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넉넉히 꾸어주라 신 15:7-11

鶴山 徐 仁 2022. 8. 4. 06:46

 

넉넉히 꾸어주라 신 15:7-11

 
 
08월 04일 (목)
   
넉넉히 꾸어주라 신 15:7-11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8.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9.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10.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7-8절).
<움켜쥐지 말라>는 것은 자기의 소유에 대한 강박관념을 뜻합니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가난한 사람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주변에도, 이웃 중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들에 대해 <네 손을 움켜쥐지 말라, 넉넉히 꾸어주라>고 한 것은 가난한 자에 대해 언제나 관대하고 또 구체적으로 돕고 이웃 사랑을 실천할 각오와 태세를 갖추며 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광야에서 굶주린 무리들에게 베푸신 오병이어의 기적에 앞서 자신의 도시락을 아낌없이 내어놓았던 어느 한 소년의 결단을 생각해 보십시오. 반드시 많이 가지거나 잔뜩 쌓아둔 사람만이 남을 돕고 또 남에게 꾸어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당장 일용할 양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신앙의 자유는 있다는 말로 그냥 가볍게 넘어가거나 <내 손을 움켜쥔다>면 그게 과연 온당한 처사겠습니까? 배고픔에 붙잡힌 사람이 신앙의 자유를 체험하게 되는 그 첫 걸음은 바로 가진 자들이 베푸는 사랑의 빵을 맛보는 데서부터입니다. 다시 말해 신앙공동체가 서로 나누는 빵이나 가진 자가 넉넉히 그리고 구체적으로 베푸는 사랑의 실천에서 비로소 신앙의 자유가 가져다주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만의 것에 집착하지 않는 믿음의 정신이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게 바로 사랑과 관대함이 한 사회의 불균형한 질서나 물질적 궁핍의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구할 수 있는 위대한 믿음의 저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그들을 실천적으로 사랑하는 힘이 어느 시대나 그 사회, 그 공동체의 현실을 바꾸어 나가는 진정한 힘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그런 사람들, 그런 공동체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십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영토가 점점 더 확장되어 가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나 자선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현재 당신이 참여하고 있는 정기적인 기부 행위가 있다면?
-본문 10절 말씀을 글로 옮겨 보십시오.
 
주님, 언제나 저희 주변에는 저희들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이 있습니다.
점점 기온이 떨어지고 더욱 가을이 깊어가는 이 때 저희들 그런 이웃들을 생각하며 진심으로 주님의 사랑과 온정을 베풀 수 있도록 관대한 마음, 따뜻한 마음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손을 움켜쥐는 인색함이나 소유에 대한 맹목적인 이기심이 아니라 보다 너그러운 마음, 여유로운 마음으로 늘 주위를 둘러보며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저희들 되도록 성령으로 격려해 주시옵소서. 
 
   
정신질환자 상담용 인공지능 로봇 ‘일라이자’
 
“일라이자 효과란, 정신 질환 환자 상담용 인공지능 챗봇 ‘일라이자’
를 이용해 환자들로부터 이끌어낸 긍정적인 치료 효과를 말한다.
일라이자는 1966년 미국 MIT 소속 컴퓨터공학자 요제프 바이첸 바움
(Joseph Weizenbaum)이 개발한 인공지능 챗봇이다.”


김명주 저(著) 《AI는 양심이 없다》 (헤이북스, 238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인공지능이 갈수록 사람을 닮아감에 따라 긍정적으로는 ‘일라이자
효과(ELIZA Effect)’와 같은 심리적 치료 효과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일라이자는 상담을 받고자 하는 환자의 질문을 그대로 인용한 후, 역
질문 형태로 바꿔 대답함으로써 대화를 유도합니다. 환자는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해 스스로 답을 만들어가는 사고 과정에 참여합니다.
일라이자의 치료 효과는 훌륭했습니다.
“환자는 인공지능 일라이자를 자신에게 공감해주는 정신과 의사나 상
담자인 것처럼 의인화해 생각하고 대화를 진행했다. 임상심리학자
칼 로저스(Carl Ransom Rogers)가 1940년대에 제시한 ‘인간 중심
치료(PCT)Person-Centered Therapy’ 중 ‘내담자 중심 이론’을 성공
적으로 구현해낸 사례가 바로 인공지능 일라이자이다.”(238쪽)
이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일라이자를 개발한 요제프 바이 첸바움은
인공지능이 인간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중요한 결정을 인공지능
이나 컴퓨터에게 위탁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인공지능은 인간과 경쟁의 관계가 아니라, 협업의 관계입니다.
인공지능과 협업을 하기 위해 제일 중요한 것은 강력한 능력이 있는 인
공지능을 개발하기에 앞서, 인공지능 개발자와 이용자의 건전한 철학이
필요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인물 중 가장 많은 힘을 받고 태어난 존재가 삼손
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그 힘의 방향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지
못한 체, 주체 못하는 힘 때문에 타락합니다. 주님 안에 있지 않는 힘은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게 만듭니다. 힘을 휘두르고 싶고, 누가 유혹하지
않아도 스스로 유혹의 자리로 들어갑니다. 예리한 칼은 더욱 든든한 칼
집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힘과 능력을 달라는 기도와 더불어, 이
힘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잘 쓸 수 있기를 동시에 기도해야 합니다.
인공지능도 마찬가지입니다. 능력 있는 인공 지능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을 받는 인공지능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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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6장 13절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가 너를 보게 하라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에서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Come back, come back, O Shulammite; come back, come back, that we may gaze on you! Why would you gaze on the Shulammite as on the dance of Mahanaim?
Song of Solomons 6:13 [NIV]

   
성경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서로의 독특함에 눈뜬다. 공동체는 재능을 찾고 열매 맺는 곳이다. 여기 동질성과 독특성의 위대한 역설이 있다. 기본적으로 동일한 인간임을 인식하는 가운데 기꺼이 각자의 출중한 차이점을 버리고 서로 연약한 모습을 내보일 대, 비로소 개인의 재능이 드러날 수 있는 장이 열린다. 이때의 재능은 분열 대신 연합을 낳는 은사다.
-헨리 나우웬의 [공동체] 중에서-


공동체는 무조건 하나됨이 아닙니다. 하나됨 이전에 서로의 은사와 독특성을 인정해 줍니다. 서로의 단점이 아닌 장점을 바라봅니다. 결국 공동체는 사람을 대하는 자세입니다. 서로의 은사를 인정할 때 더 많은 사역의 연합함이 있습니다. 이것이 결국 지역, 나라, 열방까지 확장됩니다. 성령 안에서 공동체는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이루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