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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綠野]Schenberg, Arnold 쉔베르크

鶴山 徐 仁 2005. 8. 7. 18:55
Schenberg, Arnold 쉔베르크 
Schenberg, Arnold 쉔베르크 (1874.9.13~1951.7.13)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빈 출생.
12음기법의 창안으로 20세기 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으며, 또 베르크, 베베른 등 많은 뛰어난 제자를 육성, 그들과 더불어 제2차 빈악파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경제적으로 윤택하지 못하여 거의 독학으로 음악의 기초를 닦았다.
12음기법은 조성조직(調性組織)을 대신하는 이론으로서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작품 25, 21)에서 이룩되었다.
이 무렵부터 비난의 대상이었던 그는 점차 인정받게 되어 25년에는 베를린의 예술아카데미의 교수로 초청되어 이듬해 베를린으로 이사하였다.
그러나 나치스의 대두와 더불어 유대인이었던 그는 33년 미국으로 망명하였고, 그 후로는 미국에 영주하였다.
그는 만년에도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히틀러에 대한 분노를 곁들인 《나폴레옹에로의 오드》(작품 41, 42)와 유대인 대량학살을 소재로 한 《바르샤바의 생존자》(작품 46, 47) 등은 특히 유명하다.

 

Schonberg, Amold (1874.9.13~1951.7.13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현대 음악에 있어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작곡가로 후세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적인 재질이 뛰어났는데, 12세 때부터 바이올린에 능했고 바이올린 소품을 쓸 수 있었다. 1899년, 그의 초기의 작품인 현악 6중주곡 [정화된 밤]은 걸작인데, 낭만파에 속하는 작품이다. 그 후 1903년에 교향시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를 작곡했고, 관현악곡 [구레의 노래 Gurre lieder] 등 대규모적인 작품을 만들어 냈다.

그가 1906년에 작곡한 제 1실내교향곡 같은 것은 조성은 있지만 점차 낭만적인 방향에서 떠나 실내악적, 대위법적인 경향이 강해짐을 알 수 있다. 1908년, 그는 후기 낭만파의 조성을 버리고 1914년에 무조(Atonality)를 쓰게 되었다. 1912년에 5개의 오케스트라곡, 극음악 [기대], 실내악 반주로 된 가곡 [달의 피에로 Pierrot Lunaire] 등의 걸작을 작곡하였다. [달의 피에로]는 변화 있는 수법으로 노래하는 부분에 말하는 멜로디를 사용한 특이한 방법이다.
이 때부터 그는 조성을 버리고 구성력 있는 기법을 발견하는 데 힘썼다.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작품 활동이 중지되었다.

그는 1923년에 5개의 피아노곡과 7개의 악기와 저음을 위한 세레나데 등의 작품을 썼는데, 거기에서 이미 12음 기법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그 후 피아노 모음곡, 관악 5중주곡 등은 12음기법으로 일관된 작품으로서 현대 음악의 역사상 주목할 만하다.
1933년 나치스 독재 정권은 유대인을 박해했는데, 그도 유대인이었으므로, 1933년 미국으로 망명하여 보스턴의 모르킨 음악원의 교수가 되었고, 다시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후배 지도와 창작에 정진하다가 로스엔젤레스에서 작고하였다.
미국에서 쓴 그의 작품도 많이 있는데, 그 작품의 특징은 일반이 이해할 수 있는 조성 음악을 작곡한 것이다. 처음에 쓴 현악 모음곡은 G장조, 관현악 변주곡은 g단조로 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12음 음악을 쓰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그의 새로운 기법은 그의 제자인 베르크와 베베른에 의해 더욱 발전하여 하나의 기법으로 정착을 보았다.

