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칸 [成吉思汗(성길사한), Chingiz Khan, 1155 ?~1227.8.18]
몽골제국의 창시자(재위 1206∼1227).
별칭 묘호(廟號) 태조(太祖),
아명 테무친[鐵木眞]
국적 몽골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러시아 바이칼호 근처
묘호(廟號) 태조(太祖). 아명 테무친[鐵木眞]. 바이칼호 근처 출생.
칭기즈란 고대 터키어인
텡기스(바다)의 방언이었다고도 하고, 1206년 즉위하였을 때 5색의 서조(瑞鳥)가 ‘칭기즈,
칭기즈’
하고 울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나, 샤머니즘의 ‘광명의 신(Hajir Chingis
Tengri)’의 이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태어난 연도에 대해서는 1155년, 1162년, 1167
년 등의 이설이 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타타르 부족에게 독살되어 부족이 흩어졌기 때문에 빈곤 속에서 성장하
였고,
당시 강세를 자랑하던 케레이트 부족의 완칸 아래서 점차 세력을 키워, 1189년경 몽골
씨족연합의 맹주(盟主)에 추대되어 칭기즈칸이란
칭호를 받게 되었다. 1201년 자다란 부족의
자무카를 격파하고, 타타르·케레이트를 토벌하여 동부 몽골을 평정하였으며(1203),
군제(軍
制)를 개혁한 후 서방의 알타이 방면을 근거지로 하는 나이만 부족을 격멸하고(1204) 몽골
초원을 통일하였다.
1206년 오논 강변 평원에서 집회를 열고, 몽골제국의 칸에 오르면서 씨족적 공동체를 해체,
군사조직에 바탕을 둔 천호(千戶)라고 하는 유목민집단을 95개 편성하였다. 천호 및 그 하부
조직인 백호는 동시에 행정단위이며,
천호장·백호장에는 공신들을 임명하여, 이들을 좌익
(左翼)·중군(中軍)·우익의 만호장 지휘하에 두었다.
또 케시크테이라고 하는 친위대를 설립하고 천호장·백호장의 자제로 편성하여 특권을 부
여, 몽골
유목군단의 최정예 부대를 구성하였다. 즉위한 이듬해 서하(西夏)를 점령하고, 금
(金)나라에 침입하여 그 수도인 중도(中都:지금의
베이징)에 입성하였다(1215). 한편 앞서 멸
망된 나이만의 왕자 쿠출루크가 서요(西遼)로 망명하여 그 나라를 약탈하였기 때문에, 부장
제베를 파견하여 토벌한 후에 병합하였다(1218). 또 서아시아 이슬람 세계의 패자(覇者) 호
레즘국과 교역하려고 파견한 사절단이
살해되자, 이것을 계기로 서정(西征)에 올랐다(1219).
오트랄·부하라 등의 도시를 공략하였고, 제베와 수부타이가 인솔한 별군(別軍)은 호레즘 국
왕
무하마드를 카스피해상의 작은 섬으로 내몰아 굶어 죽게 하였고(1220) 다시 카프카스산
맥을 넘어 남러시아로 출동, 러시아 제공(諸公)의
연합군을 하르하 강변에서 격파하였으며
(1223), 크림을 정복한 후 본군에 합류하였다. 본군은 그에 앞서 발흐를 점령하고
무하마드
의 아들 잘랄웃딘과 인더스 강변에서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1221).
그러나 뜨거운 열기에 견딜 수 없어 철군하기로 결정하고, 차가타이·오고타이군과 합세하
여
귀국하였다(1225). 이때 이슬람교도의 공예가와 장인(匠人)의 기술을 높이 평가하고 그들
을 포로로 데리고 왔다. 정복한 땅은 아들들에게
각각 분할해주어 나중에 한국(汗國)을 이룩
하게 하였으나, 몽골 본토는 막내아들 툴루이에게 주기로 하였다.
이어 1226년 가을 서정(西征) 참가를 거부한 서하를 응징하려고 서하의 수도 닝샤[寧夏]를
포위하였으나 간쑤성 칭수이현[淸水縣] 시장강[西江] 강변에서 병사하였다. 그는 샤머니즘
신자였으나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관대하였고
외래문화의 흡수에 노력하였다.
특히 위구르 문화를 사랑하여 나이만 정벌 당시 포로로 데리고 온 위구르인 타타동가에게
여러
아들들로 하여금 위구르 문자를 배우게 하였고, 그것을 국자(國字)로 채용하였다. 이
위구르 문자로부터 몽골문자와 만주문자가 만들어졌다.
또 요(遼)나라 유신(遺臣) 야율초재
(耶律楚材)와 위구르인 진해(鎭海)를 중용하고 그 교양과 정치적 능력을 이용하여 정복지
통치에
힘을 기울였다.
