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ree Opinion

창조적 소수 vs 지배적 소수

鶴山 徐 仁 2023. 1. 22. 08:59

중앙SUNDAY 오피니언[선데이 칼럼]

 

창조적 소수 vs 지배적 소수

 

중앙선데이 입력 2023.01.21 00:28


이정민 기자 구독

 

 

불현듯 십 수년 전 기억이 떠오른 건 아마도 집권여당에서 빚어진 대표 경선 촌극 때문이겠다. 오래전 취재 과정에서 만났던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 전신) 출신 간부가 털어놓은 무용담 한 토막이 돌연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군사독재 정권 시절의 일이니 아주 오랜 과거다. 당시 국회의원 총선을 앞두고 정권이 미는 인사가 있었는데 당선이 불투명했다. 위협적인 야당 후보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여당 후보를 당선시키라는 오더를 받은 안기부 입장에선 피가 마를 일이었다. 미행과 뒷조사로 약점을 캐내 불출마 협박도 해봤지만 허사였다. 그러다 후보 등록일을 맞았다. 속이 타들어간 요원들, 결국 ‘일’을 내고야 만다. 입후보 등록을 하러 가는 후보의 차량을 들이받아 교통사고를 낸 것이다. 경미한 사고여서 커다란 인명 피해는 없었다지만 어쨌든 별안간 병원 신세를 지게 된 야당 후보는 입후보 등록 마감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친윤계 배타적 지배욕이 빚은 내홍

지난 정권 실패 보고 교훈 못 얻어


창조적 소수’가 오만, 폭압 빠지면


국가는 응전능력 잃고 쇠락의 길로

선데이 칼럼

 

지나친 감상일 수도 있겠으나, 국민의힘 전당대회를 둘러싼 내홍을 보며 암울했던 시기의 흑역사를 떠올리게 되는 건 슬픈 일이다. 물론 수십년 전 사건과 국민의힘 사태는 결이 다르다. 우선, 사태를 촉발한 나경원 전 의원의 처신이 논란을 불렀다. 불과 3개월 전, 그것도 간청하다시피해 감투를 2개(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 기후환경 대사)나 꿰차더니 ‘여론조사 1위’가 나오자 “장관급 자리와 장관은 다르다”며 갑자기 부위원장직을 내놓겠다는 건 양손에 떡 들고 어쩔 줄 몰라하는 철부지 어린애를 연상시킨다. 저출산고령위는 위원회 구성조차 온전히 마치지 못한 상태다. 또 당연직 위원장인 대통령에겐 일언반구 없이 저출산 해법을 설명하는 언론 플레이를 한 것도 엉뚱하고 경솔했다. 그러나 출마를 막는 건 다른 문제다. 친윤계가 똘똘 뭉쳐 융단폭격을 하며, 공개적으로 출마를 저지하는 모양은 ‘완장’ 두른 점령군의 폭력성을 빼닮았다. 위장 교통사고를 내는 것과 뭐가 다른가. 야당의 비난이 아니더라도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풍경들이다.

얼마 전까지 친문(친문재인) 패권을 그토록 비난했던 이들 아닌가. 그런데 집권하자 철옹성을 쌓아올리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과 가깝다는 친윤계, 그중 핵심들이 벌이는 배제와 뺄셈의 정치는 진절머리 나는 지난 정권 패권정치의 복사판이다. 이준석 전 대표는 쫓 아내다시피하며 사퇴시켰다. 전당대회 게임의 룰도 바꿔버렸다. 2004년 이후 계속돼온 7대 3 룰(당원 투표 70%+국민 여론조사 30%)을 깨고 별안간 ‘100% 당원 투표’로 바꿨다. 나경원 사태가 촉발된 것도 따지고보면, 갑작스런 룰 개정이 빚은 나비효과다. 룰 변경으로 국민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려온 유승민 전 의원이 자연스레 당선권에서 배제되자 ‘당심’의 지지를 받던 나 전 의원이 선두로 올라서며 사단이 났다. 룰 개정 반대 목소리엔 눈깜짝 않더니 이젠 급조해 넣은 결선투표제 때문에 되레 한숨이다. 의외의 후보가 당선되는 어부지리를 얻을까 전전긍긍한다. 친윤계의 배타적 지배욕이 빚어낸 혼탁한 파열음이다. 친노무현, 친이명박, 친박근혜, 친문재인… 패권정치의 추락과 실패를 목격하고도 똑같은 전철을 밟으려 한다. 어리석은 일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엘리아스 카네티는 『군중과 권력』에서 ‘권력의 속성은 지배감이고 기본 성향은 파괴적’이라고 갈파했다. 권력의 위험성을 경고한 이 경구를 무겁게 새겼으면 한다.

분란의 중심에 윤 대통령이 있다. 아니 국민들은 그렇게 의심한다. “내부 총질이나 하던 당 대표가 바뀌니 달라졌습니다.” 윤 대통령의 문자 메시지는 또렷하게 국민들 뇌리에 남아 있다. 대통령의 신뢰를 흔들고 말의 권위를 추락시켰다. 그러니 “대통령으로서 당무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해명이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당 대표를 정하는 일에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되지 않을 순 없을 것이다. 그래서도 안 된다. 대통령이 총재를 겸하던 과거엔 직접 대표를 지명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당내 기류를 파악하고 주류,비주류 할 것 없이 계파 중진들과의 물밑 대화로 잡음 없이 처리할 수 있었다. 대화가 최고의 정치술이다.

사회도,기업도,나라도 앞길을 열어가는 건 소수 엘리트다. 엘리트의 함량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도전 과제에 얼마나 잘 응전하느냐에 따라 문명의 흥망성쇠가 결정되는데, 그 열쇠가 ‘창조적 소수’의 엘리트에 달렸다고 설파했다. 그러나 창조적 소수의 엘리트 리더들이 자기 과시나 오만에 빠질 때, 대중의 자발적 지지와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대중을 폭압으로 억누르는 ‘지배적 소수’로 타락하게 된다. 지배적 소수가 되면 도전에 제대로 응전할 능력을 상실해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미노스 문명 등 한때 엄청난 수준의 문명을 꽃피웠다가 사라진 지구상의 14개 문명의 소멸 원인을 연구해 이런 결론을 증명했다. 문명이든, 국가든 마찬가지다. ‘지배적 소수’ 가 파멸을 부른다는 토인비의 통찰은 집권여당에 던지는 함의가 적잖다. 대중의 지지를 끌어내는 창조적 소수가 될 것인가, 대중을 강압적으로 누르는 지배적 소수가 될 것인가. 여당이 그 기로에 서 있다.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