 

미국으로 망명한 오스트리아 작곡가

 

나는 혁명적이 되기를 강요당한 보수주의자이다. 20세기 최고의 예술가 중 한사람이며 역사에 대하여 예리한 감각을 가진 몇 안 되는 사람의 하나인 쇤베르크는 자신을 항상 이렇게 정의했다. 그는 항상 자신을 독일의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전통의 정통적 계승자이며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역사적 필연성이라고 생각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오스트리아군에 입대한 쇤베르크에게 한상관이 그에게 정말로 그다지도 불협화음적이고 현대적인 음악을 만드는 아르놀트 쇤베르크라는 작곡가냐고 물었을때 그는 실로 그답게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도 그런 인간이 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자신에게 의식적으로 부과한 역사적 사명이란 음조체계가 고갈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런 체계에는 종지부를 찍고 대신 새로운 체계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혁명은 달리 적당한 말이 없어 자유스러운 무조주의(1908년부터)와 음열적 12음음악(공식적으로는 1923년부터)이라 불리는 두 단계를 거치게 된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모든 진정한 혁명들이 그러했듯이 그가 일으킨 혁명도 과거를 견고히 하는 양상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의 중산계층의 가정에서 태어난 쇤베르크는 8세 때부터 작곡과 바이올린의 연주를 시작했다. 그 후에 실내악을 연주할 수 있도록 악기를 첼로로 바꾸었고 또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독학으로 음악가로서의 소양을 쌓았다는 사실이다. 유일한 스승은 후에 매형이 되는 작곡가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였다. 처음에 그는 바그너와 브람스에 열중했는데, 그것은 당시로서는 모순된 것처럼 보였다. 사실 그는 바그너적인 확대된 반음계법에서 출발했으나 그의 말년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지배적이었던 것은 브람스적인 형식관이었다.

젊었을 때 쇤베르크는 수많은 작품을 작곡했지만 출판되지는 않았다. 1897년에는 드보르작풍의 현악4중주곡 D장조를 작곡했으며 1898년부터 1900년 사이에는 몇 곡의 가곡을 작곡했고, 그 가운데 12곡이 후에 op. 1부터 op. 3으로 출판되었는데 1898년에 이 가운데 한 곡이 스캔들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때부터 스캔들은 계속되고 있다(훨씬 뒤에 쇤베르크는 이렇게 말했다). 1899년 9월에 쇤베르크는 3주일 걸려서 리하르트 데멜 Richard Dehmel의 시에 기초한 현악6중주곡 정야(淨夜)를 작곡했으며 이 곡은 1902년 빈에서의 초연 때 스캔들을 불러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곧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자주 연주되는 곡의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직접 이 작품의 2개의 현악오케스트라판(1917년과 1943년)을 만들게 된다. 이 작품은 아직 음조를 사용했고 후기 낭만주의적 스타일로 작곡한 최초의 대규모적 작품이다. 왜 지금은 정야때처럼 작곡을 하지 않냐고 나에게 물어보면 나는 대개 나는 전과 똑같이 작곡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면 나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다고 대답한다(1927년의 쇤베르크의 말). 정야는 분명히 바그너의 직접적인 영향을 짙게 보여주었으나 폭넓은 도약음을 사용했고 협화음에 거의 의하지 않는 선율법은 매우 독특하다. 쇤베르크의 결정적인 혁신은 만일 그가 정야에서 교향시의 장려함에 등을 돌리고 브람스의 4중주곡의 엄격한 서법을 본뜨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불가능했을 것이다(아도르노).

