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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가' 불 붙이는 사우디의 불안한 미래

鶴山 徐 仁 2005. 8. 15. 00:19
'고유가' 불 붙이는 사우디의 불안한 미래
왕정 부패·사치에 대한 극단주의자들 불만이 테러 양산
석유시설 테러에 취약 … 공격받을 땐 국제유가 100달러도 훌쩍
입력 : 2005.08.14 13:54 57'

사우디아라비아의 파드 국왕이 지난 8월 1일 사망한 직 후 국제유가가 불안하게 움직이고 있다. 파드 국왕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이날 미국 뉴욕 현물시장에서의 서부 텍사스유 거래가격은 배럴당 62.30달러까지 치솟았다. 세계 최대 산유국이자 최대 원유수출국인 사우디의 정세에 대한 불안감이 반영된 때문이다.


▲ 지난 8월 2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의 한 모스크에서 파드 전 국왕의 시신을 압둘 아지즈 왕자(맨 앞 가운데) 등 왕족들이 운구하고 있다.
파드 국왕은 1995년부터 병석에 누웠다. 국왕의 실질적인 업무는 동생인 압둘라 왕세제가 맡아왔다. 파드 국왕이 사망하기 얼마 전부터는 식물인간 상태에 빠졌었다는 것, 또 그의 뒤를 압둘라 왕세제가 이을 것이라는 것 등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실제로 파드 국왕이 서거한 이후 압둘라가 새 국왕이 됐다. 신임 압둘라 국왕은 8월 4일 “사우디의 외교정책이나 산유정책 등 그 어느 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모든 것이 예상대로 진행되고 있음에도 사우디 내정에 대한 불안감이 그치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사우디의 석유시설이 테러리스트의 공격으로부터 극히 취약한 상태’라는 분석이 나오기 때문이다. 최근 발간된 미 중앙정보국(CIA)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아주 작은 폭발물을 가지고도 사우디의 채유시설을 2년 이상 못쓰게 만들 수 있다는 것. 그럴 경우 국제 유가는 배럴당 100달러 수준을 훌쩍 뛰어넘게 된다.


▲ 2002년 8월 스위스에서 휴가를 보내는 파드 전 국왕이 휠체어를 타고 이동하는 모습.
사우디의 왕정 자체가 가진 불안정성도 국제 석유시장에 불안한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사우디 왕정의 부패와 사치, 무능은 국제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이에 대한 불만이 늘어나면서 극단주의적인 테러에 가담하는 사우디의 젊은이들이 끊임없이 늘고 있다. 왕실 내부의 권력암투도 언제 이 나라를 무정부상태로 빠뜨릴지 알 수 없다. 이 때문에 몇 년 전 미 CIA는 사우디 왕정이 21세기 초반에 사라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예상하기도 했다.

파드 전 국왕이나 신임 압둘라 국왕이나 모두 사우디의 불안한 내정을 해소하기 위해 나름대로 개혁을 추진하고 사회정의를 약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정은 호전되지 않고 있다. 과거 사우디 하면 ‘석유로 벼락부자가 된 나라’라는 이미지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9·11테러를 사주한 오사마 빈 라덴과 같은 테러리스트가 연상되기 십상이다.

이 나라의 내적인 불안정은 근본적으로 이슬람교의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를 차지하고 있는 사우디 왕정이 검은 황금으로 통하는 석유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이는 건국 당시에 이미 배태된 것이기도 하다.

와하비즘

파드 국왕은 사망 다음 날 리야드의 평민 공동묘지에 묻혔다. 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국왕의 시신이 대리석관은 고사하고 나무관에도 담기지 못한 채 헝겊에 싸여 비석도 없이 매장되는 광경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했다. 이슬람교에서는 원래 장례식을 조촐히 한다. 사람이 죽은 뒤에 묘지를 찾아 추모하는 일이 거의 없다. 가까운 팔레스타인만 가도 사람이 죽으면 비석을 세워주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우디에서 국왕조차 이처럼 간소하게 매장하는 것은 이 나라를 지배하는 엄격한 이슬람 종파인 와하비즘 때문이다.

