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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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혁명사상의 핵심

鶴山 徐 仁 2005. 8. 3. 00:34
번 호   6948 조 회   299
이 름   조갑제 날 짜   2005년 8월 2일 화요일
박정희 혁명사상의 핵심
모든 성공한 혁명에는 논리와 철학이 있다. 20세기의 가장 성공적인 박정희 식 근대화 모델을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이 근대화 혁명을 가능하게 만든 논리로서의 철학을 말하는 사람은 적다. 박정희 사상이 지금까지 별로 정리되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자신의 논리를 어렵고 고상하고 정교하게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직설적으로 투박하게 툭툭 여기저기 던져놓기만 했던 몇 줄의 글들을 다시 모아서 지나간 세월의 캔버스에 배열해놓으면 비로소 이 혁명아가 그리고 있었던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의 설계도, 그 밑그림이 나타나는 것이다.

박정희는 우리 민족사의 위대한 1급 지식인이자 사상가였고, 그 사상을 실천에 옮겨 민족이 처한 상황을 타파해간 혁명가였다. 삼국통일로써 우리 민족사에서 공간적인 현상 타파를 가져온 김유신(金庾信), 그리고 한글 창제로써 정신적인 현상 타파를 꾀했던 세종대왕과 같은 반열에 서게 될 당대의 진보적 사상가였다. 그는 청빈(淸貧)을 위선자와 패배자의 변명이라고 경멸하고 우리 민족의 숙명처럼 따라다니던 가난을 물리침으로써 민족사의 물질적인 제약을 타파해간 사람이다.

혁명가 박정희의 진정한 혁명성은 그가 생전에 자신의 혁명논리를 체계화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던 점에 있다. 혁명이 이념화되면 우상숭배로 전락하고 혁명을 타락시킨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 어떤 주의나 학설의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고 그 어떤 주의나 학설도 거부하지 않고 자유자재로 활용했던 실용성과 주체성이 그의 진정한 혁명논리였다. 그는 섣부른 이념이 없을 때 영구혁명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박정희의 혁명적 발상은 그 당시 한국의 지배층과 지식인들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던 '민주주의는 신(神)이다'는 신앙에 도전했다는 점이다.

그는 한민당에 뿌리를 둔 해방 후의 정치세력(여기엔 야당, 언론인, 학생, 일부 교수들, 종교인들이 포함된다)을 민주주의의 탈을 쓴 봉건적 수구세력으로 규정했다. 그들 구정치인(舊政治人)이야말로 "덮어놓고 흉내낸 식의 절름발이 직수입 민주주의"를 맹신하는 사대주의자라고 단정하기도 했다. 그의 혁명적 역사관은 서구식 민주주의 맹신자들이야말로 조선시대의 당파싸움 전문가들과 본질적으로 같은 위선적 명분론자라고 규정했다.

그는 4.19와 5.16혁명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4.19혁명은 "피곤한 5천년의 역사, 절름발이의 왜곡된 민주주의, 텅 빈 폐허의 바탕 위에 서서 이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라는 명제를 던졌고 이 명제에 해답하기 위한 '역사에의 민족적 총궐기'가 5.16이란 것이다. 4.19와 5.16을 동일선상에 놓는다는 것은 자유당과 민주당을 똑같은 봉건적.수구적 세력, 즉 근대화 혁명의 대상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그는 5.16 군사혁명을 이런 식으로 설명했다.

"불원(不遠)한 장래에 망국의 비운을 맛보아야 할 긴박한 사태를 보고도 인내와 방관을 미덕으로 허울 좋은 국토방위란 임무만을 고수하여야 한단 말인가. 정의로운 애국군대는 인내나 방관이란 허명(虛名)을 내세워 부패한 정권과 공모하고 있을 수는 도저히 없었다. 말하자면 5.16혁명은 이 공모를 거부하고, 박차고 내적(內敵)의 소탕을 위하여 출동한 작전상 이동에 불과하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는 서구식 민주주의의 강제적 이식(移植)과 맹목적 추종을 비판했으나 자유민주주의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자주정신이 강한 그로서는 외래 정치사상을 부정하고 싶고 그리하여 민주주의란 이름이 붙지 않는 한국식 정치원리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지만 자신과 한국의 처지를 자각하고 있었다. "엄격한 의미로서 혁명의 본질은, 본시 근본적인 정치사상의 대체와 사회 정치구조의 변혁을 뜻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런 점에 있어 한계가 제약되어 있고, 그 혁명의 추진에 각양(各樣)의 제동작용이 수반되고 있다.