쇤베르크의 조성적이고 후기 낭만파적인 시기에는 또 교향시 펠레아스와 멜리상드 op. 5(1903)와 구레의 노래(1900~11)가 만들어졌다. 현악4중주곡 제1번 op. 7(1905)과 실내교향곡 제1번 op. 9(1906)는 이미 이 시기의 작품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다. 독창과 합창, 그리고 오케스트라를 위해서 작곡한 구레의 노래는 방대한 수의 연주자를 필요로 했다. 착상은 1900년이었으나 1911년이 될 때까지 오케스트레이션이 만족하게 완성을 보지 못했다. 1913년 빈에서 이루어진 이 곡의 초연은 대성공을 거두었으나 쇤베르크가 거둔 이 성공은 이른바 사후의 명성이었다. 왜냐하면 이 명성은 이 수년 사이에 이미 근본적으로 스타일을 바꾼 작곡가가 태어난 고향의 거리에서, 때로는 증오에 가까운 적의와 때로는 반유대적 감정을 들어낸 반감을 체험한 작곡가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1901년부터 1903년까지 쇤베르크는 베를린에서 살았으며 그곳에서 생할을 위해 오페레타를 관현악으로 편곡하는 일을 해야만 했다. 빈으로 돌아온 후에 그는 전에는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았던 구스타프 말러의 재능을 발견하여 그 후 오랫동안 계속되는 교육활동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 놀라운 사건은 20세기 음악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최초의 제자 가운데에는 안톤 폰 베베른과 알반 베르크가 있으며 이 두 사람은 각기 자신의 방식대로 쇤베르크의 담대한 시도의 뒤를 따라 후에 이들 3인이 유명한 빈의 3위1체를 이루게 된다. op. 7(공식으로는 D단조)과 op. 9(공식으로는 E장조)에서 쇤베르크는 조성세계의 한계에 이르렀다. 그에게 있어서 음악적 표현주의의 최초의 표명이 되는 실내교향곡 op. 9는 특히 3도의 화성을 주저없이 4도로 바꾸었으며 또 1악장 구성을 사용함으로써 독창적인 방법으로 소나타형식을 일신했다. 무조성에 대한 결정적인 첫걸음을 내디딘 것은 1907년부터 1908년에 작곡된 현악4중주곡 제2번 op. 10에서였다. 이 곡의 전반 2악장은 조성적이지만 음성이 가담하는 후반 2악장에서는 그 어휘(분류된 화음)는 조성적이지만 통사법은 이미 조성적이 아니다(여기에서의 화음은 조성의 법칙에 따라 연결되어 있지 않다). 이 후반 2악장에 대해서 쇤베르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3악장과 제4악장은 형식의 모든 분절점에서 분명히 하나의 조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불협화음의 수가 매우 많기 때문에 다만 때때로 가락의 3화음이 나온다면 불협화음의 균형을 이룰 수 없다. 나는 하나의 악장을 하나의 조성이라는 프로크루테스의 침대(프로크루테스는 고대 그리스의 강도였으며, 프로크루테스의 침대는 예술작품의 중대한 훼손을 일컫는다)에 억지로 밀어넣는다는 것은 조성과 관련된 화성이 없을 때에는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진 문제점은 바로 이런 것이었고 나와 같은 시대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했었다.

쇤베르크의 이 최초의 무조작품은 그림에서 큐비즘이 나타난 것과 같은 시기에 작곡됐으며, 쇤베르크의 op. 10과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 Les Demoiselles d'Avignon(양자는 같은 해의 작품)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즉, op. 10의 전반 2악장(아직 조성적)은 피카소의 그림의 좌측부분(전통적)에 해당하며 op. 10의 후반 2악장(무조적)은 그림의 우측부분(큐비즘적)에 해당하고 있다.계속해서 쇤베르크에게는 충실한 창작기가 찾아오지만 이 시기에 그는 피에르 불레즈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최대의 성공이라고 평가하는 X자유무조 양식의 걸작을 낳았다. 이 시기의 특징을 사람들은 종종 불협화음의 해방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앞으로 어떤 화음이 어떤 화음의 뒤에 계속되어도 상관이 없다는 것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 특히 불협화음은 조만간 최종적으로는 협화음(3화음)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구속을 더 이상 받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해결에 대한 거부는 1908년경부터 그후 수년간 쇤베르크의 스타일이 극도의 불안을 나타내고 죽음을 연상시키게 된 주요 원인이 되었다. 1908년부터 1909년에 걸쳐서 스테판 게오르게 Stefan George의 시에 기초한 15곡의 연작가곡인 금지된 정원의 서(書) op. 15를 작곡했다. 1909년에는 5개의 오케스트라곡 op. 16, 3개의 피아노곡 op. 11, 모노드라마인 기대 op. 17이 이어서 작곡되었는데 그 중 마지막 작품은 1924년에 가서야 초연되었다. op. 16에서는 오케스트라가 독주자들의 대규모적인 앙상블로서 다루어졌다. 이와 같은 음색 자체에 대한 관심은 5곡 중 제3곡에서 분명히 나타나며 이 곡은 거의 모든 음역과 악기를 바꾸어서 계승되는 5개의 음으로 이루어진 단 하나의 화음만으로 만들어졌다. 쇤베르크는 이미 이론적 연구에서 분명히 했던 하나의 원리, 즉 음색선율 Klangfarbenmelodie의 원리를 이것에서 실천했을 뿐이다.

