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외국작가 畵壇

[스크랩] 모나리자 이야기

鶴山 徐 仁 2005. 7. 25. 11:11

[모나리자] 이야기

루브르에서 가장 유명하며,

오늘도 숱한 관람객들의 탄성을 터뜨리게 하는 그림

최고의 그림으로 대우받기까지 그 숱한 고난과 역경도 최고였어요

루브르 박물관에 지금의 모나리자가 있기까지 한번 살펴보죠~



17세기와 18세기 동안에만 50여 점 이상의 위작이 나돌았고

관광객용 기념품을 제작하는 수많은 업자들에 의해

그림의 신비로운 면은 많이 손실되었어요

1864년 테오필 고티에는 "비틀리고, 꾸불대고,

양끝이 살짝 치켜 올라가고, 보랏빛이 희미하게 감도는 입술"이라고

넋을 잃고 극찬하기도 했어요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77*53Cm의 튼튼한 포플러 나무판 두 개를 덧대어

그 위에 그림을 그렸는데요

이것은 지금까지 최소한의 손상을 갖고

무사히 보존될 수 있었던 까닭이기도 하죠

모나리자의 얼굴을 보면 안색이 창백함을 알 수 있는데요

이는 어린 딸을 잃은 슬픔 때문이었다 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1951년 1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탄생 500주년을 기념해서

마련된 전시회를 앞두고 실험실에서 밝혀낸 결과,

얼굴의 색조가 변질된 것으로 밝혀졌어요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흰빛을 띤 상앗빛 색조를 뚜렷하게 드러내기 위해

래커와 꼭두서니 뿌리에서 빼낸 붉은 염료로

모나리자의 은은한 얼굴빛을 그려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이것이 사라진 것이었죠

레오나르도는 이 초상화를 완성하기 위해 수많은 주문을 거절하기도 했어요

그가 이 초상화에 왜 그토록 집착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밀라노, 로마, 프랑스로 옮겨다닐 때에도 "모나리자"는 언제나 그와 함께 했어요

[모나리자]의 최초 소유자는 누구였을까요?

레오나르도가 1519년 5월2일 세상을 떠나고

그의 제자이자 유언 집행자였던 프란시스코 멜지도

그날 따라 그의 곁에 없었어요

1515년부터 1547년까지 프랑스의 왕이었던 프랑수와 1세...


Portrait of Francois I, King of France 1525-30 

위대한 천재를 너무나 아꼈던 프랑수아 1세가 밤새워 그의 임종을 지켜보았어요

프랑수아 1세는 1534년 퐁텐블로 성의

야심만만하고 독창적인 형태로 건축한 욕실 벽에

[모나리자]를 걸어놓았다고 해요


Palace of Fontainebleau

지금 생각하면, 무슨 그림을 욕실에 걸어 놓을 수가 있냐...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테지만...
그 당시의 욕실은 모임의 장소이자 중요한 안건이 결정 나는

중요한 장소임은 틀림없었어요

욕실의 구조가 궁금하시죠?!

예술품 수집관의 1층에 위치했던 욕실은 모두 7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고요

세 곳은 욕탕, 세 곳은 휴게실이었어요

커다란 화덕으로 공기를 덥혔던 첫 번째 방은 일종의 한증막이었고

두 번째 방에는 청동욕조가 있었죠

마지막 세 번 째 방에는 청동색의 나무로

둥그렇게 두른 커다란 욕조가 가운데 있었어요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죠?!

이곳에서 왕은 국사를 논의하고 철학적 문제를 놓고 토론하는 등

국가적인 문제와 외교적인 문제를 상의하는 은밀하고도 고급스런 자리였다고 해요

욕탕에는 에로틱한 신화의 주인공들을 묘사한 프레스코 벽화로 꾸며져있고

휴게실에는 15점의 작은 그림들이...

그 그림들은 로소ㅡ 안드레아 델 사르토, 라파엘,

티티엔의 대표작과 더불어 "모나리자"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죠

[모나리자] 이야기 Ⅱ 


"모나리자"가 퐁텐플로의 욕실에 걸리자

버킹엄 대공, 조지 빌리어즈가 그림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어요

앙리 4세의 딸, 앙리에트 마리를 왕비로 맞아들이려던

찰스 1세의 특사로 파견된 공작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예술품 애호가였죠

공작은 프랑스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을 손에 넣기 위해 백방으로 애를 썼어요