칭기스칸(Chingis Khan)은 성길사한(成吉思汗), 테무진(Temujin), 태조(太祖) 등으로 불려진다. 성길사한은 한자식 이름이고, 태조는 묘효, 테무진은 아명이다. 칭기스칸이란 칭호는 1189년 몽골 부족 연합의 맹주로 추대되면서부터 사용되었다. 이름의 연원에 대해서는 세 가시 설이 있다. 첫째는 고대 터키의 "텡기스(바다)"라는 방언에서 유래했다는 설, 둘째는 1206년 즉위하였을 때 5색의 새가 "칭기스, 칭기스"하고 울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 셋째는 샤머니즘에서 '광명의 신'을 의미하는 Hajir Chingis Tengri'의 이름이라고 하는 설이다. 이 중에 세 번째 설이 보편화된 것이다.
칭기스칸은 몽골 부족의 명문 집안에서 1162년에 태어났으나 아버지 에수헤이가 독살 당한 후 여장부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칭기스칸의 아버지를 독살한 타타르 부족은 칭기스칸이 자람에 따라 위협을 가했고, 신변의 위협을 느낀 칭기스칸은 당시 가장 강했던 헤레이트 부족에 들어가 복수심을 키워 가며 무인으로 성장했다. 1203년 아버지를 죽인 타타르, 자신을 키워준 헤레이트 족을 평정하면서 몽골 초원을 통일하였으며, 1206년 드디어 오논 강변 평원에서 열린 집회에서 몽골 제국의 칸의 자리에 올랐다.
칸의 자리에 올라, 제일 먼저 단행한 일은 부족 공동체를 해체하고 군사 조직의 일환인
천호(千戶)라고 하는 유목 집단95개를 편성하여, 몽골 유목 군단의 최정예 부대로 만들었다.
1204년 내외 몽골을 통일하고,
1206년부터 서하(西夏), 금(金), 만주 등을 공격하고, 1219 ~ 1223년까지 중앙아시아 평정 이후 남 러시아를 정복하여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했다. 정복한 땅은 아들들에게 분할해 중 후에 한국(汗國)을 이룩하게 하였고, 몽골 본토는 막내 아들에게 주기로 했다. 그러나
1225년 원정에 참전하기를 거절한 서하를 응징하기 위해 현재의 중국의 간쑤 성의 류판 산에 있다가 1227년 8월 18일 이 불세출의
대정복자는 지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징기스칸의 전략에 관한 분석
(1)서언
1995년 말에 미국 워싱턴 포스트지는 세계사에서 지난 1천년간 가장 중요한 인물로 징기스칸을 꼽았다. 현대에
이르러서야 징기스칸이 단순한 정복자가 아님이 알려지고 있는 실정이다.
당시 몽골은 문자가 없었다. 그래서 징기스칸은 글을 몰랐다.
따라서 징기스칸의 기록은 위 구르(Ug-urs), 중국, 페르시아, 아르메니아 등의 역사 문서와 유럽인 여행자들의 기록에 드문드문 기재되어
있었다. 이렇게 기록을 남긴 사람들은 모두 징키스칸의 반대편 사람들이어서 징기스칸을 침략자로 보고 기록하여 살육과 약탈을 일삼는 잔인한 정복자로
기록에 남기고 있다.
(2)서아시아 지역 전투
징기스칸이 중도를 점령할 즈음인 서기 1216년 호라즘(하레즘 또는
코라즘 : Khwarezm)왕의 사신과 이슬람 대상을 접하고 서역과 교역하기 위해 사신과 함께 많은 물건을 실은 대상들을 보냈으나 호라즘 동방
총독(오트라르
서기 1219년 여름
징기스칸은 알타이산 남쪽과 발하쉬(Balkhash)호의 동쪽 이르티시강 연안에 병력 15만에서 20만을 집결시켰다. 먼저 장자 주치(求赤)에게
1개 부대를 주어 선발대로 시르다리아강 하류와 북쪽으로 알라타우(Ala tau)산맥사이를 약탈하여 약탈한 말과 마초를 후송하고 주민들이 사는
지역을 불태워 버렸다. 몽골군은 초원에 불을 질러 화염을 일으켜 자기들의 기동을 적이 간파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후 수개월간 기동하지 않고 적의
동정을 살펴 적이 방어계획을 수립하여 20만의 병력을 소집하고 광정면(廣正面)에 병력을 분산 배치한 사실을 탐지했다.
호라즘왕
알라드 딘 모하메드(Alaud Din Mohammed)는 몽골군이 침공한다는 소식을 듣고 시르다리아(Syr Darya)강을 연하여
오트라르(Otrar), 코젠(Khojend)에 이르는 주요 요새에 예하 병력을 배치하고 별도로 사마르칸트(Samarcant),
부하라(Bochara), 우르겐지(Urgench)등 주요 도시에 수비병을 배치하였다. 이렇게 병력을 분산 배치하고 몽골군이 공격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르다리아강은 호라즘국 북동쪽으로 국경선을 이루는 무려 2,800킬로미터나 되는 큰 강이다.