우리는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원칙으로 함에는 벗어날 수가 없다. 민주주의의 신봉을 견지하는 한 여론의 자유를 막을 수는 없다. '토론의 자유' 속에 '혁명의 구심력'을 찾아야 하는 혁명. 바로 이것이 본인이 추구하는 이상혁명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힘이 들고 어려운 길이다."

박정희 근대화 혁명이 성공한 요인은 유교의 실용성과 집단주의적 희생정신을 동원하여 이를 서구 자본주의의 시장원리에 연결시킴으로써 경쟁체제의 작동에 의한 영원한 자전력(自轉力)을 얻어냈다는 점에 있다. 동양과 서양문화의 장점을 뽑아내어 종합한 셈인데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의 주체적 관점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자조-자립-자주-통일의 단게적 발전 전략

박정희의 국가 근대화 전략은 자조-자립-자주의 정신적 근대화 과정(이를 그는 주체의식의 확립혁명이며 인간 개조라고 했다)을 그 추진력의 원천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자신의 노력에 의하여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보겠다는 자조(自助)정신이 생겨야 자립경제가 건설될 수가 있고 자립경제를 기반으로 할 때만이 자주국방을 할 수가 있다. '자주국방능력이 없는 국가는 진정한 독립국가가 아니다'는 생각을 확집(確執)처럼 갖고 있었던 점에서 박정희는 우리 민족사에서 김유신과 가장 닮은 자주적 국가관의 소유자이다. 박정희는 국토통일도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을 건설한 다음에야 우리 주도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통일관을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1976년 1월 24일 국방부를 연두순시한 자리에서, 미리 준비된 원고를 읽는 식이 아니라 자신의 소감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밝힌 내용이다.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찾아낸 녹음 테이프에서 가감 없이 풀어본다.

"특히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논리를 이론적으로 여러 가지로 제시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공산주의를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왜냐. 우리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우리가 용납해선 안 된다. 공산당은 우리의 긴 역사와 문화, 전통을 부정하고 달려드는 집단이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만이 우리 민족사의 역사적 정통성을 계승하여 지켜가는 국가이다. 하는 점에 대해서 우리가 반공교육을 강화해야 하겠습니다. 공산당이 지난 30년간 민족에게 저지른 반역적인 행위는 우리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을 겁니다. 후세 역사도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온 것은 전쟁만은 피해야겠다는 일념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이 분단 상태를 통일을 해야겠는데 무력을 쓰면 통일도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번 더 붙어서 피를 흘리고 나면 감정이 격화되어 몇십 년 간 통일이 또 늦어진다. 그러니 통일은 좀 늦어지더라도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고 우리가 참을 수 없는 그 모든 것을 참아온 겁니다. 우리의 이런 방침에 추호의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그들이 무력으로 접어들 때는 결판을 내야 합니다. 기독교의 성경책이나 불경책에서는 살생을 싫어하지만 어떤 불법적이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침범할 때는 그것을 쳐부수는 것을 정의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누가 내 볼을 때리면 이쪽 따귀를 내주고는 때려라고 하면서 적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지만 선량한 양떼를 잡아먹으러 들어가는 이리떼는 이것을 뚜드려 잡아죽이는 것이 기독교정신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도 우리 동족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무력으로 쳐 올라갈 리야 없지만 그들이 또다시 6.25와 같은 반역적 침략을 해올 때에 대비하고 있다가 그때는 결판을 내야 합니다.

통일은 언젠가는 아마도 남북한이 실력을 가지고 결판이 날 겁니다. 대외적으로 내어놓고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미, 소, 중, 일 4대 강국이 어떻고 하는데 밤낮 그런 소리 해보았자 소용없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객관적 여건이 조성되었을 때 남북한이 실력으로 결판을 낼 겁니다. 그러니 조금 빤해졌다 해서, 소강 상태라 해서 안심을 한다든지 만심을 한다든지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