그러나 루이 13세 측의 중매쟁이가 적극적으로 반대함으로써

"모나리자"는 프랑스 공주의 약혼 선물로서 영불해협을 건너지 않게 되었어요

다행히.... 공주는 "모나리자" 그림 없이 무사히 결혼했다고 해요~ >1623년 버킹엄 공작은 마드리드에서 또 비슷한 일을 꾸민 적이 있었어요

스페인 왕의 누이에게서 결혼 승낙을 얻어내지는 못했지만,

현재 루브르 박물관의 같은 전시실에 "모나리자"와 나란히 걸려있는

티티엔의 "파르도의 비너스"를 선물로 얻을 수 있었죠


Jupiter and Anthiope (Pardo-Venus) /1540-42 Oil on canvas, 196 x 386 cm
Musee du Louvre, Paris

"모나리자"는 1695년 태양왕의 작은 갤러리에 걸리게 되었어요

1706년 베르사유에 있던 태양왕 갤러리로 다시 되돌아가서
1764년까지 제1전시실을 장식했다고 해요

프랑스적 취향을 즐겼던 루이15세...

루이 15세가 "모나리자"의 매력을 얼마나 느꼈을까요?

아마도 루이 15세는 "모나리자" 취향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모나리자"는 1760년 재무장관의 응접실로 옮겨질 수밖에 없었죠

퐁텐플로의 욕실이나 베르사유의 갤러리에 비하면

모나리자의 수난시대일 수밖에 없었죠

여하튼 모나리자는 1788년까지 쭈욱~ 그곳에 있었지만,

대혁명으로 인하여 "모나리자는 국가 재산이다"라는 선언 하에

또 다른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예술 중앙 박물관은 군주제가 몰락한 첫 해를 기념한다는 뜻에서

상징적으로 1793년 8월10일에 개관되었어요

일반 시민에게는 1월18일부터 관람이 허용되었죠

왕들이 수집한 위대한 예술품들을 복원, 전시하기 위해

전문가들은 여러 작품을 둘러보았죠

100여 점의 작품 중에서도

푸셍의 그림 3점, 티티엔의 작품 3점,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아름다운 페르니에르],

[성스러운 가족], [모나리자]가 가장 눈에 띄었다고 해요


Virgin & Child with St. Anne & John the Baptist (The Cartoon with St. Anne)

이렇게 모나리자는 프랑수아 1세와 그 신하들이 목욕하던 모습을 지켜보다가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었다가, 튈르리 궁전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죠

1800년! 나폴레옹은 튈르리 궁전의 주인이 되었고,

 The Palais des Tuileries 

"튈르리 궁전의 옛 흔적을 모두 지워라!"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나폴레옹은 3층을 차지하고

조세핀을 1층을...

모나리자는??

나폴레옹이 모나리자를 좋아했을까요?

1804년 나폴레옹은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에서 약탈해 온 전리품과 더불어

모나리자를 셍-클루 성으로 보냈다고 해요

이것만 봐도 나폴레옹은 모나리자에 애착을 가지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그후 거의 100년 동안 주욱~~~ 그 자리를 모나리자는 지키고 있었죠


일부학자들과 애호가만이 감상할 수 있었던 모나리자는

19세기 중반부터 판화, 1880년대부터는 사진으로

대중들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집니다

또, 잡지의 표지 모델로 우표 속의 여인으로,

루브르의 상징이자 파리의 자랑거리로 대중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행복도 잠시.... .... ...

1911년 8월 21일,

"모나리자"는 쥐도 새도 모르게 감쪽같이 사라져버립니다

어떤 일이 일어난 걸까요?


[모나리자] 이야기 Ⅲ 

1911년 8월21일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진 "모나리자"


Giuseppe Castiglione The "Salon Carre", in 1865, at the Louvre Museum

수많은 관람객이 루브르 박물관의 살롱 카레를 찾았지만

그곳은 텅 빈... 공간 분이었어요

루브르 박물관 후원회는

그 초상화를 찾아주는 사람에게

2만5천 프랑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하고,

그 밖의 후원회에서도 5만 프랑을 주겠다,

신문사로 가져오면 4만 프랑을 주겠다 등등

보상금을 내걸고 있었죠




당시 27살로 건물 벽에 그림을 그리던

이탈리아 화가, 빈센조 페루기아는

아주 대담한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어요

루브르의 정기 휴일이던 1911년 8월21일 월요일 아침 일찍

그는 살롱 카레에서 "모나리자"를 떼어내서

여유 있게 걸어나갔던 것이죠

경비원들은 사진을 찍으려는 것이라 생각하고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고 해요

설마 루브르로 들어와 당당히

도둑질을 해 가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죠

페루기아가 그림을 갖고 유유히 떠나고 난 후

1시간 후에야 그림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고 합니다


Layout of the Grand Louvre 

빈센조 페루기아... 과연 어떻게 그림을 훔쳤던 것일까요?