와하비즘은 사우디아라비아를 떠받치는 정신적 기둥이다. 사우디아라비아를 흔히 ‘사우드 가문과 셰이크 가문의 동맹체’라고 말한다. 사우드 왕가가 세력을 넓혀가면서 종교지도자들의 도움이 절실해졌다. 그런데 종교지도자 가운데 사우드 왕가를 절대적으로 지지한 세력이 바로 엄격한 이슬람인 와하비즘(Wahhabism)을 고수하는 셰이크 가문이었다. 두 가문의 결혼 등을 통한 동맹이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를 건설하는 주춧돌이 됐다. 지금도 사우드 왕가가 정치권력을 차지하고 있다면, 와하비즘을 수호하는 셰이크 가문은 이 나라 국민의 정신세계를 지도한다.


▲ 부시 미 대통령은 지난 4월 25일 압둘라 국왕을 자신의 텍사스 크로퍼드 목장으로 초대해 긴밀한 대화를 나누었다.
와하비즘은 이슬람 가운데에서도 가장 엄격하고 보수적인 특성을 가진다. 와하비즘은 무하메드 와합(Muhammed Wahhab·1703~1787)이 창시한 것이다. 당초에는 이슬람 개혁운동으로 출발했다. 와하비즘은 이슬람의 예언자인 마호메트 이후에 나타난 코란에 대한 어떠한 해석도 부정한다. 이들은 근대적이거나 현대의 서구적인 삶 등 코란에 들어있을 수 없는 것은 모두 코란에서 일탈하는 것이라고 보고 저주한다.

이들은 사우디아라비아에 전화, 방송 등이 시작되는 것이나 여성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는 것 등 개혁정책을 ‘악마의 가르침’이라고 여겨 저항했다. 1965년에는 TV방송에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나 경찰이 발포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사우디에서는 지금도 함부로 사진을 찍을 수 없다. 고급 쇼핑몰에서도 사진기를 들면 청원경찰이 다가와 저지한다. 저잣거리의 일반인일수록 사진촬영에는 거부감이 심하다. 이 나라에는 아직도 영화관이 없다. 남녀가 섞여 앉을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와하비즘은 여성의 얼굴을 내놓게 하는 정도의 작은 개혁도 이슬람 신앙을 훼손한다며 반대한다. 범죄에 대한 처벌도 코란에 적힌대로 한다. 사우디에서는 지금도 도둑질을 하면 왼손을 자르고 간통한 자는 돌로 쳐죽인다. 살인과 성적인 방탕 등 주요 범죄에 대해서는 참수형에 처한다. 매일 기도시간이 되면 수염을 길게 기른 종교경찰이 회초리를 들고 차를 타고 다니며 거리를 돌아다니거나 문을 닫지 않은 상점을 적발하고 처벌한다.

돈방석에 앉은 왕가

사우디 왕가가 돈방석에 앉은 것은 이란이 이슬람혁명으로 석유를 수출하지 못하게 된 1979년부터 1980년까지의 2년간이었다. 1982년 사우디 중앙은행에는 1550억달러의 현금이 쌓였다. 1986년까지는 배럴당 30달러를 웃돌던 석유값이 10달러 수준으로 추락하면서 사우디 경제는 난관에 부닥쳤다. 그러나 한번 사치에 물든 왕실은 헤어나오지 못했다.

파드 국왕 자체가 사치의 대명사였다. 국내에서 여행할 때는 바퀴가 18개나 달린 호화스런 벤츠 트럭을 이용했다. 도처에 호사스런 궁전을 지었다. 미국 백악관과 똑같은 형태의 궁전을 짓기도 했다. 파드 국왕은 미국의 실내장식가를 고용해 자신의 전용기인 보잉 707기에 3층짜리 엘리베이터, 고급 샹들리에를 설치하고 각종 금장식으로 치장했다.