(3)호라즘지역
전투
서기 1220년초 징기스칸은
4개군 1개 별동대로 나누어 전면 공격을 실시했다. 1개군(우익)은 장자 주치(求赤)가 이끌고 시르 다리아(Syr Darya)강 하류쪽으로
나아가 시크나크(Sighnaq)을 7일간 공격하여 초토화시켜 버렸다. 그리고 계속 강하류로 내려가 공성용 사다리를 타고 잔드(Jend:현재
페로프스크 부근)성을 공격하자 사령관은 도주하고 주민들이 항전했으나 결국 몽골에 점령당했다. 주치는 시내를 약탈하고 부하라인 알리 호자를
시총독으로 남겨 두었다. 이라크 노얀(阿里海), 수케츠 체르비, 타카이(塔海拔都兒) 등이 지휘하는 5천명의 별동대는 강상류로 가서
타쉬켄트(Tashikent) 서쪽에 있는 베나케트(Benaket)를 공격했다. 그리고 강상류로 올라가 코젠드(Khojend)를 포위했다.
차자(次子) 차카타이와 삼남 오고타이(좌익) 역시 병력 50,000명을 인솔하여
발하쉬(Balkash)를 지나 시르다리아(Syr Darya)강가에 있는 오트라르(Otrar)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그런 후 대상(隊商)을 죽여
몽골군 원정의 원인을 제공한 이날추크(Inalchug)를 포로로 잡고, 남쪽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시르다리아강 지역에 있는 수개 요새를 탈취했다.
별동대는 체베(Chepe)가 병력 20,000명을 이끌고 파미르고원을 지나
아무다리아(Amu Darya)강을 따라 트란스옥시아나(Transoxiana)로 접근했다 체베 뒤를 수부타이 부대가 그대로 따라가고 그 뒤에
토쿠차르(Tokhuchar)가 도시 주변을 약탈하면서 치중 부대를 이끌고 따랐다. 별동대는 카쉬가르(Kashgar)에서 남쪽 경로를 따라
페르가나(Ferghana) 골짜기를 통과하여 코칸트를 점령하고 코젠드(Khojend)를 포위했다. 이때 체베 분견대는 북동쪽으로 나아가
차카타이와 오고타이군과 만났다.
징기스칸(중군)은 역시 병력 50,000명을 인솔하여 주치와 차가타이가 통과한
뒤를 따라 발하쉬호 남쪽을 지나 시르다리아강이 아랄해(Aral sea)에 이르는 어구에 접근했다. 징기스칸은 넷째 아들 투루이를 데리고
시르다리아강을 건넌 후 소식이 두절되었다. 징기스칸군은 전위(前衛) 다이르 바아투루를 따라 광대한 키질쿰(Kizyl Kum:붉은 모래땅)사막을
동남쪽으로 통과하여 첫 새벽에 누라타(Nurata)에 나타났다. 이때 주민들은 몽골군의 척후를 보고 자기편 대상으로 오인하고 대비하기는커녕
성문을 활짝 열었다. 징기스칸은 주민을 가축과 함께 몰아낸 후 마음껏 약탈한 후 배상금을 물었는데 그것은 호라즘국의 세금 정도에 불과했다.
서기 1220년 2월에 징기스칸군은 갑자기 부하라(Bokhara) 근교에 나타났다. 부하라 수비대는 2만 내지 3만으로 터키
용병이었다. 몽골군은 사흘 동안 쉴새없이 공격하여 수비 대장은 도주하고 수비병들은 흩어졌다. 그래서 2월 중순에 부하라는 점령되었다. 그러나
성내 성채에서 400여명의 터키병이 농성을 하자 주민들을 모두 동원하여 해자(垓子)를 메우게 하고 노포(弩砲)를 쏘아 성채를 파괴했다.
몽골군은 기마병의 특성을 살려 신속하게 기동했다. 또한 수마일 씩 간격을 두고
산개하여 접근해 옴으로 호라즘왕은 몽골군의 병력이 굉장히 많은 것으로 오인하였다. 징기스칸은 갑자기 부하라 배후에 나타나 적의 허를 찔러 단번에
무너뜨렸다. 호라즘왕은 자기의 병력을 모두 부하라, 사마르칸트 및 기타 요새에서 방어하도록 하고 자기는 가족과 친위대를 이끌고 어쩔 수 없이
남쪽으로 도주했다. 전 병력을 집중하지 않고 흩어져 있는 성안을 지키고 있던 호라즘군은 몽골군에 당할 수 없었다. 대상을 약탈했던 오트라르 성주
이날추크는 붙잡혀 은을 녹여 눈과 코에 붓는 형벌을 당하였다. 징기스칸이 약탈자를 얼마나 증오했는지를 나타내는 일면이라 할 수 있다.
