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다른 나라 뒤에 숨을 수 있는 작은 나라 아냐… 능동적 결정해야"
[우크라이나 침공 3년] [2]
역사학자 티머시 스나이더 인터뷰
입력 2025.02.05. 01:13업데이트 2025.02.05. 11:22
지난달 28일 티머시 스나이더 미 예일대 역사학과 교수가 노르웨이 오슬로대 강당에서 미국 외교 정책과 우크라이나 전쟁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그는 본지 인터뷰에서 “한국에 ‘우린 작은 나라니 가만히 있겠다’는 건 선택지가 될 수 없다”며 “세계에 한국의 가치와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EPA 연합뉴스
“한국은 이제 ‘작은 나라’가 아닙니다. 존재감이 너무 커져 더 이상 다른 나라 뒤에 숨을 수 없어요.”
티머시 스나이더(Snyder·56) 미국 예일대 역사학과 교수에게 한국은 세계의 미래를 책임지고 고민해야 하는 ‘큰 나라’였다. 아직 미국·중국·러시아 같은 ‘대국’ 반열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의 표현을 빌리면 “자신의 우방을 만들고 동맹을 구축하는 행위를 통해 세계를 바꿀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나라”가 됐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 3주년을 앞둔 지금 한국이 ‘능동적인 선택’을 해야 할 순간이 됐다는 것이 그의 시각이다. 한국이 서방의 일원으로 우크라이나를 적극 지원할지, 아니면 러시아·중국의 눈치를 보며 물러서 있을지 결단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의미다.
스나이더 교수는 동유럽·러시아 역사와 지정학을 연구해 권위주의 체제와 독재자들이 서구 자유민주주의를 어떻게 위협하는지를 파헤치고 대안을 제시해 온 석학으로 꼽힌다. 지난달 24일 세계경제포럼(WEF)이 열리는 스위스 다보스에서 만난 그는 “세계적 리더 국가가 됐지만 일제 식민지 시절부터 이어져 온 궤적(軌跡)에 머물고 있는 듯 보인다”는 말로 혼란을 겪고 있는 한국 상황을 걱정했다.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에 걸맞지 않게 약소국의 심리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우려였다.
–왜 한국은 불안감을 느낀다고 보나.
“한국은 일본 식민지, 6·25전쟁, 미국의 지원, 독재 시대 등을 거쳐 민주주의와 경제적 번영을 이뤘고 문화 강국이 됐다. 이처럼 중소 규모 국가가 세계적 국가가 되면 ‘자신감의 위기’를 겪는다. 중요한 나라가 되면 더 많은 책임이 따르는데 이는 (약소국 시절이 익숙한 국가에) 그 자체로 두려운 일이 된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눈에 띄지 않는’ 국가로 돌아갈 수는 없다. 한국은 경제 규모나 문화적 영향력 측면에서 아주 중요한 나라가 됐기 때문이다.”
한국은 지금 ‘자신감의 위기’ 겪는 중
–한국인 중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이가 적지 않은 듯한데.
“한국의 정치적 혼란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우린 소국이니 가만히 있겠다’는 태도는 선택지가 될 수 없다. 말 그대로 전 세계가 한국을 주시하고 있다. 더는 숨을 데가 없다는 얘기다. 외부 상황이나 한국에 미칠 영향을 (고민하는 것을) 떠나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다. 세계를 향해 한국이 추구하는 가치와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티머시 스나이더 예일대 사학과 교수./위키미디어
–북한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참전은 어떻게 보나.
“북한이 ‘우리에게도 선택지가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 사건이다. 이 때문에 한국의 다음 행보가 더욱 주목받게 됐다. 한국도 자신의 선택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는 뜻이다. 북한 군인이 유럽 땅에서 싸우고 있는 상황은 대단히 이례적이다. 단순히 우크라이나를 돕는 일이 옳은가 그른가를 넘어, 한국은 ‘북한이 유럽서 최신 전쟁 경험을 쌓으면 그게 우리에게 미칠 영향이 무엇인가’를 숙고해야 한다. 북한의 참전은 또 이 전쟁이 단순히 유럽 내 분쟁이 아니라, 세계적 차원의 충돌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확인시켜 줬다. 우크라이나는 서방의 지원을, 러시아는 북한·이란·중국의 적극적 도움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러시아의 반(反)서방 연합이 승리한다면 그 파급 효과는 전 세계를 뒤흔들 것이다. 한국에는 분명히 좋지 않은 소식이다.”
