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기적"
유석희 ・ 2024. 10. 24. 6:11
[출처] "내 인생의 기적"|작성자 유석희
♣내 인생의 기적
하늘이 돈짝만 한 산골에서 어리광으로 자란 13살 막내가 하루아침에 서울로 올라온 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기적이었다.
중.고등학교 6년중 다니다 말다 야간으로 겨우 3년간 학교에 나간 후 육사에 간 것도 기적이다.
영예의 졸업장을 거머쥐고 소위로 임관하여 부대에 배치된지 몇 개월 만에 부하들을 못살게 구는 고참 대위를 패주고 무사한 게 기적이었다.
월남전에 가서 갓 중위가 되어 한국군 위에 군림하려 한 미군 소령의 발밑에 대고 M-16 소총을 연발로 발사한 후 무사한 것도 기적이다.
22개월간의 월남전 전투 생활로 몸무게 47kg이었던 내가 정일권의 애첩 정인숙의 남동생을 쥐어패서 정일권 국무총리가 김계원 참모총장에게 “지만원 중위를 처벌하고 결과보고 할 것”이라는 전통을 보낸 데 대해 정복을 입고 국무총리실로 찾아가 담판을 내고, 정인숙의 집으로 찾아가 정인숙과 담판을 하여 없던 일로 했던 사실도 기적이었다.
사관학교 졸업 후 야전과 전쟁터와 고급사령부에 근무하면서 책을 놓은지 9년 만에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유명한 미해군대학원 경영학 석사과정에 가게 된 것도 기적이다.
문과 석사에서 응용수학 박사과정으로 점프하여 학위를 받은 것도 기적이었다.
이것은 비단 나만의 기적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미 해군대학원 전체의 기적이었다. 더구나 박사 논문에서 수학분야의 최고급 과정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수학공식 두 개와 정리 6개, 알고리즘 1개를 창조한 것은 나도 놀랄 기적이었다.
중령시절 국방연구원에 근무하면서 전군에 5년동안 예산개혁을 주도했던 것도 기적이다. 2억 5천만 달러 짜리의 공군의 방공자동화 사업을 단돈 25달러 가치도 없다 하여 군을 떠들썩하게 한 죄(?)로 몇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자의 반, 타의반으로 대령 예편을 하자마자 미 국방성의 초청으로 미국에 가고, 그곳에서 바로 모교인 미해군대학원에서 교수를 한 것도 기적이었다.
1991년 처녀작인 “70만 경영체 한국군 어디로 가야 하나”라는 책을 써서 소설을 제치고 베스트셀러 1위를 7주간 연속한 것도 기적이다.
전국구 국회의원 자리, 장관 자리, 국영기업체 자리, 제안을 모두 뿌리친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이 정체를 모르던 시절, 김대중, 임동원 등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을 향해 “너는 빨갱이”하고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은 사실들도 기적이었다.
18만 쪽에 달한다는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 수사자료 및 재판자료를 5년 동안이나 집요하게 분석하여 12.12와 5.18의 진실을 밝히고, 북한 자료들을 입수하여 5.18광주에 북한 특수군이 왔다는 것을 증명해낸 것도 기적이었다.
세계적인 영상분석 능력을 보유한 영상분석 팀장 ‘노숙자 담요’를 만나 477명의 광수를 찾아낸 것도 기적, 이후의 팀워크 체제를 갖추게 된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과거를 살 때에는 어렵고 고통스러웠지만 지나고 나면 넓고 아름답다고... 하지만 내가 살았던 인생길은 뒤돌아 볼 때 더욱 아슬아슬한 벼랑길이었다. 마츠시타 고노스케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자기 일에 몰두하는 모습’이라 했다.
내가 수많은 벼랑길을 걸으면서 추락하지 않은 것은 언제나 정의와 의협심에 나를 내던지는 모습을 아름답게 지켜보는 우군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령 때 전라도 육사출신 10년 선배 대령을 만나 고과 점수 최하위를 받았지만, 진급심사에 참여했던 여러 대령들이 나를 중령으로 특진시켜 주었다.