부하라시는 약탈 와중에 불길이 솟구치어 목조 건물은 대부분 소실되고 대성당, 궁전
등 벽돌 건물만 남았다. 징기스칸은 폐허가 된 부하라를 뒤에 두고 자라후샨(Zarafshan)강 골짜기를 따라 동쪽으로 나아가서 서기 1220년
3월에 사마르칸트(Samarkand)에 나타났다. 이때 체베군과 차카타이 및 오고타이군도 사마르칸트에 집결했다. 징기스칸은 사마르칸트 포위
작전을 시작했다. 사마르칸트성내는 호라즘왕의 숙부 투카이 칸이 터키용병 약 5만명을 거느리고 수비하고 있었다.
징기스칸은 성을
공격할 많은 포로를 거느리고 포로로 하여금 많은 깃발을 들게하여 부대가 많은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포위 공격이 계속되어 제3일째 되는 날
몽골군은 처음 공격하다가 서서히 후퇴하여 성밖으로 공격해 오는 사마르칸트군을 기병으로 습격하여 적을 무찔러 성내 사람들을 공포에 떨도록 했다.
제4일째 이슬람교 성직자와 사이에 협약이 체결되어 성문이 열리고 제5일째 몽골군이 성내로 들어와 주민들을 강제로 퇴거시키고 시내를 약탈했다.
그러나 성내 성채에서 터키용병들은 계속 완강하게 저항했다. 징기스칸은 먼저 성벽,
성루(城壘) 및 성문 등을 조사하고 성내로 흘러 들어가는 수로를 막아 수공법(水攻法)을 사용하도록 했다. 성채를 지키던 호라즘병사 약 1천명이
야음을 타서 성을 빠져나가 달아났고 나머지 병사들은 이슬람 대성당 모스크에서 결사 항쟁했다. 그러나 결국 피살되고 말았다. 그러나 처음 항복했던
투가이 등을 비롯하여 이전에 항복했던 병사까지 모두 살육했다. 징기스칸은 배신행위를 지극히 싫어했던 것이다.
저항에 참여한 시민을 모두 학살하고 내성을 파괴했다. 사마르칸트를 완전히 점령하고
수공업자 3만명을 그의 자손과 부하에게 분배해 주었다. 몽골군은 성을 점령하고 나면 마음껏 약탈하기 위해 시민을 시외로 몰아냈다. 그러나
징기스칸은 이슬람교 장로, 성직자, 법률 박사, 법관 등 수천명에 대해 보호령을 내리고 엄중히 지켰다.
(4)호라산, 코카사스 및 러시아 지역 전투
호라즘 수도 우르겐지는
아무 다리아강이 아랄해로 흘러 들어가는 삼각주에 위치한 도시이고 방어가 견고했다. 그래서 징기스칸은 보올추, 토룬 체르비(脫忍蘭兒必), 카다안
등 노련한 장군을 보내 세 아들을 보좌하도록 했다. 주치는 아버지로부터 호라즘 본토를 영지로 약속 받았으므로 회유책으로 점령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몽골병은 포로를 시켜 성의 해자(垓字)를 묻게 하고, 공성장비를 동원하여 성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도시는 아무 다리아강으로 양분되어
있어서 두 지구를 연결시키는 다리로 3천명의 몽골병들이 돌격해 나아 가다가 모두 몰살당했다. 이 때문에 온건책을 주장하는 주치와 강경책을
주장하는 차가타이 사이에 불화가 일어났다. 징기스칸은 화를 내며 두 형제는 오고타이 지시를 따르도록 지휘권을 일원화해 주었다.
공격은 다시 재개되어 몽골병은 집 하나 하나가 성체구실을 하는 집에 석유를
항아리에 넣어 던저 불지르면서 파상공격을 하면서 시가지를 한 지역 한 지역 점령해 나갔다. 7일후 수비군은 막다른 지역에 몰려 어쩔 수 없게
되자 사신을 보내 항복할 터이니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했으나 거절되었다. 1221년 4월에 성이 완전히 점령되자 주치는 주민을 모두 들로
내보내고 기술자들을 몽골로 보내고 사내들은 모두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삼았다. 끝으로 아무 다리아 둑을 터트려 우르게지(Urgench)
전 시가지를 수장해 버렸다.
징기스칸의 사위 토쿠차르는 네사(Nessa) 점령하고, 1220년 11월에
니샤프르(Nisapur)를 공격하다가 화살 맞아 사망했다. 몽골군은 곧 철수했다. 투루이는 점령지에서 장정을 모집하여 부대를 재정비한 후 다시
7만의 몽골군을 이끌고 서기 1220년 가을에 지금 이란의 동부 호라산으로 진격하여 셀주크왕조의 수도 메르브(Merv)를 서기 1221년 2월에
점령하고 12일간 행군하여 니샤프트에 나타나 매부의 복수전을 시작했다.