참호에서 스나이더 책 읽는 우크라이나 군인 - 한 우크라이나 군인이 참호에서 티머시 스나이더 교수가 저술한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The Road to Unfreedom)’를 읽고 있다. 러시아의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을 주로 다룬 책이다. /티머시 스나이더 X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 명분으로 ‘우크라이나란 국가나 민족은 본래 없었다’ ‘우크라이나는 나치 국가이며 러시아인을 학살한다’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가 러시아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 등의 주장을 10여 년 이상 펼쳐왔다. 스나이더 교수는 “러시아가 승리한다면, 가짜 뉴스를 앞세운 러시아의 ‘하이브리드 전쟁(비군사적 수단까지 총동원해 전쟁 상대국에 혼란과 불안을 일으키는 것)’ 기술이 한반도까지 확대될 수 있다”며 “우크라이나는 국제 질서를 지키기 위한 전쟁을 하고 있다”고 했다.
–‘국제 질서’란 무슨 의미인가.
“지금의 국제 질서는 다른 나라를 무력으로 공격해 영토를 빼앗는 행위를 금한다. 러시아와 그 동맹은 이를 부정하려 한다. 이렇게 되면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마음대로 하는 세상이 올 수 있다. 이런 미래를 막기 위해 우크라이나가 다른 모든 나라를 대신해 싸우는 전쟁이라는 의미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우리가 가짜 뉴스를 악용한 여론 조작이 판치는 세계에서 살지, 아니면 진실된 정보의 세계에서 살지를 결정짓는 전쟁이기도 하다.”
“러 승리 땐, 세계 안보 위기 올 것”
–러시아가 승리할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 전쟁의 본질은 석유와 가스로 부를 축적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자신의 환상(러시아제국의 재건)을 강제로 펼치려는 것이다. 러시아가 승리하면 더 많은 국가가 안보 위협을 느끼고, 핵무장을 시도하려 할 가능성이 크다. 중국이 대만을 무력 침공할 위험도 한층 커진다. 다른 나라를 침공해 땅과 자원을 빼앗고 그 국민을 지배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규범’이 무너지면서 강대국이 제멋대로 휘두르는 ‘힘의 논리’만 남는 위험한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현실주의·실용주의적 입장에서 러시아·중국과 타협해야 한다’는 한국 내 일부 의견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하나.
“현실주의를 내세워 가치와 원칙을 중요하지 않게 여겨서는 위험하다. 만약 그렇다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과정에서 탄생한) 한국 같은 나라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중국·러시아·북한이 위협적이다. 평화를 위해선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의 다음 단계는 ‘그렇다면 빨리 항복하자. 그게 가장 현실적이다’이고, 결국 국가와 국민을 지킬 수 없게 된다. 그것은 진정한 현실주의가 아니다. 모든 현실엔 예를 들어 ‘우리 아이들이 자유롭고 평화로우며 풍요롭게 사는 미래’ 같은 이상적 ‘가치’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 ‘가치’를 실현하려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 진짜 현실·실용주의다.”
강한 미국? 우방의 협력은 필수적
–트럼프 미 대통령의 복귀로 세계 정세의 불확실성이 더 커지고 있다. 전통적인 자유주의 우방과 동맹이 흔들릴 수도 있을까.
“‘적보다 친구와 싸우기가 더 쉽다’는 말이 있다. 트럼프는 자신이 ‘강한 지도자’임을 국내에 과시하려 위협적인 모습을 보이려 한다. 이를 위해 상대하기 어려운 ‘적’이 아닌, ‘우방’에 큰소리를 친다. 관건은 트럼프의 진의(眞意)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가 진심으로 강한 미국을 원한다면 지금의 행태는 ‘강한 미국’이란 자신의 열망에 참여해 달라는 초대로 이해할 수 있다. 트럼프가 보이는 것만이 아닌, 실질적으로 미국의 위상을 회복하려 한다면, 우방의 협력은 필수적이다.”
–한국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국은 외부 요인만 탓하기보다 스스로 ‘우리는 세계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독자들이 ‘한국에 대해 잘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불쾌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게 내 솔직한 생각이다. 한국이 상당히 중요한 나라가 됐지만, 정작 국민은 이를 실감 못 하고 있다. 한국은 세계에 긍정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나라가 됐다.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티머시 스나이더
중부 유럽과 동유럽, 러시아 역사를 주로 연구해 온 미국 역사학자. 브라운대를 졸업하고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와 하버드대에서 연구한 뒤 예일대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두 차례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 등의 사건을 통해 독재 및 전체주의 체제가 출현한 과정 등을 다룬 ‘피의 땅’ ‘20세기를 생각한다’ 등의 책을 썼다. 권위주의 확산을 막기 위한 자유민주주의 국가 시민의 지침 20개를 담은 ‘폭정: 20세기의 스무 가지 교훈’(2017년 출간)은 세계적 베스트셀러다. 모국어인 영어 외에 독일어·러시아어·우크라이나어·폴란드어·벨라루스어 등 5개 국어가 유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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