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핏 고개를 돌린 소녀는 부끄러움을 타며 금세 고개를 되돌릴것 같다. 방심한 듯이 살짝 벌리고 있는 입. 어둠을 배경으로 한줄기 빛이 소녀의 얼굴을 비춘다. 빛은 눈과 입술에 영롱한 하이라이트를 남고 그녀의 목덜미를 지나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눈물 모양의 진주 귀고리가 그곳에 없었다면 화면의 반 이상은 공허한 어둠에 잠기고 말았을 것이다. 진주귀고리의 영롱한 하이라이트는 눈망울, 입술의 하이라이트와 함께 삼각구도를 이루어 화면을 안정시키면서 동시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이 작품에는 그저 '진주귀고리의 소녀'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이 소녀는 누구인가?
베르메르, 진주귀고리 소녀
그림은 말이 없다. 그러나 이 침묵은 오히려 주위를 달변가로 만들어버리는 침묵이다. 이 침묵의 연금술은 한 폭의 그림에서 두터운 소설책을 뽑아내는 마술이 되기도 한다. '진주귀고리의 소녀'(트레이시 슈발리에),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레베르테), '곤두박질'(마이클 플레인), '모나리자와 거짓말쟁이'(E.L.코닉스버그) ,'여자와 일각수'(트레이시 슈발리에)은 한 폭의 그림에서 촉발된 상상력에 상상이 더해져서 독자적인 문학 작품이 된 경우들이다.
'이 그림은 무엇을 의미하고 왜 그려졌는가'라는 가려움 같은 궁금증을 작가들은 미술사가들을 무색케 하는 풍부한 지식과 지식에 생기를 부여하는 이야기 구조로 해소해 준다. 일단 소설적인 이야기 구조가 생기고 나면 이것이 다시 영상의 언어로 옮겨지는 것은 아주 쉬운 일처럼 보인다. '진주귀고리의 소녀'는 17세기의 작가 요하네스 베르메르가 남긴 불후의 명작이다. 모호한 표정과 알 수 없는 매력으로 '북구의 모나리자'라고 불리우는 이 작품은 단 한번도 전시회를 위해 해외로 반출된 적이 없다. 그 만큼 작가의 조국인 네덜란드에서 소중한 작품이다. 이 그림에 기대어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소설과 영화가 탄생한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
베르메르, 델프트 시의 풍경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소설 ‘진주 귀고리 소녀’는 베르메르의 그림을 아련한 사랑의 이야기로 재창조한다. 17세기의 네덜란드의 도시 델프트.
가난으로 베르메르 집안의 하녀로 가게 된 16세 소녀 그리트가 바로 '진주 귀고리 소녀'이다. 하녀인 그리트가 주인인 베르메르와 나누는 사랑의
과정이 곧 그림의 완성 과정이 된다. 사랑하면서도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면서도 사랑에 빠지게 되는 어찌할 수 없는 순간. 그 순간이 ‘진주귀고리
소녀’라는 영원한 예술작품으로 완성이 된 것이다. 그림은 바라보지만 말 할 수 없고, 알고 있지만 다가가지 못한 채 오랫동안 조심스레 간직했던
사랑의 결과물이 되는 셈이다. 소설가는 화가의 그림처럼 밀도있게 17세기의 삶을 재현해낸다. 더불어
이 작품외에도 화가의 다른 대표작들이 어떻게 그려졌는가를 당시의 삶의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도출해낸다. 사실 베르메르의 그림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대부분의 일들이 네덜란드의 중산층 가정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일어난다. 베르메르는 여인들이 입고 있는 옷과 카펫의 질감, 뿌옇게
흐린 창문의 느낌 등등 어느 하나 소홀히 하는 점 없이 그 시대의 삶을 우리에게 전한다.
베르메르, 포도주 잔을 든 여인
놀랍게도
그 시절은 지금보다도 미술이 더 삶에 밀착해 있었던 것 같다. 스스로 모델이 되고 원하는 그림을 주문하고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이 저자 거리의
화제가 될 정도로 말이다.당시의 그림은 교훈적인 의미를 담아 당대의 삶에 직접 개입하기도 한다. 21세기의 우리에게는 단지 도상학적인 의미만을
갖는 것이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도덕적 메시지가 된다. 예컨대 소설에서 반 라위번이 하녀와 함께 모델로 섰다던 '포도주를 든
여인'에는 ‘유혹과 정조’라는 테마를 담고 있다. 여인은 남자(뚜쟁이 역할)가 건넨 와인잔을 받아들고 있고 남자의 사탕발림에 잔뜩 들떠 있다.
여인의 표정으로 보아 그 다음 이야기는 너무 뻔하다. 그녀는 유혹을 받아들일 거다. 그림 안 쪽에 고개를 돌리고 있는 남자는 여인과의 유희를
꿈꾸며 여인이 그 잔을 들이키길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벽에 걸려있는 초상화는 아마 부재중인 남편의 초상화일 거다. 엄정한 도덕적인 경고와
풍자를 담은 그림이다. 이런 유혹과 정조라는 도상학적인 의미는 그리트의 시대에는 직접적인 의미를 갖는다. 함께 모델을 했던 하녀가 그림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반 러위반의 아이를 임신함으로써 그리트에게는 직접적인 경고의 의미를 갖게 된다.
