고 있던 사실을 주목했으면 한다. 그후 명대에 들어서 각종 대형 화포(대형 대장군포[大將軍砲], 약통후장식불랑기포[藥筒後裝式 佛郞機砲], 산탄을 발사하는 구포[臼砲]인 벽력포[霹靂砲] 등)와 소형으로 병사 혼자서 다룰 수 있는 삼연식 총통[銃筒], 로케트로 화살을 발사하는 화전(火箭) 등이 제조되게 되었다.
이러한 명의 총통류는 어느것이나 총통이 짧아서 병사가 겨드랑이에 끼고 발사하기 때문에 정확한 조준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다수가 동시에 발사해서 적군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었다.
한편 해상에 있어서 명수군(明水軍)은 화포를 적극적으로 도입해서 승선한 병사가 적과의 거리에 따라 다양한 화포를 이용해서 교전하게 되어 있었다. 고려 후기에는 이러한 중국 화포가 도입되어 화포를 모르고 있던 왜구를 상대로 위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조선의 교묘한 강경, 회유 양면의 대응에 의해 전기 왜구가 종식되자 국제관계도 안정되었기 때문에 군사기술 발달은 일시적으로 정지상태가 되었다.
15세기 대마도에 있어서 주조제(鑄造制) 화포가 존재했던 것이 보고되고 있지만, 소규모 영주들이 동원되어 개인전의 총화(總和)와 같은 형태로 전투를 치룬 일본의 전장에 있어서, 조직적으로 운용, 장비(裝備)되지 않으면 안되는 화포는 중요한 병기로서 발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후 1543년에 일본에 화승총이 전해져서 활에 대신한 신병기로서 급속히 보급되어 갔다. 그러나 화승총으로 적을 쓰러뜨려도 그것은 군공(軍功)으로 표창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군공에 대한 은상(恩賞)이 중요한 전투참가 동기의 하나였던 일본의 봉건군대에서 화기의 위상은 낮았으며, 화승총 이외의 화기 사용 전술이나 대형 화포도 발달하지 못했다.
이 화승총은 개별 영주에 대해 영지의 규모에 따라서 정해진 수를 준비시켜 참진(參陣) 시에 사용하게 하였는데 영주의 장비는 자기부담이었다.
임진왜란에 있어서 히데요시군(秀吉軍)은 화승총을 대량으로 사용하였고 또한 그때 까지의 전란을 통해 실전경험이 풍부한 장수와 병사가 다수 참가했기 때문에 제 전투에 있어서 우위를 점했다.
명의 화포는 성곽 등의 고정진지(固定陣地)에 설치되어 성을 공격하는 군에 대한 병기 또는 공성(攻城)에 사용하는 병기로서 발달되어 있었다.
한편 쓰시마에서 조선으로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 경에 화승총이 헌상되었지만 제조에는 이르지 않았다. 그 때문에 사용 화기를 볼 경우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군은 중국식의 화포, 즉 포와 총통(銃筒)을 장비하고 있었지만 많지는 않았고 또한 당시의 포는 이동이 어려워서 야전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이러한 포 등의 화기는 행주산성, 진주성의 방어전 등에서 위력을 발휘하였다. 이 때문에 야전에서의 원거리 병기로서 여전히 활이 중심이 되지 않을 수 없었고, 화살에 로케트를 붙여서 비거리를 늘린 신기전(神機箭), 화전(火箭)과 같은 화기가 신병기로서 사용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집단으로 조직적 운용이 필요한 포는 명, 조선의 군대에 운용되고 있었지만, 반대로 봉건영주에 의해 구성된 히데요시군은 포에 관해서 알지 못하였고 (그 후 네덜란드인이 전해서 사용한 적도 있지만 병기로서는 정착하지 못했음), 간편하게 이동 가능한 개인화기인 화승총을 장비했던 것이다.
공성용(攻城用)의 대형 화승총도 제작되었지만 어디까지나 혼자서 조작해서 발사할 수 있는 크기로 한정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제 지상전에 있어서 우세를 점했던 히데요시군도 조선군이 포획 화승총을 장비하고 나아가 포로 등을 이용해서 이를 제조, 사용하게 되자 급속히 군사기술 면의 우위를 상실했던 것이다.
그러나 해전에 있어서의 양상은 크게 달랐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기동성이 뛰어난 중형의 조수선(漕手船[돛을 이용한 항해도 물론 가능])을 중심으로 화포 탑재를 전재로 한 군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집권적 국가체재 하에서 조직적, 집단적 전투를 전제로한 조선군이었기 때문에 화포의 장착과 운용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것은 이순신과 같은 통솔력이 뛰어난 명장 밑에서 그 위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이순신 지휘 하의 수군에 화포 장비가 중시되고 있던 사실은 귀갑선(거북선)을 볼 때 일목요연하게 알 수가 있다.
귀갑선은 적병이 올라 타는 것을 방지할 수 있지만 적선으로 옮겨 타는 것도 특별히 예정하지 않았던 구조로 보여지며, 예상되는 좁은 해상에서의 접근전에 대응한 구조이기도 하였다.
화포전(火砲戰)을 중심으로 하는 이후의 군선 발달사를 생각한다면, 선수(船首), 현측에 동시에 화포를 장착한 귀갑선은 선진적인 화포전술과 그것에 적합한 구조의 군선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히데요시군의 군선은 민간선박과 같은 구조로 비교적 소형이었고 군선으로 의 전용에 있어서 총안(銃眼)을 설치하거나 총탄과 화살에 대한 방어용의 대나무다발을 실은 정도였다.
이것은 적선으로 접근해서 화승총, 화살에 의한 저격이나 불화살을 이용한 화공을 하거나, 적선으로 옮겨 타서 도검에 의한 전투와 방화를 한다고 하는, 휴대 화기와 도검을 사용한 개인전 중심의 육상전법(陸上戰法)에 준거한 것이었다.
조직적 운용을 필요로 하는 대형화포를 장비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원거리의 해상전투에 있어서 화포를 장비한 이순신의 수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또한 구조적으로 약했기 때문에 접근전에 있어서도 이순신의 군선에 들이받치면 쉽게 파괴, 격침되어 버렸다.
히데요시 수군에도 처음부터 군선으로 건조되어 지휘와 저격용의 누각을 갖춘 대형 안택선(安宅船[아타기부네])이 존재했지만, 둔중(鈍重)했기 때문에 실전에 있어서 이순신의 수군을 이길 수는 없었다.
일본군선(日本軍船)의 수준은 해상 이동의 수단이라고 하는 왜구시대의 선박 사용방법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16세기에 있어서의 유럽 기원의 신군사기술의 유입은 일본, 동남아시아라고 하는 주변지역에 있어서 지역통합과 강력한 중앙정권의 창출에 기여하는 혁신적인 것이었지만, 동아시아에 그 때까지 축적되어 있던 군사기술의 수준은 결코 그것에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 때문에 16세기 유럽과 동아시아의 만남은 군사적인 면에 있어서 19세기의 경우처럼 충격력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화승총이나 명말(明末)에 네덜란드에서 명에 도입되어 청군을 괴롭힌 홍이포(紅夷砲)와 같은 신형화포라 해도 즉시 자국에서의 생산이 가능한 기술수준에 있었으며, 약간의 제도적 변경만으로 자국군(自國軍)의 장비로서 추가하는 것이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