이때 몽골군의 공성술은 최고 수준에 도달하여 창을 던지는 장치 3천, 노포(弩砲)
300, 석유에 불을 붙여 던지는 장치 700, 돌던지는 장치 2천5백, 그리고 사다리 4천을 동원하였다. 몽골군은 서기 1221년 4월
10일에 니샤프르를 완전히 점령하고 니샤프르 공격 중에 전사한 징기스칸의 사위 토크차르의 복수를 위해 시민들을 사흘간이나 살해하고 도시 파괴는
10일간 계속되었다. 이렇게 살육한 사람의 머리로 피라미드를 쌓았다. 그러나 솜씨가 훌륭한 기능인 400명은 살려 주었다. 다음에 헤라토를
포위하고 항복을 권유했다. 이때 헤라토 총독이 죽은 이후여서 헤라토 주민들이 시민의 안전을 조건으로 순순히 항복하자 투루이는 그 약속을 지켰다.
그후 투루이는 징기스칸에 합류했다.
그 동안 제베와 수부타이는 메르브성을 지나 1220년 6월 견고한 니샤프르성을
공격하지 않고 그냥 지나 투우스를 점령하고 호라즘 술탄 모하메드(Mohammed)를 집요하게 추적했다. 수부타이는 호라산 지방북쪽에 있는 길을
따라 세부제바르(Sabzevar), 샤루드(Shahrud), 담칸(Damghan) 등을 거쳐 아라크(Arak)의 아제미로 들어간 다음에
셈난(Semnan)을 지나 테헤란(Tehran) 근교에 있는 레이시(Rey:테헤란 동남쪽 8킬로에 위치)에 도달했다. 제베는 카스피해 연안
마잔데란(Mazandaran)지방으로 들어가 아모르(Amol)시를 점령하고 레이시로 내려와 두 부대는 다시 만났다. 술탄 무하메드는
레시뜨(Rasht)에서 다시 카즈빈(Qazvin)으로 가서 그의 아들이 병력 3만을 모아 왔으나 몽골군에 대한 공포심으로 이성을 잃고 도주하는
생각만 했다.
술탄 무하메드는 바그다드로 도주할까 생각하다가 하마단(Hamadan)에서 몽골군이
바짝 따라 오자 생각을 바꾸어 카스피해 연안으로 도주했다. 그가 마잔데란에 이르렀을 때 몽골군이 알고 선발대가 추격했다. 그래서 가까스로
그루칸강하구에 있는 조그만 섬 아베스쿤(abaskun)에 몸을 숨겼으나 공포와 피로가 겹쳐서 1221년 1월에 사망했다. 대상을 살해하고 물건을
탈취한 죄 값은 이렇게 치루어졌다.
술탄 무하메드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징기스칸은 카스피해 동쪽과 북쪽을
정찰하고 돌아오라는 새로운 임무를 맡겼다. 제베와 수부타이는 아제르바이젠 지방으로 들어가 타브리즈(Tabriz)를 점령하고 카스피해 연안으로
나아가 쿠라강 부근에서 겨울을 보내고 그루지아로 침입하여 수도 티프리스(Tiflis, 지금 Tbilis)에서 그루지아군을 무찔렀다. 다시 남으로
내려와 하마단을 잿더미로 만들고 1221년 가을에 그루지아로 다시 진입하여 카스피해 연안 저지대의 좁은 통로 데르벤트(Derbent)의 협로를
통과하여, 1222년 아스족(아란인)과 깁착족을 무찌르고 러시아로 진출하여 키에프공, 체르니고프공, 가리치공 세영주가 이끄는 8만의 연합군을
1222년 5월 31일 드네프르(Dnieper)강 골짜기에서 만나 거짓 퇴각하여 적을 유인한 다음 복병으로 격파하는 전법으로 러시아 연합군을
격파했다.
징기스칸은 호라즘의 중심 도시 사마르칸트를 점령하자 바로 무하메드 술탄을 추격하는
일면 전과 확대 작전을 실행하여 큰 전과를 올린 그 배후에는 몽골 특유의 정보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하메드 출탄을 추격할 때 몽골군의
정보활동은 주도면밀했다. 이 추격전에서 제베와 수부타이는 그 지역 청년들을 모집하여 활용하였고, 현지인으로부터 술탄이 있는 위치를 파악하고
집요하게 추격하면서 잠제도를 활용하여 멀리 떨어져 있는 징기스칸과 끊임없이 연락을 취하고 지시를 받았다. 술탄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징기스칸은 제베와 수부타이로 하여금 카스피해를 멀리돌아 귀환하도록 했던 것은 몽골군이 현지 적응능력이 탁월했을 뿐 아니라 먼거리 보고 체계가
수립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한편 몽골군은 얼마나 정으로 단단히 단결되어 있나를 니샤푸르전투에서 알 수
있다. 매부 도크차르가 전사하자 투루이는 철저히 준비하여 복수전을 처절하게 했다. 몽골군이 성을 공격하여 전사자가 많으면 점령후 철저하게
복수했다. 그러나 피해가 없다면 주민들을 보호해 주었다. 니샤푸루성과 헤라트성이 좋은 예이다.
