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십일조를 드리라 신 14:22-29

鶴山 徐 仁 2022. 8. 2. 12:21

십일조를 드리라 신 14:22-29

 
 
08월 02일 (화)
   
십일조를 드리라 신 14:22-29



22.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23.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24.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25.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가서
26.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소나 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등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27. 네 성읍에 거주하는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이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
28.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29.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22, 28-29절).


율법 시대가 아닌 이 복음시대에도 십일조는 여전히 유효한가 하는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첨예한 토론의 주제가 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고 하셨는데 우리는 이 말씀을 십일조에 대한 이해와 원칙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비록 율법적인 구속력은 갖지 않을 지라도 십일조의 원리와 그 정신 만큼은 더 철저하고 더 완전해졌다는 것입니다. 


원래 은혜는 율법보다 더 강력하고 사랑은 강제보다 더 무서우며 성령은 육신보다 더 신령한 법입니다. 구약시대 때는 십일조가 율법이었으나 신약시대, 복음시대의 십일조는 자발적인 감사며 사랑이며 신앙고백입니다. 구약시대의 율법적 기준에서는 수입의 십분의 일, 토지 소산에 십분의 일이 십일조, 즉 하나님의 것이었으나 복음시대의 십일조는 더 이상 십분의 일이 아니라 십분의 십입니다. 왜냐하면 내 소득과 내 소유의 십분의 십이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음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십분의 일이 아니라 십분의 십을 바쳐야 그게 진정한 감사요 내 가진 것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인 만큼 실제 현장에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며 십분의 십이 다 하나님 소유요 나는 다만 하나님의 부와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임을 실천적으로 고백하는 결단이 바로 <십일조 내기>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분명한 것은 십분의 일은 율법이고, 십분의 십은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십분의 일을 바치지만 그것은 곧 십분의 십이 다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실천적 결단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당신은 현재 십일조를 하십니까?
-당신이 이해하는 복음적인 십일조 정신은 어떤 것입니까?
-십일조는 율법시대의 산물이므로 폐기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당신은 어떤 입장이십니까?
 
주님, 십일조에 대한 이해와 해석들이 분분합니다. 부디 저희로 하여금 하나님 뜻에 합당하게 가장 복음적으로 재해석하고 또 실천할 수 있도록 성령으로 역사해 주시옵소서. 맞습니다. 구약시대 때는 그게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인 감사요 또 부와 소유에 대한 신앙고백이요 이웃사랑에 대한 실천적 결단임을 깨닫게 하사 더 이상 누구도 십일조 때문에 시험에 들거나 실족하는 일이 없게 해주시옵소서. 십분의 일만이 아니라 십분의 십이 다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며 신실한 청지기로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 해주시옵소서.
 
   
자기 이름 부르기
 
“조용한 방 한가운데 땅바닥에 앉아라. 가급적 가구가 거의 없는 방
이면 더 좋다(중략). 이제, 큰 소리로 당신 이름을 외쳐보라.”


로제 폴 드르와 저(著)  이기언 역(譯) 《101가지 철학 체험》
(샘터, 15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프랑스 ‘르몽드’의 고정 칼럼니스트인 로제 폴 드르와는 《101가지
철학 체험》이라는 흥미로운 저술을 합니다. 이 책에서 철학적 개념들을
일상 속에서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흥미로운 방법들을 소개하고 있습니
다. 그 첫 번째가 ‘자기 이름 부르기’입니다.
이름은 남이 부르라고 만든 것이기에 자신이 자기 이름을 부를 때 참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제 이름을 부르며 우는 게 새들만의 특권
만은 아닙니다. 내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며,
자신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행위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내 이름을 불러주실 때, 우리는 한없는 용기를
얻게 됩니다. 이사야 41장을 보면 하나님이 너무나 가깝고 친근하게 우
리의 이름을 불러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
함의 자손아!” (사40:8)


간단하게 이름을 부르면 될 터인데 하나님은 왜 이리도 친근하고 사랑
스럽게 불러주십니다. 두려워 말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니
염려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이 지켜보시고 보호하고 인도하고 계
시다는 의미입니다.
   
아가 6장 11절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내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
I went down to the grove of nut trees to look at the new growth in the valley,
to see if the vines had budded or the pomegranates were in bloom.
Song of Solomons 6:11 [NIV]
   
성경
지금 이 시대는 개인주의, 나 중심의 시대입니다. 위로와 돌봄, 섬김과 사랑보다는 경쟁과 공격, 비난과 비판이 난무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그 상처로 인해 냉정한 사회가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건강하고 행복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더 사랑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가정에 아픔이 있다면, 그리고 가족들에게 서로 상처가 있다면 먼저 사랑할 것을 결단하십시오.
-김동수의 [힐링, 마음 백신] 중에서-


우리 시대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사랑을 확인하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누구나 위로받고 싶어 합니다. 누군가의 인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시시비비를 따지지 말고 사랑해주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위로를 하고, 위로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은 반드시 위로자, 치유자로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