나는 늘 정도를 걸으면서 불의에 도전했다고 장담한다. 아무런 배경도 없는 내가 소위 때 대위를 두들겨 패버렸고, 중위 때 정일권 애첩의 동생을 패버리면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이때 마다 주위에는 항상 나를 돕는 고마운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쓴 보고서로 인해 김인기 공군참모총장과 이기백 국방장관이 전두환 대통령에 불려가 혼쭐이 났으니 이들이 어찌 일개 육군대령을 가만 둘 수 있겠는가? 내가 생각해 봐도 나는 겁없는 인간처럼 살았다.
그런데 미국 국방성에서 단 한차례 세미나를 가졌던 사람들 중, 나를 향해 “당신 같은 사람을 한국이 안 쓰면 미국이 쓰겠다”며 충분한 과제비를 주어 미국방성과 미해군대학원에 근무하게 해 준 고위관리를 만난 것도 믿기 어려운 기적이었다.
- 5.18 의 진실 -
저와 제 친구들은 15년에 걸쳐 피와 눈물로 5.18의 진실을 밝혀냈습니다. 1980년 5월 18일부터 "10일동안" 북한 특수군 600명과 또 다른 전문 공작단 600여명이 선전포고 없이 침략했던 사실을 대한민국과 국제사회에 보고하기 위해 밝혀낸 진실입니다.
우리는 가장 먼저 1980년 광주에서 촬영된 사진들을 발굴해 냈습니다. 이 사진들 자체가 대한민국 사회에는 일대 충격이었습니다.
사진 속 얼굴들을 영상분석 특수 프로그램과 영상분석에 숙달된 눈매들로 분석했습니다. 최근 인테넷에 얼굴을 남긴 유명한 인물들 중 과연 누가 이들 광주의 주역들과 닮았는지를 그야말로 숙달된 전문가들이 찾아내는 작업을 한 것입니다. 그 결과 1980년 광주현장 사진 인물들 중, 무려 478명이 북한의 얼굴들이라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북한에서 출세한 장군들과 내각책임자들을 포함해 북한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대거 포함돼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이는 제가 생각해도 기적입니다.
이와 더불어 저는 1997년 한국 법원이 5.18광주 폭동역사를 민주화역사로 탈바꿈시켰던 판결내용이 6개의 중요한 사실에 대해 사실 오인이라는 결정적인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도 증명했습니다. 한국사회의 무시할 수 없는 일각에서 이 역시 기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5.18역사를 민주화역사인 것으로 성역화 해온 광주시장을 포함한 5.18유공자 단체들이 2015년 10월부터 6개월 동안 제 참모들이 발견한 이 사진들을 광주의 번화한 장소들에 전시하고 사진 속 주역들을 애타게 찾았지만 사실상 지금까지 나타난 인물이 없습니다. 광주에는 폭동을 주도한 인물이 없다는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북한이 1980년 5월 1,200명 이상을 광주로 침투시켜 대한민국을 전복시키려 했던 이 사실은 반드시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나서서 응징해야만 하는 세기적인 침략사건입니다.
대한민국은 1945년 8월 15일 미국이 흘린 피의 덕분으로 해방이 되었지만, 불행하게도 남북으로 분단되었습니다. 그 후의 한국 역사는 북한의 끝없는 군사적 도발 및 정치공작과 그에 대한 남한의 반작용으로 점철되었습니다.
북한의 도발은 비단 핵무기와 유도탄을 비롯한 군사적 측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안에 북한을 추종하는 세력을 길러 그들로 하여금 대한민국의 안보와 발전을 사사건건 방해하게 만들고, 파괴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공작적 측면도 그 만큼 강합니다.
미군이 보유한 ‘사드’를 한국 땅에 배치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자위를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국민이라면 모두가 쌍수로 환영하고 그 자산을 운영하는 미국에 대해 머리 숙이어 고마움을 표시해야 마땅한 일입니다.