몽골군은 전사하면 반드시 그 시체를
찾아 낙타에 싣고 왔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모듬 소유물을 자루에 넣어 땅속에 묻는다. 서정(徐霆)이 보고 기록한 내용을 보면 군대에서 사망할
경우 만약 노비가 낙타로 죽은 주인의 목을 낙타에 싣고온다면 주인의 가축과 재산을 지급하고, 다른 사람이 그것을 가져온다면 처와 노예 그리고
가축과 재산을 주었다. 그래서 몽골군은 죽어도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일념에서 더욱 용감하게 싸웠다.
(5)파르완(Parwan) 및 인다스(Indas)강변 전투
사마르칸트를 함락시킨 후 징기스칸은 1220년 여름 사미르칸트 남쪽 나사프(지금
Karshi)에서 더위를 피하고 가을에 아무 다리아강으로 나가 발흐(Balkh)맞은편 도시 테르메르(Termez)를 공격하여 11일만에
함락시켰다. 1221년 봄 아무 다리아강을 건너 발흐시를 점령하여 고대 박트리아 지역(현재 아프카니스탄령 투르게스탄)을 정복했다. 징기스칸은
무하메드 술탄의 아들 자랄 웃딘이 호라산에서 활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세 아들을 보내어 적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했다. 몽골군은 자랄 웃딘의 경로를
조사하여 사막을 넘어 추격했다. 몽골군은 네사(Nassa 호라산 서쪽에 있는 도시)부근에 있는 카란다르(Kharandar)성에서 술탄의 아들이며
자랄웃딘의 두 동생 우즈라그 샤(Uzlagh Shah)와 아쿠샤(Akhu Shah)를 만나 교전중에 패주하는 척하여 그들이 승리했다고 방심하는
틈에 급습하여 두 왕자를 죽였다.
징기스칸은 발흐와 타레칸(Talecan) 함락 후 1221년 여름 박트리아 산지에서 여름을 보내고 파로포미사스(Paropamisus)산맥이 힌두쿠시(Hindukusi)산맥과 이어지는 지점에 위치하는 군사적 요충지인 바미얀(Bamijan)을 공격했다. 바미얀공격시 차카타이 아들 무츠겐이 적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징기스칸이 직접 독려하여 바미얀시를 점령하고 전리품을 생각하지 않고 모구 파괴하고 모두 살육했다.
호라즘 황태자 자랄 웃딘은 바미얀 동남쪽 500㎞에 있는 가즈니(Ghazni)에
몸을 피했다. 자랄 웃딘은 그곳에서 터키 용병과 아프가니스탄 토민들을 모아 7만명의 기병을 구성했다. 징기스칸은 4만5천명의 군사를 주어 시기
쿠두크(忽都忽)로 하여금 정벌토록 했다. 시기 쿠두크는 징기스칸이 자랄 웃딘을 감시하는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카불(Kabul)과
자부리스탄(Zabulistan) 사이 힌두쿠시 산악지역에 3만명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한 분견대가 파르완(Parwan)에서 자랄 웃딘군을
만나 패했다는 소속을 접수받고 시키 쿠두크는 전군을 이끌고 파르완 평원으로 나아가 자랄 웃딘군과 대치했다.
자랄 웃딘은 중앙을, 우익은 아민 아루 마리크(Amin Al Malik), 그리고
좌익은 아그라크(Seit-ud-din-Agrac)를 배치하였다. 전투가 시작되자 자랄 웃딘군의 우익은 1만 정도의 몽골군을 돌파했다. 급히 시기
쿠두크는 중군으로 좌익을 도와 전열을 간신히 회복했다. 이후 자랄 웃딘군과 시기 쿠두크군은 파르완 평원에서 서로 돌격하면서 싸웠으나 승패를
결정짓지 못했다. 그래서 밤이 되어 각각의 진지로 돌아갔다. 시기 쿠두크는 몽골군의 수가 적보다 적었으므로 밤사이에 예비 말에 인형을 태우고
다음날 아침 전투대형을 갖추고 지원병이 도착한 것처럼 꾸몄다. 자랄 웃딘은 기병들에게 허리띠에 말고삐를 묶도록하여 전투대형을 갖추고 몽골군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몽골기병은 적진으로 돌격했으나 빗발치는 화살로 사상자가 속출하여 진영을
재정비하려고 일단 뒤로 물러섰다가 재차 공격하자 자랄 웃딘의 진영이 무너지는 듯했다. 이때 자랄 웃딘은 나팔을 불게 했다. 그러자 호라즘군은
대형을 넓히면서 몽골군을 양익으로 포위할 듯이 덤벼들었다. 시기 쿠두크는 군기를 잡고 지휘했으나 몽골병은 군기를 보이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다가 평지에 패인 홈에 말발굽이 빠져 말과 사람이 같이 나둥그러지면서 추격하는 적의 휘두르는 칼에 맞아 태반이 죽음을 당했다.