연주시간이 30분 정도인 작품 기대는 단 한 사람의 등장인물이 무대에 나타나는데 숲속에서 연인을 찾지만 결국 시체만을 발견하는 한 여인이다. 사실상 그것은 악몽이다. 악상의 반복을 피한다는 원칙을 극한으로까지 추진시키고 무주제주의 athématisme에 접근했던 기대는 음악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진정한 정신분석적 내용을 가진 작품이었다. 쇤베르크는 조성음악에서는 불협화음협화음이라는 관계에서 생겨난 긴장이완의 변증법을 이 작품에서 선율선과 분절법에 의해서 다시 만들어내는 데 이르렀다. 기대에서는 6음으로 이루어진 화음의 획기적 회귀에 의해서 비교적 안정된 영역을 낳았다. 종결부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쇤베르크는 여기에서 극히 작은 시간 안에 평균율의 반음계의 공간을 포화상태로 하여 평균율 반음계의 12음을 몇 음역에서 수평적, 수직적으로 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다른 여러 작품에서도 실질적으로는 같지만, 이 기대에서는 현실적으로 완전협화음은 이미 3화음이 아니라 반음계의 총체이고 반음계적 충일이다.

1910년에 쇤베르크는 거의 쉬지 않고 그림에 몰두했으며 이 분야에서도 그는 자신의 1909년의 음악과 같은 격렬한 표현주의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칸딘스키, 클레, 그리고 프란츠 마르크 Franz Marc와 함께 푸른 기수지를 중심으로 하는 회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말러가 죽은 해인 1911년에 그는 마테를링크의 시에 기초하여 마음의 무성함을 작곡하고 화성학을 완성했으며, 다시 한번 베를린으로 거처를 옮겨서 그곳에서 1914년까지 머물렀다. 그곳에서 1912년에 달에 홀린 피에로 op. 21을 작곡, 초연했는데 이 작품은 그를 가치평가를 초월해서 유명하게 했다. 이 슈프레히슈티메, 피아노, 플루트(또는 피콜로), 클라리넷(또는 베이스 클라리넷), 바이올린(또는 비올라) 첼로를 위한 3부 각 7편의 시는 멜로드라마를 전문으로 하는 빈의 여배우 알베르티네 체메의 주문으로 작곡되었다. 각 곡의 연주시간은 평균 1분 30초이다. 음성이 여기에서는 슈프레히게장 Sprechgesang의 원리에 따라 다루어진다. 달에 홀린 피에로를 구성하는 21곡의 소품은 그 짧은 길이 때문에 소형식 Petite forme을 취했는데 이것은 쇤베르크에 의해서 이미 1910년의 실내오케스트라를 위한 3개의 소품(사후출판)과 1911년의 6개의 피아노소품 op. 19(침묵의 한계에 있어서 6곡중 마지막 곡은 말러의 매장의 환영(幻影)이다)에서 사용했었다. 그리고 베베른은 하나의 특수성(다른 형식적 원리들과 함께)을 완성하게 되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작품인 달에 홀린 피에로는 아이러니와 불쾌하고 피비린내가 나는 새도우매저키즘을 서로 섞음으로써 쇤베르크의 표현주의 시대의 전형적인 작품이 되고 있다.

