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장덕진의 퍼스펙티브
정치생명 건 마크롱의 결단…윤 대통령에도 큰 시사
중앙일보 입력 2023.04.06 00:54
프랑스 연금개혁 진통이 말하는 것
프랑스의 재정은 1970년대 초반 적자로 돌아선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흑자를 기록하지 못했다. 해마다 재정적자를 본 지 50년이 되었다는 말이다. 정부부채는 GDP 대비 113%. 한국의 2.5배이다. 프랑스의 재정적자는 추세로만 보면 일본과 닮았는데. 내용상으로는 더 안 좋다. 일본도 거의 비슷한 시기인 1970년대 초반 적자로 돌아선 이후 80년대 후반 5년간 반짝 흑자를 기록한 것을 빼고는 50년째 적자가 누적 중이다.
프랑스와 일본, 같은 점과 다른 점
추세는 닮았지만 원인은 다르다. 프랑스의 GDP 대비 복지지출은 32%로 세계 1위이다. 반면 일본은 22%로 OECD 평균에 머문다. 내용으로 더 안 좋다는 것은 고령화 요인이 아직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령화 수준으로 세계 1위인 일본은 65세 이상 노인이 전체 인구의 28%를 차지하기에 일정 부분 재정적자를 피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지만, 프랑스는 20%에 불과해서 일본보다 인구구조의 압력이 훨씬 적은데도 순전히 세출 요인만으로 장기간 재정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반면 흑자와 적자를 왕복하다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15년째 적자를 기록하고 있는 한국은 그리스를 닮아가고 있다. 유로존 위기 이전까지 그리스의 전통적인 보수와 진보 정당은 신민당과 사회당이다. 처음에는 보수 신민당 집권 시기에는 적자를 줄이고 진보 사회당 집권 시기에는 적자를 늘렸지만, 정부가 재정을 퍼주는 것에 국민이 익숙해지자 양당은 집권을 위해 서로 경쟁적으로 재정적자를 늘려나가기 시작했다. 추세상으로는 지금 한국의 패턴과 비슷하다. 결국 그리스는 경제위기를 맞아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고 한국은 아직 경제위기가 아니라는 차이가 있다.
미래 세대를 위한 국가적 현안 지지율, 파벌 이익서 벗어나야 정치적 아웃사이더 출신 닮아 연금개혁 성공, 역사에 남을 것 한국과 달리 프랑스 야당 협조 사회적 대화로 난국 넘어서야 |
의회 의결 과정 건너뛴 마크롱
마크롱 대통령의 연금개혁 강행을 놓고 프랑스가 몸살을 앓고 있다. 지난달 23일 프랑스 서부 낭트에서 반대파들이 결렬한 시위를 벌이고 있다. [AFP=연합뉴스]
마크롱 대통령의 연금개혁안에 대한 반대 시위로 프랑스는 지금 혼돈의 도가니다. 현행 제도하에서 프랑스인은 62세부터 연금을 받을 수 있는데, 마크롱의 개혁안은 간단히 말해 이 연령을 1년에 석 달씩 늘려나가서 2030년에는 64세로 올리자는 것이다. 재정을 잡아먹는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가 연금이다. 프랑스는 선진국 중에서 연금 개시 연령이 가장 낮은 축에 속하고, 연금의 소득대체율도 75%나 돼서 EU 평균보다 높다. 연금제도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관대하게 설계되어 있고, 그걸 메꾸느라 재정적자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장기간 누적되고 있으니 연금개혁의 필요성이 대두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도 프랑스 국민은 분노했다. 주요 노총들은 일제히 파업에 들어가고 파리 시민들은 곧바로 콩코르드 광장으로 집결했다. 보통은 공화국 광장(레퓌블리크 광장)에서 시위가 많이 열리지만, 콩코르드 광장으로 집결했다는 것은 중요한 정치적 의미가 있다. 그곳은 1793년 프랑스 대혁명 때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를 단두대에 올려 처형한 곳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쓰레기를 모아 불을 피우고 마크롱의 인형을 화형에 처하며 환호했다. 일부는 보도블록을 깨서 경찰에게 던지고, 상점을 약탈하고, 경찰은 시위대에 최루가스와 물대포를 쏘며 강경 진압에 나섰다. 1월에 시작된 시위는 석 달째 접어들었지만 아직도 진행형이다. 시위참여자들은 연금개혁안 철회 없이는 시위 중단도 없다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이렇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마크롱이 연금개혁안 입법을 위해 헌법 49조 3항을 발동했다는 점이다. 이 조항은 총리가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재정법안이나 사회보장재정법안에 대해 의회의 의결 없이 통과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의회는 이렇게 통과된 입법을 막으려면 24시간 이내에 정부 불신임안을 통과시켜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입법된 것으로 본다.
형식상으로는 엘리자베트 보른 총리가 발동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마크롱 대통령의 의지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여당인 르네상스당의 의석이 과반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원래는 보수 야당인 공화당의 협조를 얻어 하원 표결을 할 계획이었으나, 사전 조사 결과 공화당 이탈표가 많을 것으로 점쳐지자 표결을 불과 몇 시간 앞두고 49조 3항을 발동한 것이다.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한 개혁”
좌파연합 뉘프(NUPES)와 중도성향 LIOT이 연합해 불신임안을 제출했고, 극우성향 마리 르펜의 국민전선이 별도의 불신임안을 제출했으나 둘 다 부결됐다. 헌법재판소의 최종 해석을 기다리고 있기는 하지만 연금개혁안은 합법적으로 입법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것이 명백한 민주주의 파괴라고 분노하고 있다. 의회의 동의를 얻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크롱은 이렇게 답했다. “내가 연금개혁을 즐기고 있는 걸로 보이나.” 맞는 말이다. 그는 자칫 정권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알면서도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하다고 본 개혁안을 밀어붙였고, 불신임안은 부결됐지만 커다란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둘째는 노총의 의견을 충분히 청취하지 않는 등 사회적 대화가 부족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주요 노총들은 연금개혁안에 대해 성의 있는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고, 원래 프랑스는 북유럽이나 혹은 독일에 비해서도 사회적 대화의 역할이 적은 편이어서 이 분석에 그다지 힘을 실어주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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