파르완 전투는 몽골군이 패한 최초의 전투였다. 징기스칸은 파르완의 패배소식을 듣고
“지금까지 시기 쿠두크는 너무 승리만 하여 어려움에 대처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다. 실패의 교훈을 잘 살려 활용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조용히
타일렀다. 그리고는 징기스칸은 2일간에 걸쳐 병사들이 식사를 끓여 먹을 틈을 주지 않고 서둘러 파르완으로 향했다. 파르완에 도착하여 먼저
쿠두크로부터 양군 진형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징기스칸은 쿠두크의 작전 방법이 나빴음을 꾸짖고 전쟁터의 선정도 잘못됐음을 지적했다. 전쟁 패인이
쿠두크의 지휘 잘못에 있음을 일깨어 주었다.
징기스칸은 서기 1221년 가을에 호라즘에서 귀환한 주치, 차카타이 및 오고타이와
호라산에서 돌아온 투루이와 함께 가즈니(Ghazni)로 급히 진격했다. 모하메드의 아들 잘라 웃딘이 새로운 근거지를 찾아 이곳으로 갔기
때문이었다. 징기스칸은 가즈니에 도착하니 이미 자랄 웃딘은 그곳에 없었다. 자랄 웃딘은 대승이후 전리품을 서로 다툼으로 해서 아프가니스탄병과
터키병과의 불화로 병력들이 모두 흩어져 가즈니를 지킬 수 없었다. 그래서 인도 국경을 넘어 편지압 지방으로 달아나려 했다. 징기스칸은 자랄
웃딘군이 인더스(Indus)강을 건너 도주할 것이라는 정보를 접하고 급히 추격하여 밤중에 인더스강 가까이서 적의 후위를 만나 격파했다.
서기 1221년 11월 24일 인더스강을 배후로 몽골군과 자랄 웃딘의 호라즘군이
결전을 벌렸다. 자랄 웃딘은 우익에 정예 이슬람군을 배치하고 용장 아민 아르말릭이 지휘하에 인더스강을 따라 몽골군 우익을 공격하도록 했다.
징기스칸은 반월형(半月形)으로 진형을 갖추고 여러 겹으로 종대를 이루어 자랄 웃딘군을 포위했다. 달이 밝아 전투는 계속되어 몽골군은 자랄
웃딘군을 초생달 모양으로 겹겹이 쌓고 인더스강으로 조여들자 자랄 웃딘군은 본의 아니게 배수진이 되어 버렸다.
징기스칸은 적의 우익이 강함을 알고 먼저 적의 우익을 집중공격하자 아민 아르
말릭의 우익은 거의 전멸하고 아민 아르 말릭은 판지압지방으로 도주해 버렸다. 날이 밝자 몽골군이 포위망을 좁혀 오자 자랄 웃딘은 700명
정예부대로 중앙을 수비하도록 하면서 포위망을 뚫으려고 전후좌후를 돌격하면서 결사적으로 싸웠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육박전(肉薄戰)이 서서히
진행되었다. 정오가 되어 자랄 웃딘은 포위를 도저히 돌파할 수 없음을 알고, 등에 방패를 매고 손에 기를 들고 인더스강까지 말을 달려가서
20척(6미터)이나 되는 절벽에서 말과 함께 인더스강의 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리고 헤엄쳐서 인도 쪽으로 도망해 버렸다.
징기스칸은 도망하는 자랄 웃딘을 높은 언덕에서 바라보며 침묵하고 있다가 “저런
아들을 둔 아버지는 행복한 사람이야”라고 말하면서 자기 아들에게 배우라고 말했다. 그리고 추격을 중지했다. 징기스칸은 인더스강 우안으로 북상하여
서기 1222년 봄 힌두쿠시 산중에서 여름을 보냈다. 그러나 다음해에 발라 노얀(八刺)이 인더스강을 넘어 물탄(Multan)과
라흐레(Lahore)를 유린하면서 자랄 웃딘을 추격했으나 너무 더워 탐색을 포기하고 돌아왔다.