1913년에 쇤베르크는 음악이 있는 드라마 행복한 손 op. 18을, 1913년부터 1916년에 걸쳐서는 오케스트라의 반주가 있는 4곡의 가곡 op. 22를 작곡했다. 그리고 그 후 수년간 그는 단 한 곡의 작품도 발표하지 않았다. 이 시기에 그는 미완성의 오라토리오 야곱의 사다리(19171922)를 작곡했으며 개인적 연주협회의 활동에 전념했다. 이 협회는 그가 1918년부터 1921년에 걸쳐서 공식연주회에서는 다루어지지 않는 현대 음악에 연주의 기회를 부여하려고 시도한 것이었다. 또 이때에 그는 12음기법, 즉 서로 관련짓게 되는 12음에 의한 작곡법을 완성시켰다. 음열음악의 정식 출발점이 되는 이 작곡법으로, 그는 1903년부터 1913년에 걸쳐서 조성의 질서를 자유로운 무조의 무질서상태에 종지부를 찍는 새로운 질서로 바꾸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독일의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위대한 전통과의 연결을 재발견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 사실은 그가 1920년대에 전통적인 형식에 복귀했다는 사실과 또 제자인 요제프 루페에게 말한 다음과 같은 선언에 나타나 있다. 나는 향후 100년간 독일 음악의 우월성을 보장하게 될 것을 발견했다(1921). 12음기법을 처음으로 나타낸 것은 5개의 피아노곡 op. 23(1920~23)의 끝부분의 왈츠와 세레나데 op. 24 속의 페트라르카의 소네트(1920~23), 그리고 특히 피아노조곡 op. 25(192123)에서이다. 이어서 쇤베르크는 관악5중주 op. 26 (1923~24), 현악4중주 제3번 op. 30(1927), 그리고 오케스트라를 위한 변주곡 op. 31(192628)에서 뛰어난 연주와 극도의 복잡성에로 그의 방식을 밀고 나갔다. 그리고 그는 이 방식을 오페라 부파 오늘부터 내일까지 op. 32(1928~29) 같은 무대작품에 응용했고, 피아노곡 op. 33a(1928)와 op. 33b(1931)에서는 다시 피아노곡에 사용했으며, 또 영화의 한 장면을 위한 반주음악 op. 34(1929~30)에서도 사용했는데, 이 마지막 곡으로 그는 이 방법이 전쟁 전 시기의 표현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쇤베르크는 1925년 이래 부조니의 후임으로 베를린 예술아카데미의 작곡과의 교수에 취임했으나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후 이 자리에서 쫓겨난 것은 그가 미완성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였던 주요 작품, 오페라모세와 아론의 처음 2막을 완성했을 때였다. 그는 우선 파리에 가서 1933년 7월 30일 공식적으로 유대교로 재개종했다(그는 18세때에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했었다). 이 재개종은 1920년 직후부터 시작된 내면적 변화의 도달점이었고 이 변화는 특히 지금까지도 미출간인 채로 남아 있는 드라마 성서의 길 Der biblische Weg(1927)의 대본을 집필했다는 사실에 의해서 분명해졌다. 1933년 10월 그는 미국으로 이주하였고 평생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보스턴과 뉴욕, 그리고 1936년부터 1944년까지는 캘리포니아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바이올린협주곡 op. 36(1934~36)과 현악4중주곡 제4번 op. 37(1936)은 2개의 위대한 음열적 작품이다. 그 후 쇤베르크는 콜 니드레 op. 39(1938)나 바이런의 시에 기초한 나폴레옹에 대한 오드 op. 41에서 볼 수 있듯이 어떤 조성과의 관계 또는 조성기능을 자신의 음악에 재도입시켰다. 캘리포니아 대학을 정년퇴임한 후 그는 생활을 위해서 개인교수를 해야만 했다. 또 1945년에는 구겐하임재단의 장학금을 거절당했는데, 이 장학금을 받았더라면 야곱의 사다리와 모세와 아론, 그리고 몇 권의 이론서를 완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1946년 8월 2일 천식으로 인한 심한 발작 후에 쇤베르크의 심장이 고동을 멈추었으나 주사가 그의 목숨을 구했으며, 8월 20일부터 9월 23일에 걸쳐 작곡된 장려한 현악3중주 op. 45는 이 일시적인 죽음에 대한 음악적 표현이다. 이듬해에는 게토의 생존자의 이야기를 기초로 하여 바르샤바의 생존자 op. 46을 작곡했고, 1949년에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판타지 op. 47가 완성되었다. 쇤베르크의 최후의 작품은 종교적 성악곡이었다. 1950년에 그는 현대시편의 편집을 시작하였고 다윗의 시편과의 연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첫번째 시편에 151번이라는 번호를 붙였다. 그는 이 시편에 음악을 달기 시작했으나 그의 죽음으로 이 최후의 작품(op. 50C)은 미완성으로 끝났다.

