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탐독한 책 ‘반도체 삼국지’의 저자 권석준 성균관대 교수는 올해 1월 페이스북에 “삼성전자는 불과 6~7년 전만 해도 ‘초격차’라는 수식어의 사용권을 독점해도 된다고 자부할 정도로 기술력에서든 원가 경쟁력에서든 반도체 제조업만큼은 세계적으로 독보적인 회사였다. 하지만 AI 반도체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을(乙)의 위치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썼다. 삼성전자가 AI 반도체의 핵심 부품인 HBM(고대역폭 메모리) 경쟁에서 SK하이닉스는 물론 메모리 업계 만년 3위인 미국 마이크론에조차 밀리는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HBM은 D램 반도체 여러 개를 수직으로 연결해 데이터 처리 속도와 에너지 효율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메모리다. 가격도 기존 D램보다 5배 이상 비싸다. AI 반도체의 황제로 등극한 미국 엔비디아는 하이닉스의 HBM을 공급받아 대만의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기업인 TSMC에 최종 조립(패키징)을 맡긴다. 엔비디아·TSMC·하이닉스로 연결되는 삼각 생산 체제가 구축된 것이다. 삼성이 2019~2020년 HBM 개발에 차질을 빚는 사이, 하이닉스가 빠르게 치고 나가 HBM 시장을 선점했다. 삼성이 수익성 극대화에만 치중해 차세대 제품 개발을 소홀히 한 게 실책이었다.
삼성도 최근 HBM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엔비디아의 제품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해 애를 먹고 있다. 여기엔 기술적인 문제 외에도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정치 역학도 크게 작용한다. 파운드리 분야에서 TSMC와 경쟁하는 삼성이 엔비디아와 TSMC의 혈맹(血盟) 관계를 비집고 들어가기 힘들다는 것이다. 대만계인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TSMC의 모리스 창 창업자를 아버지처럼 존경하며, 지난해 말 대만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도 “모리스 창과 TSMC가 없었다면 지금의 엔비디아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미국 마이크론이 최근 2분기부터 엔비디아에 HBM을 공급한다고 밝히면서, TSMC와의 연대를 유달리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더 뼈아픈 것은 마이크론이 삼성·하이닉스에서 연구원을 100명 넘게 데려가면서 기술 격차를 빠르게 좁혔다는 사실이다.
미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미국 인텔의 파운드리 시장 재진입도 큰 부담이다. 지난달 21일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열린 인텔 파운드리 2024 행사는 미국 정·재계 거물들이 총출동해 ‘팀 USA’의 힘을 과시하는 이벤트였다. 팻 겔싱어 인텔 CEO가 “대만과 한국이 반도체 제조 비율의 80%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제는 미국·유럽 생산 비율이 50%는 되어야 한다. 인텔이 2030년까지 파운드리 세계 2위 기업으로 도약하겠다”고 포부를 밝히자, 마이크로소프트의 사티아 나델라 CEO가 영상으로 깜짝 등장해 “인텔의 기술로 반도체를 만들겠다. 미국 내 강력한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하려는 인텔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화답했다. 현재 파운드리에서 TSMC의 압도적인 점유율(61.2%)을 감안하면 인텔은 현재 2위인 삼성전자를 향해 선전포고를 한 셈이다.
세계 반도체 산업은 대화형 AI 서비스 챗GPT가 등장한 2022년 11월 이후 현기증 나게 변하고 있다. 엔비디아는 주가가 무려 6배 넘게 치솟으면서 시가총액에서 세계 3위에 올랐고, TSMC 시가총액도 삼성전자의 2배로 커졌다. 또 세계 각국이 쏟아붓는 반도체 보조금은 한국이 장악해 온 메모리 시장까지 뒤흔들 태세다. 일본 히로시마에 신공장을 짓고 있는 마이크론은 투자금의 40%를 일본 정부 보조금으로 받는데, 이 덕분에 마이크론 전 세계 공장의 원가 경쟁력이 단숨에 7%나 향상된다고 한다. 반면 삼성·하이닉스는 일본의 구애에도 불구하고 친일 논란을 의식해 일본 공장 건립을 1년 넘게 검토만 하고 있다. 이런데도 한국 기업들은 대기업 특혜 논리와 각종 규제에 밀려 터 파기 공사만 4~5년씩 해야 하고, 정부 지원도 지금처럼 투자금이 마르는 시기에는 별 도움이 안 되는 세제 혜택이 전부다. 우리 기업과 정부가 위기의식을 가지지 않으면 3~4년 뒤 한국의 반도체 경쟁력이 나락으로 떨어져도 이상할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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