하지만 매우 기이하게도 이 땅에는 사드 배치를 결사적으로 방해하는 정치인들과 국민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세력 단위로 들고 일어나 국론을 분열시키는 실로 볼썽사나운 모습들을 연일 보이고 있습니다. 이 모든 세력의 중심에는 북한의 공작이 있고, 북한의 공작을 수행하는 북한 추종세력이 있습니다.
고 이승만 대통령, 고 박정희 대통령,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집권했을 당시에는 정부가 이런 내부의 적을 물리치는 일을 최우선 과제로 수행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부터는 이 내부의 적이 거의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지상에서 떳떳하게 세력을 키워왔습니다.
그 세력이 오늘날 사회의 주요 인프라를 장악했고, 정치권과 사법부를 장악했고, 심지어는 청와대에 까지 대거 침투해 있다는 것이 대한민국을 지극히 사랑하는 애국진영 국민들의 공통된 생각입니다.
대한민국에 북한 추종세력이 기하급수적으로 확산된 것은 공산주의자인 김대중 및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재직하면서 부터 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뿌리는 1980년 5월 18일부터 10일 동안 광주에서 발생한 무장폭동을, 역사 의식이 없는 정치꾼들이 정치적 이해타산에 의해, 민주화운동이라고 그 성격을 규정하고 그 관련자들에 엄청난 명예와 유사 이래 유례가 없는 파격적인 금전적 보상 그리고 공짜복지를 제공하는 데 있습니다.
무기고를
● 지 만 원 박사의 유서
피눈물 나는 절규의 외마디소리가 가슴을 저밉니다.
어쩌면 이 글내용이 마지막 유서 일지도...
※지만원 박사(육사22기)의 호소문 입니다.
안이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한다!
야간 中.高를 전전했지요.
잠 잘 곳이 없어 미나리 밭에 지어진 검은 판잣집 교실에서 잤습니다.
천둥번개에 놀라 밖으로 뛰었습니다.
은가루 쏟아져 내리는 가로등이 위안이었습니다.
울타리 없는 집 연탄 부뚜막에서 새우처럼 잤습니다.
이런 저를 키워준 곳이 육군사관학교 였습니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백지 가슴에 도서관 책을 입력하고 싶었습니다.
멋의 표상도 훌륭한 교사도 책 속에 있었습니다.
소위 때 베트남 전쟁터를 지원했습니다.
전쟁터는 용기와 순발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이었습니다.
44개월 동안 전투를 했습니다.
국가덕분에 지혜와 지략이 훈련되었습니다.
철모 속에 영문단편소설을 넣고 정글을 누볐습니다.
육사를 졸업한지 9년 만에 유학시험을 치렀습니다.
미 해군대학원 학비가 스텐포드의 2.5배 였습니다.
경영학 석사를 했습니다. 회계학과 수리공학을 접목하는 논문을 썼습니다.
그 학교 창설된 이래 문과석사 에서 이과박사로 전환한 사례는 제가 처음이었습니다.
수학공식 2개, 수학정리 6개 그리고 미 해군 항공모함 수리부속 최적 적재량을 계산하는 알고리즘을 창조했습니다.
인생 최고의 하이라이트였습니다.
군 연구소에서는 군 창설 이래 처음으로 예산개혁을 5년간 주도했습니다. 무기구매 부정을 연구했다는 이유로 공격을 받아 대령으로 예편하고 미 해군대학원 교수로 갔습니다.
하지만 이 비싼 대학원에까지 보내준 국가에 충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국가혼 이겠지요.
1807년 독일의 피히테가 외쳤습니다.
독일이 망한 것은 국가혼이 없기 때문 이었다고. 국가혼은 무엇이 길러주나요.
역사가 길러줍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알고 계시는 역사는 누가 가르쳐 준 역사인가요?
교과서, 영화, TV 등 문화수단들 아니 었나요?
그 문화권력, 누가 장악해 왔나요?
