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안식일 신 5:12-15

鶴山 徐 仁 2022. 5. 20. 11:33

안식일 신 5:12-15

 
 
05월 20일 (금)
   
안식일 신 5:12-15



12.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13.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4.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십계명의 제4계명입니다.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12절). 
그런데 이게 출 20:8-11의 내용과는 조금 다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방법(14절)은 동일하지만 안식일에 부여한 신학적 의미(15절)는 분명 달라졌습니다. 즉 출애굽기에서는 안식일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관련시키지만 여기서는 애굽으로부터의 구속사역과 관련시키고 있습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당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15절). 
이것은 안식일에 대한 신학적 의미가 구속사의 흐름과 과정에 따라 재해석되고 새롭게 적용되며 발전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실제 구약시대의 성일인 <안식일>이 지금은 <주일>로 이행되어 그 의미도 하나님의 창조사역보다는 주님의 구원사역의 성일로 기념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에게는 안식일이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출애굽을 통한 구원사역을 기리는 날이었다면 복음시대의 <주일>이야말로 십자가를 통한 주님의 구속사역을 기리고 감사하는 성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이든 주일이든 그 성수하는 방식은 동일하다는 게 중요합니다. 일체의 노동에서 손을 떼고,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14절) 하라는 겁니다. 
왜요?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완전함을 온 몸으로, 삶으로 고백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더 이상의 노동이나 수고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완벽하다는 뜻입니다. 
 
-출애굽기 20:11과 본문 15절 말씀을 비교해 보십시오.
-<안식일>과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안식일>과 <주일>에는 왜 모두가 쉬어야 할까요?
 
주님, 태초에 하나님은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레째는 쉬셨습니다. 창조사역이 힘들어 쉬신 게 아니고 엿새간의 사역으로 이 세상을 완전하고도 완벽하게 다 창조하셨기에 더는 하실 일이 없어서 쉬신 것이옵니다. 
구약의 안식일은 바로 그런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기리는 성일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이 시대의 주일도 그렇습니다. 주님이 이룩하신 완전한 구속사역을 기리기 위해 모든 노동에서 손을 떼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날입니다. 저희로 하여금 이 안식일과 주일의 참된 의미를 잘 새기며 고백하며 또 바르게 성수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무엇을 듣느냐가 인생을 좌우한다.
 
“미국에서 큰 한인교회를 이끌고 있는 목회자 이야기.
이분은 ‘보청기 목회’ 로 잘 알려져 있다.  귀가 잘 안 들려 보청기를
끼고 있는 이분은 다른 사람이 부정적인 말을 할 때나 이웃에 대해 매
도할 때 혹은 극한 감정을 표출할 때 슬그머니 보청기를 귀에서 빼버린
다고 한다.  그리고 아무 소리도 안 듣는 가운데 기도에 몰두한다고 한
다.  그러면 시간이 지나 ‘거품현상’ 이 사라지고 모든 일이 원만하게
해결된다는 것이다.”


김상길 저(著) 《겨자씨2》 (국민일보사, 73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목사님은‘약점’ 을 신앙으로 승화시켜 ‘강점’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입과 손과 발에 대한 책임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귀와 눈에 대한 책임도 큽니다.
구약 시대 제사장의 취임 예배 때, 하나님은 제사장의 오른 귓부리에
수양의 피를 바르도록 하셨습니다. ‘귀의 성결’을 의미합니다.
“너는 그 수양을 잡고 그 피를 취하여 아론의 오른 귓부리와 그 아들
들의 오른 귓부리에 바르고” (출29:20)
파괴하는 부정한 소리를 좋아하지 말아라. 의도적으로 듣지 말아라.
하나님의 소리, 선한 소리를 들으라는 것입니다.
“네가 먹는 음식이 바로 너다”는 말이 있습니다.
초식 동물과 육신 동물의 성품이 다릅니다. 먹는 게 달라서 그렇습니다.
사람은 입으로만 먹는 게 아니라, 귀로도 먹고 눈으로도 먹고 마음으
로도 먹습니다. 입에 들어가는 음식 뿐 아니라 보고 듣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음식입니다. 웰빙을 위해서 음식을 가려 먹으면서 귀로 듣는 것,
눈으로 보는 것,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은 마구 한다면 영혼이 피폐해
집니다. 음식을 먹고는 양치질을 합니다.
 
악한 것을 듣고는 좋아라 하고
솔깃하지 말고 귀를 씻어야 합니다.
무엇을 듣느냐가 인생을 좌우합니다.
   
베드로전서 3: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For Christ died for sins once for all, the righteous for the unrighteous, to bring you to God. He was put to death in the body but made alive by the Spirit,
Peter 3:18 [NIV]
   
어떻게 사랑하는가 하는 것이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을 강에 버린 것이다. 
그냥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음으로 버린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바친 것이라 표현하는 것이 옳다.
 만일 모세의 부모가 모세를 산 속에 피신 시켰다든지-
 "우리 세끼! 내 세끼, 내가 보호 안하면 
누가 지켜 줄 것인가"하였다면 모세는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고,
 아니면 아므람의 아들로서 일생을 마쳤을 것이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생명도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다. 
모세의 부모들도 그러했다.
 이것은 자식을 위한 부모의 사랑이고, 자식을 위한 헌신이다. 
그래서 우리가 자식을 위하여 헌신하고, 사랑하되
 어떻게 사랑하는가 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한 일이다.
 -가장 낮은 자의 설교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식을 위한다는 게 
자식을 반병신을 만드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자식을 극도의 이기주의자를 만들어 
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 옹고집을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식을 사랑 하다면서 무능력자,
 정신적 자폐증 환자를 만들어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식을 죽으리만큼 사랑하면서 
어떤 교육을 하고 어떤 헌신을 해야 할까요? 
지나친 과보호, 지나친 간섭, 
지나친 인정들이 자식을 기형화합니다.
그러나 모세의 부모는 자식을 위해 모험을 합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자식을 적지에 넣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자식을 위한 부모의 사랑은 하나님께 
그 자식을 맡기는 것입니다.