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초반으로부터 6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중국과 조선은 심한 갈등을 겪었다.
중국에서는 조선을 "조선수정주의"라고 피판을 했고,
조선에서 역시 중국을 "수정주의"라고 했다.
한때 중-조 국경선에 스피커를 걸어놓고
서로 상대방을 욕하기까지 했다.
이런 갈등을 겪에 된데는 주로 3가지 원인이 있다고
최근 TOM.COM의 BBC에 오늘 글이 밝혔다.
1] 조선측에서 중국 동북지역에서 지하활동 전개
중국 조선족들은 대부분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조선반도(한반도)로부터 중국 동북에 이주한 사람들로
거의 다가 북한을 마주하고
동북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광복이 나고, 특히 6.25이후
조선에서는 중국 동북지역에서 지하활동을 진행했다.
이들은 주로 중국 조선족들에게
조선족들의 조국은 조선(북한)이고
영수(지도자)는 김일성 장군이라는 사상을 심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족들은 결코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2] 1959년 중국 대약진 시기
1959년 중국이 3년 자연재해와 "대약진"등 정치운동으로
3년간 어려운 시기를 겪게 되었다.
이때 조선측에서는 중국 조선족들이 대거
조선으로 탈출하도록 부추겼으며
변경지역에 접대소를 세워 월경자들을 맞이했으며
이들이 "천리마운동(새마을 운동과 비슷함)"에 참가하도록 하였다.
3] 백두산 천지문제
만주국 때까지 중국측에서 백두산 천지를 차지하고 있었
중-조국경은 백두봉(장군봉)분수령 동쪽 아래로 20km되는 곳에
그어져 있었다고 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고
중-조수교가 이루어져서 얼마 되지 않아
조선방문단은 중국을 방문하고
백두산천지를 갈라 줄 것을 요구했다.
조선측에서는
"천지는 위대한 김일성 장군님이
혁명을 했던 혁명의 발원지"라고 하면서
중국측에서
조선인민들의 깊은 무산계급의 감정"을 생각해
천지를 갈라줄 것을 바란다고 했다.
하여 중국측에서는
백두산천지의 반과 이에 따른 분수령 이동의
산봉우리 3개를 갈라 주었다.
조선측에서 접수한 이튿날
"백두봉"은 "장군봉"으로 이름을 고쳤다.
이런 3가지 원인으로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중-조사이에 갈등이 일게 되었고,
급기야는
서로 "수정주의"라고 질타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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