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K정치어록
중앙일보 입력 2023.06.23 00:42
3김 시대 주역들은 오래 기억에 남는 어록을 남겼다. 목포상고 졸업 후 23세에 배 한 척만으로 사업에 뛰어든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지도자의 덕목으로 ‘서생적(書生的) 문제인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꼽았다. DJ가 1963년 6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부터 자주 했던 말이다. 현실에 맞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취지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1974년 10월 유신정권 직후 의원직을 박탈당하면서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는 말을 남겼다. 정치 탄압에도 반독재 투쟁 의지를 굽히지 않은 승부사적 기질이다. 헌정사상 26세 최연소 나이로 국회에 입성한 YS는 현역 의원으로선 유일하게 제명당한 기록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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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2인자’로 불렸던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는 사자성어를 즐겨 썼는데, 대선이 치러진 1997년엔 신년 휘호로 ‘줄탁동기(啐啄同機)’를 내걸었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선 새끼와 어미 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해 대선에서 정권교체의 밑거름이 된 DJP연합(야권단일화)을 암시하는 복선이었다.
바둑용어를 끌어들여 YS·DJ·JP를 ‘정치 9단’ 경지로 올려놓은 건 명대변인으로 이름난 박희태 전 국회의장이다. 1988년 13대 국회부터 내리 6선을 하면서 자신 또한 정치 9단으로 불렸던 그는 4년 3개월간 집권당 대변인을 지내면서 숱한 조어를 만들어냈다. 요즘도 회자하는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총체적 난국’도 그가 만든 말이다. 남다른 정치적 감각과 순발력을 갖춘 명대변인 덕분에 정치판을 관전하는 재미 또한 있었다.
하지만 선 굵은 정치인이 사라지고 대변인도 남발되면서 오늘날의 정치는 여야 당대표의 입만 바라보는 형국으로 돌아가고 있다. 최근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윤석열 정부를 가리켜 ‘압구정(압수수색·구속기소·정쟁) 정권’이라고 하자,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사돈 남 말(사법 리스크·돈 봉투 비리·남 탓 전문·말로만 특권 포기) 정당대표’라고 받아쳤다. 상대의 정곡을 찌르기보다 비난하는 데 남다른 ‘말장난’ 실력을 과시했다. 눈앞의 위기를 모면하려 ‘공격 앞으로’만 질러대는 2023년 6월의 여의도다.
위문희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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