징기스칸은 자랄 웃딘이 다시 재기해 쳐들어 올 것에 대비하여 1222년 봄에
오고타이를 시켜 가즈니를 토벌케 했다. 오고타이는 가즈니를 파괴했다. 헤라트시에서 자랄 웃딘이 파르완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시민들이
몽골군에 반기를 들었다. 그래서 징기스칸은 에르지기데이(Ilchigidei)를 보내 오고타이를 증원하도록 했다. 주민들은 집요하게 저항했으나
1222년 6월 14일 헤라트(Herat)는 에르지기데이 부대에 의해 함락되고 철저히 파괴되었고 주민들은 1주일 동안 학살되었다.
메르프(Merv) 그리고 발흐시도 파르완 승리의 소식을 듣고 반란을 이르켰으나 징기스칸이 보낸 5천명의 두루바이부대에 의해 다시 점령되어
파괴되었다.
서기 1223년 봄에 징기스칸은 사마르칸트를 출발하여 그해 여름을 타시켄트에서
가까운 크란바시(Qulan Bashi)에서 보내고 가을에 이르티시강 상류에 머물러 있다가 1224년에 다시 출발하여 1225년 봄에
투우라강가(지금 울란바토르 지방)에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남러시아를 원정하고 돌아오는 체베와 수부타이군과 합류했다.
징기스칸의 몽골군은 부당하게 재물을 약탈하거나 순순히 항복하지 않고 강력하게
저항할 때 철저히 잔인하게 복수하였다. 호라즘 전투에서 몽골군은 기술자들을 우대하여 즉시 활용하였다. 다른 한편 지역 주민을 동원하여 요새를
공격하는 잔인성을 보여주었다. 성을 지키고 있던 호라즘 시민들은 그들의 동족이 몽골군 선두에 서서 성의 해자를 메우고 공성기를 옮기자 동족에게
활을 쏠 수도 없어서 참담한 마음으로 성을 사수하려는 의지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재앙을 끌어들인 호라즘 샤 아라우드 딘 모하메드(Alaud Din
Mohammed, 1119∼1220)는 첫째, 너무 사리사욕이 많아서 이웃 이슬람족과 사이가 좋지 못하였으며, 둘째, 몽골사절단과 상인들을
이유없이 약탈하고 살해하여 벌써 왕으로서의 도덕성을 잃었으며 징기스칸의 공격 구실을 주었다. 셋째,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오만하게 굴다가
몽골군을 만나자 우유부단하여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했으며, 넷째, 전략과 전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여 각 도시에 많은 병력이 산재해 있었으므로
이를 집중시켜 몽골군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각 도시와 성을 그 지역 군인과 주민에게 맡겨 굳게 지키기만 하다가 몽골군의 집중공격을 받아 차례차례
모두 패하고 말았다.
징기스칸은 서기 1218년에서 1224년에 이르는 7년간의
서정(西征)을 마치고 서기 1225년 몽골로 개선했다. 귀국 즉시 그는 금국(金國)정벌에 나서려 했다. 그래서 서기 1225년 겨울에 대군을
일으켜 금국으로 진격하려 했다. 이에 야율초재(耶律楚材)는 금국정벌의 시기가 아님을 건의하여 정벌을 중지되었다.
칸(khan)
칸(khan)이란 왕이라는 뜻으로 몽골족과 그 주변유목민족이 부르던 호칭이다.
영어로는 (khan) 이며 한자로는 (汗) 이라고 표기한다.
여기서 한가지 특징은 유라시아 대륙의 서부에서는 '칸' 이라고 발음하며 동쪽에선 '한' 이라고 발음하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몽골이 세웠던 원(元)나라의 서쪽의 몽골국들은 칸국이라고 부르지 않고 '한국' 이라고 부른다. 차카타이 한국, 일한국, 킵차크 한국 등등 한국이라고 불리운다.
실제로 우리가 칸이라고 하는 이 음의 발음은 '칸' 과 '한' 의 중간음으로 한글로 표기할수가 없는 음이다. 굳이 발음하자면 "크한" 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한자로 汗(땀 한)이란 별뜻없이 중국어 발음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영어로 khan인것은 '칸' 과 '한' 의 두가지 음을 표기하기 위해 khan 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모든 유목민족이 칸이라는 호칭을 썻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흉노족의 왕은 '선우' 라고 불리웠다.
내용출처 : [기타] 인터넷 : www.army.go.kr/news/magazine/242/242151.htm |
징기스칸 어록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내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그림자말고는 친구도 없고 병사로만 10만.
백성은 어린애, 노인까지 합쳐 2백만도 되지 않았다.
배운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맞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깡그리 쓸어버렸다.
나를 극복하는 그순간 나는 징기스칸이 되었다.
하나, 몽고의 전통적인 십호장제를 확대하여 몽고유목민 전체를 하나로 [조직화] 한것.
內容出處: Internet 知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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