쇤베르크만큼 정신적으로 자극을 주는 작곡가는 많지 않다. 그의 음악은 물론 그의 수많은 저서도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의 견고한 이론이나 예리한 심리, 그리고 약간은 빈정거리는 유머 등 어느 하나도 등한히 해서는 안 된다. 그는 평생동안 역설을 연구하기를 즐겨했다. 그래서 나는 가장 소수의 권리를 믿는다라는 것이 그의 신앙고백의 하나였다. 그런데 그것은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가치와 전위성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의 입을 통해서 나왔다. 한 번은 어떤 음악제에서 연주가들과 함께 하는 그의 리허설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 다음 작곡가들이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러 온 사람에게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이곳에 나 이외에 다른 작곡가가 있습니까?. 또 1948년 어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정치에 대해 큰 실망을 표명한 후에 우리들 음악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정치세계에서는 설 자리가 없기 때문에 정치와는 전혀 무관한 세계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전혀 비정치적입니다. 눈에 띄지 않은 곳에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썼다. 그런데 그런 그가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있던 1932년부터 1933년경 아도르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지금은 예술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있다고 느닷없이 선언했다. 그리고 이미 1932년부터 개인적인 사정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특이한 그의 직관에 의해서, 칸딘스키에게 쓴 열렬한 편지를 통해서 히틀러에 대한 예언적 사실을 말했다.

쇤베르크는 어떠한 예술이건 예술의 사회참여 또는 예술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철저한 반대자였으며, 이런 그의 자세는 1920년대에 그의 옛 제자인 한스 아이슬러와의 심각한 대립과 논쟁을 야기시켰다. 아이슬러는 쇤베르크의 예술과 예술가로서의 그가 갖고 있던 신성한 시각을 극도로 반동적이라고 생각했으며, 후에는 그를 가장 나쁜 부류의 소시민이라고 취급하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의 천재성을 인정하거나 그를 존중하고 내세우는 것을 삼가지는 않았다. 1947년 쇤베르크쪽에서도 아이슬러를 향해 그와 같은 예술가들을 회의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공언하였다(역사가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끝났는가를 보여줄 때 확실한 재능이 있으면서 세계적인 개혁의 계획에 얽매여 있다니 주요 작곡가로 보여지고 싶으면 중요한 음악을 작곡해야 한다). 그런데 쇤베르크는 그림에서의 피카소의 게르니카 Guernica에 상당하는 음악인 나폴레옹에 대한 오드와 바르샤바의 생존자의 작가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건국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또 누가 뭐라고 하든지 음악의 영역 밖인 발명가로서의 재능을 발휘했고 직접 세계적 개혁을 꿈꾸었다. 그는 특히 악보용 타이프 라이터, 주교와 제독을 추가한 100칸 짜리 체이스보드, 자석이 달린 안과용 기구, 세트로 된 승차권, 그리고 버스의 전용차선 등을 발명했으나 평생토록 한번도 특허를 신청하지 않았다. 진정한 작곡가가 작곡한 진정한 작품은 의도적이 아니더라도 가장 변화무쌍한 여러 가지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라는 쇤베르크의 격언은 더욱 분명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지만 어느 정도의 진실은 들어있다. 이렇게 말한 까닭은 그가 숙지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사실, 즉 음악은 모든 예술 가운데 가장 추상적(음악은 문화, 그림 그리고 건축 등과는 달리 여하한 대상에도 의존하지 않으며 자연 속에서는 거의 음악적 형식의 예시를 볼 수 없다)인 동시에 가장 구체적(음악의 암시력은 뛰어나며 그것은 신경과 감각에 직접적으로 작용한다)이며, 음악은 음악 이외의 목적에 매우 잘 적응한다는 사실에 반발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음악은 특히 가사의 도움이 없는 경우에는 신앙고백에 적합하지 않지만 그 고백의 효과를 강조하기는 매우 쉽다.