▲ 2002년 5월 13일 리야드의 한 외국인 거주단지에 자살테러가 발생해 20여명이 사망했다.
7000명에 달하는 왕자들의 사치스런 생활도 국제적인 화제가 됐다. 왕자들은 앞을 다투어 거대한 호화주택을 지었다. 또 유럽의 고급 휴양지와 도박장을 누비며 돈을 물 쓰듯 쓰며 타락한 생활을 일삼았다. 이러한 행태들이 일반 국민과 와하비즘을 가르치는 신학자의 비판의 대상이 됐음은 물론이다.

석유값 폭락과 왕자들의 사치로 인해 1990년이 되면서 이 나라의 외환보유고는 모두 사라졌다. 개인소득도 2만달러 수준에서 7000달러 수준으로 떨어졌다. 1990년 걸프전은 이처럼 사우디의 재정이 최악의 상태에 빠진 상황에서 발생했다.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쿠웨이트로부터 40만명의 난민이 사우디로 몰려들었다. 미국은 후세인이 사우디의 동부 유전지대를 무력으로 차지할 것을 우려했다. 당시 딕 체니 미 국방장관은 이라크군을 찍은 위성사진을 가지고 파드 국왕을 찾아가 “후세인이 사우디를 침공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며 “미군 주둔을 허락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슬람교도에게 이는 성지에 이교도가 발을 들여놓게 하는 배교행위나 다름없는 일이다. 파드 국왕은 “이라크군이 쳐들어오면 사우디인을 받아줄 나라가 있는가”라며 미군 주둔을 승인했다. 국가에서 인정하는 최고 신학자도 ‘아주 절박한 상황에서는 이교도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는 율령을 공포했다.

그러나 미군 주둔으로 인해 파드 국왕은 적지 않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국내에서는 왕실의 부패에 대한 비난이 이어졌다. 당시 영국에서 활동하던 한 반체제인사는 “매년 석유 수입의 30%를 무기 구입에 사용하고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이교도를 받아들이고 먹여주어야 하는가”라고 분노했다. 국민의 불만은 반체제세력의 조직화로 이어졌다.

1993년 이슬람 학자와 지식인이 ‘합법적인 권리를 지키는 위원회’를 구성하고 왕정에 이슬람을 철저히 준수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왕정은 비밀경찰을 동원해 이들을 체포하고 가혹하게 탄압했다. 1994년에도 사우디 왕정은 군대를 동원하면서 비판적인 내용의 설교를 하던 인기있는 성직자들을 체포했다. 그 뒤부터는 반체제 세력은 테러를 벌이며 저항에 나섰다.

민주화는 가능한가


▲ 지난 2월 사우디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한 유권자가 투표권을 점검하고 있다.
파드 전 국왕은 개인적으로는 가장 부자이기도 했지만 사우디의 국세가 기우는 동안 재위했던, 행복하지 못한 왕이었다. 그가 왕이 된 1982년부터 국제유가는 폭락에 폭락을 거듭했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이슬람 학자와 국민의 반발이 점증하는 상황에서 걸프전이 발생해 미군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1960년대 처음 공직을 맡았을 때부터 일관되게 개혁적인 생각을 가졌던 인물이다. 교육부 장관으로서 이슬람의 반대를 물리치며 여성교육을 실시했다. 걸프전쟁 이후에도 파드 국왕은 국왕을 보좌하는 고문위원회를 설치하는 등의 개혁작업을 실시했다.

2001년 9·11테러에 가담한 범인 19명 중 15명이 사우디 청년인 것으로 밝혀지면서 미국 정부로부터는 ‘민주화를 실천하라’는 압력이 가해졌다. 이에 대해 사우디는 ‘지방선거를 실시하고 여성 참정권도 인정한다’는 약속을 했지만 제대로 실현되지는 않고 있다. 와하비즘에 충실한 보수적인 이슬람의 압력 때문이다.

