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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뭐라고!”“이길여!”…92세 총장, 그날 왜 말춤 췄나 [프롤로그]

鶴山 徐 仁 2024. 1. 17. 14:53

Leader & Reader ‘청춘 이길여’

이름이 뭐라고!”“이길여!”…92세 총장, 그날 왜 말춤 췄나 [프롤로그]

일시2024.01.08

에디터남윤서


"이길여! 이길여! "

지난해 5월 10일, 가천대 축제 무대 앞엔 수많은 학생이 모여 있었다. 초대가수 싸이의 등장에 앞서 92세(올해 기준) 이길여 총장이 무대에 올랐다. 학생들은 그의 이름 석자를 외치며 손을 흔들었다.

“내 이름이 뭐라고!” 마이크를 잡은 이 총장은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이길여를 외치는 학생들의 음성이 한층 커졌다.

그때였다. 이 총장은 “여러분, 오늘은 세계적 스타 싸이가 오는 날이죠?”라고 묻더니 ‘강남스타일’의 ‘말춤’을 추기 시작했다. 예정에 없던 무반주 댄스였다. 이 총장은 “우린 가천 스타일!”이라는 추임새까지 넣으면서 펄쩍펄쩍 뛰었다. 학생들은 환호했고, 총장 뒤에 도열한 부총장과 교직원들의 눈은 동그래졌다.

가천대 이길여 총장. 사진 유튜브 캡처

‘92세 이길여 누님 최신 근황’(당시 실제 나이는 91세)

축제가 끝나고 열흘이 지난 뒤, 온라인 커뮤니티 곳곳에 이런 제목의 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 총장의 말춤 영상이 화제가 돼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날 말춤 사건 이후 가천대 홍보팀은 총장의 말춤 영상을 구해 음악과 자막을 입혔다. 유튜브에 올린 영상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347만 회나 재생됐다. 댓글 창은 감탄으로 가득했다.

‘믿을 수가 없다. 90대 할머니가 저렇게 서 있는 것도 힘들텐데’

‘저 대학생들의 증조할머니뻘 되는 사람이 앞에서 춤추고 있는 거다’

‘6·25 때 대학생이었던 총장과 2002 월드컵도 못 본 대학생들이 같이 어울리는 진풍경’

2023년 5월에 올라온 이길여 총장의 '말춤' 영상은 지금까지 347만 회 재생됐다. 가천대에서 올린 공식 영상 외에도 여러 유튜브 채널이 말춤 영상을 올렸다. 사진 유튜브 캡처

#3.

중장년층뿐 아니라 MZ세대에게도 이길여란 이름은 ‘동안(童顏)’의 대명사로 익숙하다. 지금도 그의 사진이 종종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기 때문이다. ‘가천대는 몰라도 이길여는 안다’거나 ‘대학 총장 이름은 이길여밖에 모른다’는 얘기도 나온다. 사진으로 봐도 믿기 어려운 그의 ‘젊음’ 때문이다.

가장 유명한 사진 중 하나가 이른바 ‘이길여 동창회 사진’이다. 2012년 이 총장의 모교인 대야초등학교에서 동문들과 찍은 사진이다. 비슷한 연배의 동문들 사이에서 이 총장은 딸이라고 해도 될 만큼 독보적으로 젊어 보인다.

이런 사진에는 꼬박꼬박 “가천대 지하실에 대해 알려고 하지 마”라는 댓글이 달린다. 이 총장의 젊음에 대한 밈(meme, 인터넷 유행어) 중의 하나다. 가천대 지하실에는 이 총장의 젊음을 위한 비밀 연구소가 있다는 괴담을 담은 우스갯소리다.

2012년 군산 대야면 대야초등학교에서 열린 이길여 박사 흉상 제막식에서 동문들과 만난 이 총장. 사진 가천대 제공

하물며 사진보다 생생한 말춤 영상이 주는 충격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92세 노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꼿꼿한 자세와 걸음걸이,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또렷한 눈빛이 담긴 말춤 영상은 새삼 이 총장의 젊음을 생생하게 전달했던 것이다.

놀라움 뒤에는 빠르게 궁금함과 부러움이 찾아온다. ‘어떻게 저렇게 젊을 수 있는 거지?’ ‘우리 부모님도,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중앙일보는 이런 궁금증에 답하기 위해 이길여의 청춘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4.

이 총장을 만난 기자는 이번 탐구의 계기가 된 ‘말춤’부터 물어봤다. 왜 총장은 많은 학생 앞에서 말춤을 췄을까, 그날 말춤은 사전에 계획된 것이었을까 궁금했다.

이 총장은 조금은 쑥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이렇게 답했다.