훗날 그가 자백한 범행 일체는 이러했다고 합니다

세느강 쪽으로 있는 쟝-구종 문을 통해

박물관으로 들어간 후

주형실을 지나 중앙 계단을 통해서

살롱 카레로 들어갔어요

액자를 좁은 계단에서 벗겨내고

그림만 셔츠로 둘둘 말아 감췄죠

그리고 다시 중앙 계단으로 올라가

르퓌엘 문을 통해 루브르 강둑으로 빠져나갔다고 해요

그는 집으로 돌아와 감춰두고

9시가 되어서 출근을 했다고 합니다

왜 지각을 했느냐는 상사의 말에

지난 밤 결혼을 해서... 라는 핑계를 댔었죠

페루기아는 1910년에 루브르 박물관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고 해요

그러니 박물관의 구조를 훤히 내다보고 있었겠죠


General Plan of the Louvre Palace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의 지문을 채취해서

모나리자의 유리에서 발견된

약간 눌렸지만 뚜렷이 읽을 수 있었던

엄지 손가락의 지문과 비교해 볼 생각도 하지 않았고

더군다나 그의 초라한 방을 뒤져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네요

덕분에 그는 허름한 나무 상자 속에

무려 2년 반 동안이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모나리자"를 감춰둘 수 있었죠



1914년 피렌체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

그는 "모나리자"를 조국의 품에 돌려주고 싶었다고 주장합니다

이탈리아 이민자에 대한

프랑스인의 차별에 분노를 터뜨린 이런 애국적 행동은

피렌체 시민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죠

결국 그는 1년2주일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어요

그리고 경비원들을 비롯해

루브르의 고위 관계자들은 전부 해고를 당하는 아픔이 있었죠

모나리자의 수난과 여행, 이것이 전부였을까요?


[모나리자] 이야기 Ⅳ 


20세기에도 모나리자의 수난은 계속 되었어요

고미술상 카를로-알프레도 게리는

우피치 미술관에 모나리자를 내걸었어요

원래의 고향이었던 피렌체로 다시 돌아온 것이죠

정말 최고의 작품이라는 말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었어요

로마의 파르네스 궁, 보르게스 빌라,

메디치 빌라, 그리고 밀라노의 브레라 미술관을 마지막으로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의 리옹행 기차를 타야 했어요

리옹에 도착한 즉시, 리옹 예술학교로 실려가 진품 확인을 받았고

그곳에서 한동안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지만

1914년 1월4일 옛 집인 루브르로 다시 돌아갔어요

하지만, 모나리자에게도 큰 시련은 있었지요

1919년 마르셀 뒤샹에게 호된 시련을 당해야 했죠




뒤샹은 피렌체의 여인에게 콧수염과 짤막한 턱수염을 그려 넣고

라는 수수께기 같은 글을 남겨 놓았죠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모나리자를 이용한 그림들이 나돌았죠


>



Francois Picabia, 1942 replica of Marcel Duchamp, L.H.O.O.Q. 1919

그러나 모나리자를 향한 경외심은 여전했어요

2차 대전 중 파리를 점령했던 독일군 조차도

그녀를 여신처럼 떠받들었죠

독일군의 진주에 따라 모나리자는

루브르 박물관의 예술품들과 함께 긴 여행을 떠나야만 했어요

1938년 독일군이 파리에 입성하기 전에

모나리자는 샹보르 궁으로 보내졌어요


샹보르 성 (Chateau de Chanbord) 

왜냐하면 루브르에서 가져온 예술품들의 선별 작업이

그곳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에요

1939년에는 다시 루비니로 옮겨졌어요

루브르의 관리인들이 보관 장소로 선정했던

르와르 강 북쪽에 위치한 여섯 군데 성 중의 하나였죠

그러나 프랑스가 완전히 독일의 손에 들어가면서

모나리자는 수많은 피난민의 틈에 끼여

1940년 7월 5일부터 15일까지

투르의 은신처를 찾아가는 힘겨운 여행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시 3천 여점의 다른 미술품과 함께

록 외디 수도원으로 옮겨져야 했죠

그곳은 습도가 아주 높았다고 해요

모나리자가 오래 머문다면

폭격을 맞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이었죠

급한 나머지 일시적인 방패로

몽토방의 잉그르 박물관으로 잠시 피난해 있었다고 해요

모나리자는 그곳에서 겨울을 보낸 후

국보급 예술품들을 실은 65대의 트럭 중에 하나에 실려

몽탈 성으로 향하게 되었죠

인접해 있던 앙스의 베드폴 성과 라스티냑 성이 불타고 파괴되는

엄청난 전투를 옆에서 지켜보며 모나리자는 견뎌야만 했어요

마침내 평화가 찾아오고...