베르메르, 물주전자를 든 여인
슈발리에의 이 소설에서는 그림 속의 주인공이 신비의 장막을 걷고 나와서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1인칭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진주귀고리 소녀의 의상을 보면 초상화를 의뢰할 만한 신분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값비싼 초상화의 주인공이 되었을까? 정보없음이 무제한의 정보창출로 연결된다. 완벽한 가상의 인물인 그리트는 거침없이 소설을 이끌어나간다. 또 초상화의 주인공만큼이나 작가 베르메르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없다는 점도 중요하다. 소설은 그리트가 베르메르에 대해서 갖는 만큼의 거리로 베르메르를 독자에게 보여준다. 처음에는 하녀가 바라보는 바깥주인으로, 열정적이면서도 엄격한 예술가로, 그리고 사랑하는 한 남자로 말이다. 이런 간접적인 정보 제공은 검증되지 않은 작가의 성격을 함부로 드러내는 위험으로부터 소설을 보호해 주는 장치가 된다. 그래서 소설을 다 읽고 난 뒤로도 베르메르는 여전히 신비한 작가로 남아있게 된다. 그림도 다른 사람이 소유하기 때문에 그리트의 삶으로부터 떠난다. 그리트 본인에게도 그림은 다가설 수 없는 신비로운 것으로 남게 된다.
카메라옵스큐라를 함께 들여다 보는 그리트와 베르메르
영화는 그리트와 베르메르의 사랑을 더욱 농도 짙고 격정적인 것으로 만든다. 고풍스러운 영화의 색조는 조명 시설이 발달하지 않았던 17세기의 네덜란드의 삶으로 관객을 직접적으로 이끈다. 그리트와 베르메르가 나눈 내적인 정념은 베르메르의 아내의 입에서 터져 나온다. 그리트를 그린 그림을 본 순간 그녀는 외친다. '이 그림은 음란해요!' 소설에는 없는 대사이다. 영화는 더 깊숙한 곳을 찌른 셈이다. '육체적인 접촉 없이 나눈 사랑의 흔적'을 그림에서 본 것이다. 영화가 소설보다 관능적인 것은 직접적인 이미지를 제시하는 영화의 장르적인 특성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리트 역을 맡은 스칼렛 요한센이라는 배우의 매력 때문이기도 하다. 2003년에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로 베니스영화상 여우주연상을 받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조용한 열정과 숨겨진 관능은 이 사랑을 더욱 농도 깊은 것으로 만들어낸다.
베르메르가 귀고리를 달아주는 장면
그림이
완성되고 10년 뒤 베르메르의 유언으로 진주귀고리는 그리트에게 전달된다. 그림은 둘 중 누구도 가질 수 없는 것이었기에 귀고리만이 결정적인
'사랑의 흔적'을 담은 물건이 된다. 영화는 귀고리에 대해서 보다 직설적으로 말한다. 베르메르가 귀고리를 달아주기 위해 직접 귀를 뚫는 행위는
다분히 암시적이다. 스칼렛 요한센의 그리트는 성숙하고 깊다. 그래서 영화의 맥락에서 보면 그림은 충분히 보는 이에 입장에 따라 ‘음란'할 수
있다. 여기가 베르메르의 '진주귀고리의 소녀'와 슈발리에의 '그리트' 그리고 스칼렛 요한센의 '그리트'의 구별점이 된다.
진주귀고리 소녀(스칼렛 요한센)
영화의
엔딩 장면에 오랫동안 보여지는 베르메르의 원화는 새로운 해석을 담고 아찔한 매혹을 뿜어낸다. 영화가 끝이 났으니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자. 왜
‘진주귀고리 소녀’인가? 어쩌면 이 제목은 ‘모자 쓴 소녀’만큼 일반적인 진술이다. 베르메르의 많은 그림 속에서 여인들은 진주귀고리와 목걸이를
하고 있다. 당시 진주는 동양에서 수입된 값비싼 보석으로 부유한 부르주아 계층에서 가장 유행하는 장식품이었다. 그림속의 진주는 허영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정조를 의미하는 보석으로 최고의 결혼 선물이기도 했다. 정조를 상징하는 진주를 세상의 소리를 담는 귀에 건다는 것은 순결하고 진실한
말이 아니면 듣지 않겠다는 의미가 된다. 정조를 상징하는 진주 귀고리와 동양풍의 터번 장식 때문에 이 작품을 결혼을 앞둔 젊은 소녀의 초상화로
간주하기도 한다. 다소 밋밋한 미술사적인 해석도 역시'진주귀고리의 소녀'가 사랑과 깊이 관련 있음을 보여준다. 어쩌면 베르메르의 ‘진주귀고리
소녀’는 슈발리에의 ‘그리트'이자 스칼렛 요한센의 '그리트'이다. 동시에 둘 다 아니다. 그림 속의 소녀는 여전히 매혹적인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볼 뿐이다. 또 다른 상상을 유혹하면서 말이다. 그림은 여전히 말이 없다. <이진숙> 출처
: 푸른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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