해방 직후부터 적색(좌파)세력이 장악해왔습니다.
일본에 대해, 어떻게들 알고 계신가요?
수탈하고 조선어, 말살하고 청춘남녀 끌어다 강제노동, 위안부 시켰다 등등 이렇게 입력해준 사람들은 누구일 까요?
저 지만원보다 더 많이 배운 사람들이었을 까요?
이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곳을 탐구할 수 있는 냉철한 머리는 수학 머리입니다.
제가 연구해보니, 사실은 정반대였습니다.
일본병합 연도는 1910년, 단기 4243년 입니다.
그 직전의 5백 18년 동안은 李씨 성을 가진 27명의 왕이 나라를 사유화 했습니다.
4243년 동안의 성과가 무엇이었나요?
중국 사신을 왕이 나가서 영접하는 영은문(迎恩門)이 있었습니다.
전염병과 똥오줌 으로 가득찬 4대문이 있었고 주리 틀기와 초가집들이 있었습니다.
반면 일본이 접수한 36년 동안 어떻게 달라졌나요?
수풍댐, 철도, 학교, 지폐, 은행, 늘어선 빌딩들이었습니다.
그 36년을 조선왕이 더 통치했다면 과연 이렇게 달라졌을까요?
조선어를 말살한 임금은 연산군이었습니다.
조선어를 장려해 수당까지 지급하고 한글날을 제정한 존재는 일본 총독이었습니다.
이사실은 1504년7월 2일자 조선왕조 실록과 1922년 7월 12일자 동아일보에 있습니다.
수탈자는 일본이 아니라 양반과 탐관오리였습니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제했지만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單語)는 일본이 창제했습니다.
36년 후 일본이 남한에 남긴 귀속자산은 23억 달러로 건국 당시 대한민국 정부 재산의 80%였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대기업들은 일본이 놓고 간 자산이었습니다.
이것이 없었으면, 오늘의 번영이있었을까요?
다른 식민지,국가와는 달리 유독 우리는 왜 일본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는 역사로 썼을까요?
역사를 쓴 사람들이 김일성의 항일투쟁 신화를 신봉하는 붉은 종교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독재를 위해 역사를 왜곡한 원조가 김일성이었습니다.
제주 4,3역사의 참상을 가장 진솔하게 알린 사람은 미 군정 당시의 경무국장 조병옥 박사입니다.
제주도 공비가 선량한 주민의 아녀자를 집단 성폭행하고 거기에 창을 찔러 생매장 했다는 문서가 존재 합니다.
이런 만행을 지금 민주화운동이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5,18에 도전했습니다.
20년 동안 팠습니다.
너무나 확실하게도 5,18은 북한이 저지른 전쟁범죄였습니다.
적색세력은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을 격하합니다.
오로지 정의로운 세력은 민주화 세력 뿐이라는 것입니다.
5,18을 대의명분으로 하여 영구집권을 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5,18이 무너지면 저들의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을 가혹하게 탄압합니다.
저는 남쪽 재판부에 2억 4천만원 뜯겼습니다.
2심에서 2년 징역형도 받아놓고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네델란드 소년 한스 브링커 기억하시나요?
국토가 바다보다 낮은 나라, 둑에서 물이 새는 것을 두 주먹으로 막고 있다가 죽었습니다.
지금의 제가 이런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좌측 주먹은 5,18답변서, 우측 주먹은 5,18상고 이유서 입니다.
이 두 주먹마저 쓸려가면 저도 국가도 다 쓸려갑니다.
저들이 적화 통일 세력이라는 사실 아직도 안 보이시나요?
빈 머리는 먼저 점령하는 사람이 임자 입니다.
제발 읽어주세요.
도둑 당한 이 기막힌 역사를 살려주시고 저도 살려 주세요!
그래야
여러분들도 삽니다.
2023년 6월 23일.
지만원 올림.
<많이 퍼날라 주세요>콤파
[출처] "내 인생의 기적"|작성자 유석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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