미국은 사우디 왕정에 민주적 개혁을 요구한다. 사우디 왕정이 서구적 민주개혁을 추진할수록 와하비즘을 고수하는 이슬람으로부터 반발을 사 좌초되기 일쑤다. 그럴 경우 개혁은 코란에 바탕을 둔 내용으로 변질된다. 왕정으로서는 개혁을 하려 할수록 사회는 오히려 보수화 성향이 강화된다는 어려운 문제를 풀어야 하는 입장에 처해 있는 것이다.


▲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한 직후인 2001년 10월 7일 오사마 빈 라덴(왼쪽)과 이집트 출신의 아이만 알 자와히리가 나란히 앉아 미국에 대한 공격을 다짐하는 모습을 담은 비디오.
◆와하비즘과 오사마 빈 라덴

각국의 과격 이슬람주의자 대거 입국

신학교에서 젊은이들 선동

와하비즘이 사우디 건국의 주춧돌이었지만 앞으로는 사우디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오사마 빈 라덴은 이러한 경고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원래 와하비즘은 이슬람의 성지가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를 엄격한 이슬람국가로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런데 1950년대에 이집트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이 대거 유입하면서 이 나라의 와하비즘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당시 이집트에서 집권했던 나세르는 아랍사회주의를 추구했다. 당연히 이슬람사회를 구현하자는 무슬림형제단에 대해 일대 탄압을 벌였다. 무슬림형제단 지도자들은 나세르의 처형이나 투옥을 피해 대거 사우디로 몰려들었다. 팔레스타인에서도 이스라엘의 탄압을 피해 과격한 성향의 학자들이 대거 사우디로 입국했다. 이들은 자신과 성향이 비슷한 와하비즘을 가르치는 신학교에 쉽게 자리잡을 수 있었다. 석유수출로 돈을 번 사우디 왕정도 이슬람 신학자들이라면 관대하게 지원했다.

사우디 청년에게 와하비즘을 가르치던 신학교는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출신 과격파의 영향을 받고 반미·반이스라엘·반왕정의 극단주의적 이슬람주의를 전파했다. 신학자들은 “이슬람이 정복한 땅에는 이슬람이 전파돼야 한다”며 팔레스타인에서의 이스라엘 축출과 사우디에서의 미군 축출이 이슬람의 의무임을 강조했다. 오사마 빈 라덴도 청년시절 이러한 신학자에게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45명의 왕자 중 수다이리 왕비의 7형제가 국정 주물러

압둘라 신임국왕 견제하며 차기왕권


▲ 왼쪽부터 압둘라 국왕, 슐탄 국방장관, 나예프 내무장관, 투르키 주미 대사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위 계승은 형제 간에 이어진다. 이 나라 사람들은 중요한 일이 있으면 형제들이 모여 논의한다. 그리고 일단 결정되면 철저히 단결한다. 사막에서 부족생활하던 데서 나온 전통이다.

초대 국왕 압둘아지즈는 22명의 부인으로부터 45명의 왕자를 두었다. 압둘아지즈 국왕이 가장 사랑한 왕비는 수다이리였다. 수다이리 왕비는 모두 7명의 왕자를 낳았다. ‘수다이리의 7형제’로 불리는 이 일곱 왕자들이 핵심요직을 차지하며 국정을 주무르고 있다.

파드 전 국왕이 쓰러진 1995년부터 압둘라가 국가행정을 지도하면서도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은 ‘수다이리 7형제’의 견제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파드 전 국왕도 ‘수다이리 7형제’ 중 하나였으며 압둘라 국왕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된 슐탄 국방장관, 그 다음 서열인 나예프 내무장관 등이 모두 ‘수다이리 7형제’ 멤버이다. 슐탄은 고령인 데다 암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그 다음 동생인 나예프(72) 내무장관이 사우디 왕가의 다음 세대를 이어갈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압둘라 국왕은 암살당한 파이잘 국왕의 아들들과 연합해 수다이리 형제들을 견제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압둘라 국왕 취임 직후 신임 미국 대사가 된 투르키 왕자, 사우드 외무장관 등이 파이잘 전 국왕의 아들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