“내가 그렇게 어려운 춤을 어떻게 추겠어요. 그런데 그날 수많은 아이들이 모여서 내 이름을 불러주니까 흥이 났죠. ‘오늘 축제에 싸이가 오는데, 나도 싸이처럼 인기가 있네’란 생각이 들어서 즉흥적으로 한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싸이는 다리를 더 많이 벌리고 더 방방 뛰더라고.”

이길여 가천대학교 총장. 김현동 기자

이름을 연호하자 흥에 겨워 자연스럽게 나온 춤이란 설명이다. 하지만 주변인들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이 총장이 모든 것을 사전에 준비하는 스타일이라는 것이다. 오랜 기간 이 총장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윤원중 가천대 부총장은 그날의 말춤도 ‘은연중에 계획된 것’이라고 말한다.

“총장님은 누구를 만날 때 아무리 바빠도 섬세하게 계획을 하는 편입니다. 손님이 찾아온다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이야기를 해줬을 때 좋아할지 미리 생각해두는 것이죠. 다만 의도적으로 저 사람의 마음을 사야겠다는 목적으로 하는 일은 아닙니다. 오랜 기간 몸에 밴 태도에 가까운 것 같아요. 그날 말춤도 축제에 모인 학생들 앞에 섰는데, 아이들에게 뭘 해줘야 즐거워할까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봅니다. 몸에 밴 배려죠. 우리 사회에서 성공한 1세대 분들 중에 성격이 괴팍한 분이 많잖아요. 그런데 총장님은 참 특이한 경우예요.”

이 총장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는 비서도 그날의 깜짝 말춤이 계획된 것이었다는 설에 힘을 보탠다.

“총장 연설이 길어지면 학생들이 안 좋아하잖아요. 그날 총장님이 ‘(애들 앞에서) 무슨 얘기하지’ 고민하시다가 ‘오늘 싸이 온댔지? 강남스타일이 어떻게 하는거지’ 물으셨어요. 그래서 영상을 찾아 보여드렸는데, 총장실에서 잠깐 따라 해보시더라고요. 박자도 잘 안 맞는 춤이었죠. 근데 그걸 정말로 무대에서 추실 줄은 몰랐어요.”

종합하면 이 총장이 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고민하다 말춤을 생각해냈고, 무대에서 일장 연설을 하는 대신 춤을 추며 흥을 돋웠다는 것이다.

이 총장에게 원래 가무를 잘 하느냐고 물었다.

“호기심이 많아서 뭐든 못하지는 않았어요. 노래도 나름대로 잘했고, 춤도 추고 싶어했고. 뜨개질도 잘하고 철봉도 잘했어요. 달리기를 잘해서 학교 선생님이 육상 선수를 시키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여자가 무슨 다리를 들먹거리며 뜀박질을 하느냐’고 해서 못했죠.”

사실 이 총장의 무대 체질은 과거에도 종종 드러난 바 있다. 63세이던 1995년, MBC 명사 가요초대석에 출연해 ‘봄날은 간다’를 부른 적도 있다. 당시 진행자 이계진 아나운서는 “19세 처녀처럼 아주 간드러지게 부르셨습니다”고 감탄하기도 했다.

MBC 명사 가요초대석에 출연해 '봄날은 간다'를 부르는 이길여 총장. 사진 가천대 제공

#5.

이 총장이 태어난 1932년은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의거한 해다. 그와 같은 해에 태어난 사람으로는 노태우 전 대통령(2021년 작고), 법정 스님(2010년 작고), 이만섭 전 국회의장(2015년 작고) 등이 있다. 요즘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이 고령으로 논란이 되거나 비난을 받기도 하는데, 그의 나이는 이 총장보다 10살이나 어리다.

이 총장의 삶은 살아 있는 현대사 그 자체다. 하지만 우리를 더 놀랍게 하는 것은 그가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90대에도 현역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미래를 이야기한다는 것이며, 때로는 학생들을 웃게 하려 말춤을 추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육체와 정신의 젊음. 90대에도 여전히 푸른 이길여의 청춘이 우리는 궁금하다.

취재진은 지난 석달간 이 총장 본인은 물론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봐온 가족, 대학, 병원 사람들을 만났다. ‘청춘 이길여’는 이길여라는 사람의 개인적 면모를 다각적으로 살펴본 첫 번째 연재물이다. 앞으로 매주 이 총장의 생활 습관과 식습관부터 운동, 소통 방법과 리더십에 이르기까지 청춘의 비결을 전달할 예정이다.

이길여는 누구
일제 강점기인 1932년 전북 옥구군(현 군산시)의 시골에서 태어났다. 그 시절에도 할아버지는 76세, 할머니는 81세까지 살았고, 어머니도 89세까지 살았던 것을 보면 타고난 장수 DNA를 가진 집안일지도 모른다.

