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의 개성적 문체는 곧 체제에 대한 위협
당대의 철학 정치 경제 천문 지리 풍속 제도 역사 고적 문화 등을 담고 있는 ‘열하일기’의 의미는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금서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서 찾을 수 있다. 1780년 5월 25일 한양을 떠난 연암 박지원(1737~1805)은 6월 24일 압록강을 건너 북경을 거쳐 청나라 황제가 거주하는 열하를 방문하고 8월 20일 북경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10월 27일 한양에 돌아왔다. 그러나 열하일기는 6월 24일부터 8월 20일간의 두 달, 즉 압록강-북경-열하-북경까지의 여정만을 담고 있다.
늘 있어 오던 연행록의 하나인데 왜 하필이면 연암의 ‘열하일기’가 금서가 되어야 했던 것일까? 그 비밀은 정조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찾을 수 있다.
“근일에 문풍(文風)이 이와 같이 된 것은 그 근원을 따지면 박지원의 죄 아닌 것이 없다. ‘열하일기’는 나도 이미 숙독하였다. ‘열하일기’가 세상에 전파된 후로 문체가 이와 같이 되었으니 마땅히 이것을 맨 사람으로 하여금 그 매듭을 풀게 할 것이다.”
정조는 전통과 근대, 동양과 서양이 치열하게 맞붙던 시기의 국왕이다. 한때 근대와 서양에 관심을 갖기도 했던 정조는 결국 개방이 가져올 파장에 대한 두려움으로 전통 사수로 돌아선다. 이 지점에 연암의 ‘열하일기’가 놓여있는 것이다.
문체반정(文體反正), 국왕 교체에나 쓰는 반정(反正)이라는 말을 사용할 만큼 문체는 곧 체제였으며, 정조는 박지원의 개성적인 문체에서 체제에 대한 위협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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