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이적과 기사 신 6:20-25

鶴山 徐 仁 2022. 6. 9. 16:57

이적과 기사 신 6:20-25

 
 
 
06월 09일 (목)
   
이적과 기사 신 6:20-25



20.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증거와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냐 하거든
21. 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니
22. 곧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전에서 크고 두려운 이적과 기사를 애굽과 바로와 그의 온 집에 베푸시고
23.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을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우리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시고
24.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려 하심이라
25.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전에서 크고 두려운 이적과 기사를 애굽과 바로와 그의 온 집에 베푸시고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을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우리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시고>(22-23).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크고 두려운 이적과 기사>로 바로를 제압하사 이스라엘로 하여금 출애굽하게 하셨고 또 40년간의 광야생활을 가능케 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2백만에 가까웠을 남녀노소가 황량한 광야를 40년간 유랑했음에도 굶어 죽거나 목말라 죽은 사람, 헐벗어 죽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열사병으로,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발이 부르트거나 옷이 해어지는 일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루하루의 삶이 그야말로 기적이고 기사였습니다. 만나도 메추라기도, 반석에서 터져 나온 생수도 다 하나님의 이적이었습니다. 홍해를 건너고 요단을 도강한 일도 다 하나님의 기사였습니다. 원주민들을 진멸하고 가나안을 정복한 일도 다 크고 두려운 하나님의 이적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하루하루가 주님의 이적과 기사의 연속입니다. 더구나 요즘같은 위험천만한 세상에서,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의 안전이 담보되고 가족들이 건강하고 굶지 않고 헐벗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주님이 베푸시는 기적 같은 은혜 덕분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 옳습니다. 


옛날 모세 시대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아름다운 땅을 차지하기 위해>(18절) 그렇게 했다면, 오늘 우리는 주님의 구원에 감사하며, 하나님이 허락하신 천국 시민권에 감격하며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그렇게 쉐마를 실천하며 사는 것입니다. 율법은 강제지만 복음은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의 주체적인 결단입니다. 올해도 주님 베푸신 축복을 한 번 헤아려 보십시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적과 기사들을 계수해 보십시오. 그리고 감사와 영광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하십시오. 
오늘 본문은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라>(25절)고 했습니다. 
 
-올해도 이 8월까지 생활하며 당신이 체험한 하나님의 이적과 기사들을 간증해 보십시오. 
-과거 이스라엘이 출애굽과 광야생활을 통해 누렸던 하나님의 이적과 기사들을 아는 대로 적어 보십시오. 
-<이적과 기사>가 우리의 신앙생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간략히 적어 보십시오.
 
주님,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이적과 기사의 역사였습니다. 출애굽 사건이 그렇고 광야 40년이 그렇고 또 가나안 정복이 그렇습니다. 시대와 공간이 다를 뿐 저희의 존재와 삶도 마찬가집니다. 
올해만 해도 순전히 주님의 기적 같은 은혜로 여기까지 왔음을 고백하오니 저희로 하여금 끝까지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갈 수 있도록 성령으로 역사해 주시옵소서.
 
   
해석의 중요성
 
“실증주의자들은 ‘오직 사실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니체
는 ‘단지 해석만’ 존재한다고 말한다(중략). 각자가 자신의 보존의
유용성을 위해서 일정한 관점을 가지고 세계를 해석하기 때문에 그 결과
현실 자체와는 전혀 다른 개념들이 형성된다는 것을 뜻한다.”


강영계 저(著) 《니체와 문명 비판》 (철학과 현실사, 340쪽) 중에 나
오는 구절입니다.
세상은 사실과 해석 사이에 있습니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사실’은 없습니다.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의 기억이나 사실에 대한
역사의 기록은 완벽하지 않고 불완전합니다. 또한 하나의 사실에 대한
해석은 한 가지가 아니고, 두 가지, 열 가지 아니 백 가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사실에 대한 해석의 중요성이 등장합니다.
‘인문학’은 한마디로 땅의 이야기, 인간이 그려 놓은 인간의 무늬,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있고,
하나님을 찾기 위한 몸부림도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인문학을 전문
인문학자들에게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문 인문학자들의 해석에는 성
경적인 면도 있지만, 대부분 비성경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분별
력이 필요합니다.
모든 ‘사실’ 또한 ‘텍스트’에 대한 성경적인 해석이 너무나 중요
합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골3:10)
   
호세아 4장 18절
 
그들이 마시기를 다 하고는 이어서 음행하였으며 그들은 부끄러운 일을 좋아하느니라
Even when their drinks are gone, they continue their prostitution; their rulers dearly love shameful ways.
Hosea 4:18 [NIV]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배우려는 태도
아버지는 책으로만 가르치지 않습니다.
삶으로 가르칩니다.
자녀는 아버지로부터 듣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보고 배웁니다.
오늘날의 교회 교육은 가르치고 배우니까 
학교가 맞지만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은 
 아버지로서 가르칩니다.
그런데 아버지 바울이 디모데에게 
 “은혜 안에서 강하라”.
아버지가 아들에게 바라는 것은 늘 그것입니다.
 “강하라. 강해져라. 두려워 하지 말라.
겁내지 말라. 담대하라”.
여러분도 여러분의 자녀에게 그렇게 가르칩니까?
문제는 어떻게 해야 강해지고 담대해지느냐입니다.
 알아야 하고.배워야 합니다. 아는 것이 힘입니다.
 그래서 쉬지 말고 배워야 합니다.
- 이윤재 목사의 ‘넘어져도 배우면서 자란다’에서-


배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
바울은 반드시 배워야 성공하는
 세 종류의 사람들을 통해서 
디모데에게 끊임없이 배우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군인은 전쟁을 위해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선수는 시합을 위해 부지런히 배워야 합니다
농부는 풍요로운 수확을 위해 쉬지 않고 배워야 합니다.
능력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태도입니다
여러분은 늘 배우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