태어나고 자란 전북 옥구군 대야면 생가 모형. 이 총장이 기억하는 모습에 따라 약 20분의 1 크기로 제작한 모형이다. 사진 가천대 제공
하지만 아버지 이동숙씨는 35세에 병으로 요절했다. 감기 기운을 얻어 누운 뒤 일어나지 못했다. 당시 열일곱 살이던 이길여 총장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누군가 ‘일본에서 병이 났다면 쉽게 고쳤을 것’이라고 했던 게 의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굳힌 계기가 됐다.
할아버지는 동학 운동을 했지만 집안은 부농이었다. 아버지가 정미소를 운영했다. 군산 대야면 대야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엔 무심결에 친구들과 한국말을 쓰다가 교사에게 뺨을 맞기도 했다. 조선어 교육을 일절 금지하던 시절이었다.

어린시절 이길여 총장과 어머니. 이 총장은 어머니가 ″총명하고 활달한 신여성이었다″고 기억한다. 사진 가천대 제공
졸업 후 중·고교가 합쳐진 6년제 이리여중고에 들어갔다. 온 마을 사람들이 ‘여자가 배워봐야 좋을 일 없다’고 하던 때였지만 월반(越班)을 거쳐 5년 만에 졸업했다. 졸업반인 6학년 때엔 6·25가 발발했다. 집 뒷산에 파놓은 방공호 토굴이 공부방이었다.
‘여자가 무슨 서울대 의대냐’는 얘기를 들었지만 보란 듯이 합격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 터라 학비가 문제였다. 이 총장이 ‘든든한 기둥’이라고 말하는 그의 어머니가 논과 밭을 팔아 학비를 마련했다.
졸업 후 군산도립병원에서 일하며 미국에서 온 의료봉사단의 골든 박사를 만났다. 골든 박사가 죽어가는 폐렴 응급 환자의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내는 모습을 보고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다.
1958년 인천에 산부인과를 열었다. 서울대 출신 여의사가 봐준다는 소문은 금세 퍼졌다. 자궁암 등 부인병 검진을 무료로 받을 수 있는 병원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오랜 꿈이었던 미국 유학을 위해 1964년 병원은 위탁을 맡기고 뉴욕으로 떠난다. 한국서 매일 숫돌에 갈아 다시 쓰던 주삿바늘을 미국에선 한 번 쓰고 버리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깨끗한 기저귀도 한 번 쓰면 버리는 걸 보고 한국에 가져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안정된 미국 생활을 버릴 이유가 없지 않느냐”며 귀국을 말렸다. 마침 교포 사업가에게 청혼을 받기도 했다. 모두 눈물로 거절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귀국해서 환자를 보는 게 우선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4년 만에 인천에 돌아온 뒤 ‘이길여 산부인과’라는 이름을 내걸었다. 미국을 경험하고 온 뒤라 모든 걸 최신식으로 하겠다고 다짐했다. 인천에 단 두 개뿐인 엘리베이터가 그곳에 있었다. 이길여 산부인과는 ‘보증금 없는 병원’으로 유명했다. 환자가 보증금을 내야만 치료가 시작되던 관행을 깨고 돈이 없어도 일단 치료를 해주겠다는 것이다. 병원은 늘 문전성시였다.
1975년 일본을 방문해 선진 의료 시설에 놀란 그는 종합병원을 꿈꾸기 시작했다. 1978년 인천길병원 의료법인 설립 인가가 났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의료 경영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후 양평길병원(82년)에 이어 인천 중앙길병원(87년)이 개원한다.

무료 자궁암 검진을 받기 위해 길병원에 줄을 선 여성들. 사진 가천대 제공
목표는 의료 인재 양성이었다. 경기전문대를 인수한 데 이어 1998년 가천의대가 문을 연다. 이후 경기전문대는 가천길대학으로 이름을 바꾼다. 가천의대가 문을 연 해에 경기도 성남의 경원대학교도 인수했다. 이후 2000년 직접 총장에 취임한 그는 ‘가천의대-가천길대학-경원대-경원전문대’ 4개 대학을 하나로 통합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갈등 끝에 2012년 통합 가천대가 문을 열게 됐다. 이미 그의 나이 80세였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를 물으면 “할 일이 너무 많았다”고 답한다. 젊은 시절엔 공부와 일에 바빴고, 이후엔 환자를 돌보고 대학을 운영하느라 바빴다는 것이다.
바쁘게 살아온 만큼 다양한 직함을 거쳤거나 갖고 있다. 가천길재단 회장, 가천문화재단 명예이사장, 길병원 명예이사장이고, 전 경인일보 회장, 전 한국여자의사회장, 전 서울대 의대 동창회장, 전 서울대 이사 등을 지냈다. 국민훈장 목련장·무궁화장 수훈자이며 과학기술훈장 창조장, 서재필 의학상 등도 받았다. 2012년 뉴스위크가 선정한 세계를 움직이는 여성 15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많은 호칭 중에서 가장 자주 쓰는 건 ‘이길여 총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