쇤베르크의 생존시에는 그의 작품이 결코 일반 청중의 환영을 받지 못했고 그가 난해한 작곡가였다는 평판은 그가 죽은 지 30년 이상 지난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에 대해서처럼 청중들이 그의 음악을 환성으로 맞이해 주기를 바랐다고 말한 쇤베르크는 당연히 이 일에 고심하고 있었지만 그는 이런 희망이 실현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어떻게 사람은 고독해지는가라는 수필을 썼다. 그가 이런 상황을 받아들인 것은 전술한 역사에 대한 감각 덕분이고, 그것에 의해 그는 과거와 전통과의-적어도 그의 주장에 따르면근본적인 결별을 의식적이고 결연하게 수행한 동시에 그가 이 전통의 많은 계승자들 중 한 사람이 아니라 필요불가결한 유일한 계승자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런 이유에서 그는 음열의 원리를 발명했다고 하지 않고 언제나 발견했다고 말했다. 12음기법과 음열기법의 급변은 레닌과 동시대인었던 혁명가 쇤베르크의 양의성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쇤베르크의 음열기법은 높이에 한정되어 있으면서 각 음 사이의 위계를 없애려고 했으나 또 다른 위계가 생기곤 하였다. 그리고 12음기법은 평균율의 12음으로 이루어진 반음계의 전체적 사용의 최종단계로서 후퇴하면서 출현했다. 사실 이 기법은 서양 음악과 특히 게르만 음악의 가장 오랜 전통에서 발전한 것이고, 특히 옥타브의 절대적 지배와 다른 음악적 변수들에 대한 높이(오히려 음정)의 우위를 인정하였고, 주제라는 개념과 그에 뒤떨어지지 않는 형식을 토대로 한 하나의 사상의 추구를 그 자체로서 배제시키는 경우는 없었다. 범조적(汎調的) 작곡가(그는 무조적 작곡가라는 호칭보다 이 호칭을 더 좋아했다)였던 쇤베르크는 이 사실을 틀림없이 의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12음기법은 적어도 이전의 고전 낭만파의 조성에 의해 음악에 제공된 강력한 구성수법의 한 대체물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쇤베르크와 그의 후계자들의 음열기법이 서양 음악에 꼭 필요했음은 사실이다. 하이든, 모짜르트, 그리고 베토벤에 의한 극 이전의 빈 고전주의와 마찬가지로, 이 음열기법은 사실 음악 전체의 발전을 집중화하고 활성화했던 수렴의 범위 내에서 아주 다양한 흐름의 음악이 뚜렷이 나타나게 되었고, 그 당시에는 주변적인 것으로 보여질 수도 있었던 경향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 분열이 지금에 와서는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나 만일 미리 강력히 집중하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쇤베르크 음악의 난해성을 설명하는 데 무조성과 음열기법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게다가 이런 요소가 난해성의 본질적인 이유는 전혀 아니다. 이 난해성의 진정한 원인은 리듬과 사고의 예외적인 밀도에 있는데, 이 사고는 하이든의 사고와 마찬가지로 다른 작곡가들의 경우에는 훨씬 더 큰 규모를 필요로 할 일시적인 음향공간 속으로 수많은 음악적 사건들을 집중시킨다. 그래서 알반 베르크는 왜 쇤베르크의 음악은 그다지도 이해하기가 어려운가?(1924)라는 제목의 그의 논문의 실례로서 음조적 작품인 현악4중주곡 제1번 op. 7을 고의로 선택했다. 또한 다음과 같은 쇤베르크의 기지에 찬 말도 알려져 있다. 나의 음악은 현대적인 것이 아니라 연주가 잘못된 것이다. 오늘날, 음악언어와 음악적 어휘의 문제는 그의 작품의 깊은 정신적 조화 앞에서 희미해졌는데, 그가 유례없는 고도의 기교를 사용한 것은 감정의 고양 때문이었다. 특히 1908년부터 1913년 사이에 작곡된 그의 작품에 대한 격한 반감은 조성의 포기 때문이라고 하기보다는 그가 표현한 새로운 감정적 세계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의 메시지가 청중에게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것은 청중이 너무도 그의 메시지를 잘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아주 우수한 지성을 아낌없이 활용했으며 그의 직관력 또한 매우 뛰어났다. 또 그의 성격의 특징의 하나는 자신의 발견을 합리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집착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의 가장 유명한 평론(음악에 대한 마음과 지성)의 제목에 나타나 있는 이중성을 쳄린스키는 이미 1902년에 간파했었다(그(쇤베르크)는 거기에 대해서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이 모르는 것은 느꼈다). 자신의 예술에 관해서는 종종 완고해서 손을 댈 수 없게 되는 성격의 소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제자와 친구들로부터 신처럼 존경받은 쇤베르크는 역사 속에 가장 위대한 사람만이 남길 수 있는 발자취를 남겼다.