모나리자는 관리인의 개인 승용차에 실려 운반되는

특혜를 누리며 루브르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해요

그러나!! 1957년 1월...........

모나리자는 볼리비라 사내의 야만적 만행에서

가까스로 벗어나는 일을 겪게 됩니다

우고 안자가 빌레가라는 사내가

그녀를 향해 돌을 던졌던 것이었죠

기적적으로 약간 긁히는 상처로 끝났지만

잘못되었다면 지금의 모나리자의 미소를 볼 수 없었을 수도 있었겠지요

그의 범행 동기가 뭐였냐?? 하면

경찰서의 유치장일 망정

따뜻한 곳에서 하루를 보내고 싶었던

간절한 소망에서였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모나리자의 긁힌 상처는 잘 아물 수 있었죠

과거의 여러 가지 수난에 비하면 별 일은 아니죠?!

다음 편이 여기서 또 궁금해지시나요~

좋은 하루 되시고, 알찬 시간 보내세요!



Cookie Jar (two views)


Movie Mona Gift Wrap


Mona Lisa Socks


Lid from can of quince jelly. Gift of Christine L. Sundt


Merle Nacht, 1999: contact (860) 563-7993
Illustration by Merle Nacht from article by Will Joyner.
"A Few Thousand Years of Museums, in a Nutshell,"


Postcard: Misguided Masterpieces Series


Greeting Card "Another famous face is looking great in braces."

>『 Ave Maria 』 Rebecca Luker 


[모나리자] 이야기 Ⅴ 


드디어 마지막 편입니다....



프랑스의 제 5공화국이 미국과의 냉랭한 관계를

해소하기 위한 해결책을 모색하던 중

문화부 장관이던 앙드레 말로는


Andre Malraux 

모나리자를 미국의 특사로 파견하자는 기발한 착상 내 놓았어요

당시 미국의 퍼스트 레이디였던 재클린 케네디의 생각이기도 했죠




jacqueline kennedy 

루브르 박물관의 관계자들은

그런 정치적 목적에 이용되는 것에 대한 심한 반발을 보였지만

결국 모나리자는 미국 여행길에 올라야했어요

모나리자는 "유나이티드 스테이츠"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게 됩니다...



루브르 박물관의 가장 어린 연구원인 자닌 바티클과

앙드레 말로의 비서관이던 알베르 뵈레는

사립 탐정과 함께 모나리자의 경호를 하며 배에 오르게 되었어요

모나리자는 1등 선실의 승객으로

승객 명단에도 "모나리자"라고 올려 최고의 우대를 받았다고 해요

그림이 어떻게 최고의 우대를 받았냐구요??

당연히 그림과 함께 임무를 맡고 같이 간 사람들이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먹고 마시고 즐겼다죠...

모나리자는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의 국립박물관과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 박물관에 차례로 전시되었어요





"모나리자" 현대 속에서 찾아보기


엄중한 보안 아래 어떤 관객도 3분 이상 머무를 수 없었죠

1974년 프랑스는 일본에 대여 소련 연방은

그들의 영공을 통과하는 조건으로

소련에서도 전시하는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어요

그리고 푸쉬킨 박물관에서도 전시를 했어요

일본이 온도 조절장치까지 갖춘 전시실을 준비 하였기에

러시아도 그럴듯한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죠

러시아는 서둘러 동독 기술자들을 불러들였고

루브르 관계자들의 조언을 받아가며 특별 전시실을 만들었어요



그 중에는 벅찬 감동으로 그녀 앞에 꽃다발을 내미는 관람객도 있었다고 해요

그녀를 모셔 갈 보잉기가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소련 인민의 열화 같은 고집에

모나리자는 파리가 아닌 투폴레프로 향해야했다고 해요



원래 사진 촬영을 금하고 있지만

매일 모나리자의 앞에서는 수많은 관람객들의 플래시가 터지고 있죠

루브르는 그런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으나

엄청난 관람객을 끌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하네요~

관광객들은 단 하나의 작품을 찾아와서

그 앞에서 1분도 안 되는 시간동안

모나리자를 다 봤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최고의 작품을 프랑스에서 느꼈노라 라고...
 

그리고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광고들




상업적 목적의 하나의 이미지로 잡아가고 있는 지도 모를 일입니다...






 현재의 모나리자는

예술의 역사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렸던 그 작품이

더 이상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그렸던 다빈치,


fig. 15. Lillian Schwartz Mona Lisa/Leonardo Composite

그리고 1911년 그것을 훔쳤던 빈센조 페루기아를 제외한다면

모나리자를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 Liberta 』 Lesi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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