그의 창작은 3개의 창작기로 구분하다.
제1기는 바그너의 영향을 받은 시기인데, [구레의 노래][정화된 밤][펠레아스와 멜리장드] 등의 작품으로서 낭만적인 시대이다.
제2기는 1906년부터인데, 예컨대 실내 교향곡의 시대이며, 제3기는 제1차 세계 대전을 전후하여 만년에 이르느 12음 음악인데, op. 36과 op. 42의 2개의 협주곡, 관현악을 위한 변주곡 등을 들 수 있다

 

  《실내교향곡 E장조》
《모세와 아론》 《달에 홀린 피에로》
바이올린 협주곡 《바르샤바의 생존자》


빈의 유대인 상인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8세 때에 바이올린을 배우고 9세 때
습작으로 작곡을 하기도 하였다. 1891~95년 은행근무를 하는 한편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첼로 연주자로 활동하며 지휘자 체믈린스키로부터 대위법을 배웠다.
그 후 독학으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해 브람스, 바그너 등 후기 낭만파에서 큰 영향을 받아, R .데멜의 세기말적 제재에 의한 텍스트를 새로운 대위법적 감각으로 처리한 현악6중주곡 《정화된 밤》을 1899년 작곡하였다.

1901년 베를린으로 가서 작곡 활동을 계속하고 R.스트라우스의 소개로 슈테른
음악학교 작곡교사로 재직하기도 하였다.
1903년 빈으로 돌아가 1905년 《현악 4중주곡 제1번》 1906년의 《실내교향곡
E장조》 등을 작곡하고 1909년 완성한 《게오르게 가곡집》에서는 완전히 무조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표현주의적 무조음악이라는 독특한 음악양식을 확립하였다. 1912년 A.지로의 시를 작곡한 《달에 홀린 피에로》는 무조시대의 걸작으로 평가되어 명성을 얻게되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5년 징병검사를 받고 입대하여 다음해 질병으로 인하여 제대하였다. 1918년 그는 베르크, 베베른과 함께 <사적 연주협회>를
조직하여 1921년까지 100회 이상의 연주회를 열었으며, 400곡 가까운 현대음악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시리즈라 불리는 몇 가지 음렬(音列)에 의한 작곡법으로 12음기법을 확립하였는데, 1824년 《관악 5중주곡》이나 1825년 《피아노 모음곡》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1933년 나치정권이 들어서자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의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여, 1936년 이후 캘리포니아대학의 교수로 근무하고 1941년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이 시기에는 나레이터, 피아노, 현악 4중주를 위한 《나폴레옹에 바친 오드》 나레이터, 남성 합창, 관현악을 위한 《바르샤바의 생존자》를 작곡하여 나치즘에 대한 격렬한 항의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는 12음기법의 창시자로 창작활동은 다음과 같이 나뉘어진다. 1) 후기낭만파
어법의 시기 2) 무조음악의 시기 3) 12음기법 창안의 시기 4) 12음기법 전개의
시기 등 4기로 나뉘어진다.

쇤베르크는 고전파 이래의 조성음악 체제를 12음기법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하고 새로운 음악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작곡 교사로서는 《화성학》 이래 많은
음악이론서를 집필하여 많은 제자들을 육성해냈으며, 그 체계적인 음악의 사고법은 블레즈, 슈토크하우젠 등 전후 작곡가들의 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가져온 곳: [행복/사랑/성공/예술/詩/經營/여행]  글쓴이: 綠野GreenField 바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